【건강다이제스트 | 김수진 기자】
“잘 먹고, 잘 자고, 생긴대로 살면 건강해집니다”
쉼 없이 달려온 지난 세월에 대한 보답일까?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명예교수 허정 박사는 말 그대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노년에 찾아온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다. 호탕한 성격과 직설적인 말투로 세상에 알려진 잘못된 건강 상식의 허를 찌르며 대중에게도 ‘괴짜박사’이자 인기 강사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어느새 여든이 되었다. 육식과 소식, 충분한 잠을 건강의 비결로 꼽으며, 더불어 죽을 때까지 즐겁게 부지런히 살고, 가능하면 정도正道로 가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로 건강하게 오래 사는 비법이란다. “나이 80인데, 뭐 특별한 거 있나?” 인터뷰 내내 몇 번이나 반복했던 말이지만, 허정 박사의 삶은 특유의 혜안과 건강함으로 매일 매일이 빛나고 있다.
소식과 육식, 충분한 잠이 건강의 원천
허정 박사를 만나기 위해 찾은 사무실에는 그와 30년을 함께 해온 비서가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30년이라…. 그 긴 세월에 한 번, 또 두 사람의 변치 않는 의리에 한 번 더 놀랐다.
허정 박사의 집 근처에 위치한 사무실은 이제 일선에서 물러난 허정 박사가 인터뷰와 같은 일정이 있을 때만 가끔씩 들르는 곳. 별다른 스케줄이 없는 한 집과 사무실, 공원이 있는 잠실 일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아침 6시에 시작되는 일상은 왕처럼 배부른 아침 식사와 공원 산책, 늦은 점심, 논어나 주역 공부, 저녁 식사는 아예 생략하고 8시 뉴스를 본 후 밤 9시쯤 잠드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특히 잠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9시간 이상은 꼭 잔다. 여기에 특별한 강연이나 약속이 없는 한 일주일에 1~2회 수영을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캄보디아의 프놈펜으로 휴가를 떠나 느긋한 시간을 즐긴다.
“나이들수록 적게 먹는 것이 좋아. 70이 넘으면 소화기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소식이 최우선이지. 저녁을 안 먹은 지 4~5년 됐나? 배도 안 나오고 속이 아주 편해. 나이 더 먹으면 하루에 한 끼만 먹으려고. 함석헌 선생도 70세 이후에는 한 끼만 드셨거든.”
허정 박사의 이런 소식 예찬론에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다. 예전에 TV 강연 때 밥을 조금만 먹으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더니, 농민들이 쌀값 떨어진다고 거세게 항의했던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정 박사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소식과 더불어 그가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바로 ‘고기의 힘’. 고기란 고기는 가리지 않고 든든하게 먹어둬야 피부도 좋고, 건강할 수 있단다. “예전에 이상구 박사가 TV에 나와서 채소만 먹으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나가서 고기가 보약인데 무슨 말이냐며 직격탄을 날렸지(웃음). 그랬더니 하루아침에 여기저기서 날 찾는 거야. 다들 고기 조금 먹고 채소 먹으라고 하는데, 난 반대로 말하니까 재미있고 신선했나봐. 다들 채식 채식 떠드는데, 이 이상 어떻게 더 채소를 먹어. 고기와 생선도 균형있게 먹는 게 좋아.”
이같은 그의 고기 사랑은 의학적 근거에 기초한다. 지나치게 동물성 지방을 많이 섭취하는 것도 문제지만, 채식이 몸에 좋다고 해서 기름기 있는 음식을 전혀 먹지 않으면 비타민 A와 비타민 D의 결핍 때문에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특히 식품구조가 탄수화물 위주로 구성된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실제로 세계의 장수촌을 다니면서 직접 관찰한 바에 따르면 대부분 고기 먹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고 한다.
소식, 육식과 더불어 허정 박사가 건강 비결로 꼽는 또 하나는 바로 걷기나 수영과 같은 운동이다. 그는 서울대 보건대학원장 시절 4년간 관용차를 탄 것 외에는 평생 대중교통을 이용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집 근처 아시아공원을 30분간 걷는 것도 잊지 않는다. 또 약은 되도록 먹지 않고 커피는 마시고 싶은 대로, 술은 한때 앉은 자리에서 소주 3병 정도는 거뜬히 마셨지만 이제 술과 담배는 일체 입에 대지 않는다.
고기와 커피를 실컷 즐기라는 허정 박사의 건강론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지만, 40여 년 넘게 서울대와 대학원에서 예방의학과 의학사를 강의해왔고, 아시아 전역의 장수촌을 찾아다니며 장수에 관해 연구를 한 터라 그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또 실제로 허정 박사도 이 건강법대로 자신의 건강을 지켜온 셈이니 적게 먹는 대신 고기와 커피에 한해선 자신에게 좀 더 관용을 베풀어도 될 듯 싶다.
바쁘게 살고, 바른 길을 걸어야 잘 사는 것
요즘 허정 박사는 소일거리로 주역을 공부하고 있다. 본래 한문에 관심이 많았고, 논어의 주요 구절은 외울 정도다.
“80이 되니까 오히려 멀리 내다보이는 눈이 생긴다고나 할까? 인생 정말 잠깐이야. 극히 한 찰나를 살다가 죽는 거지. 그렇게 삶에 연연했던 진시황도 결국 51세에 죽었거든. 인생 참….”
숨 가쁘게 달려왔던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정말 잠깐이란다. 서울대의대 예방의학 조교로 시작해서 미네소타 주립대에서 보건행정학 석사, 서울대 대학원에서 보건학 박사를 취득했고,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와 서울대 보건대학원 원장, 대통령 직속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 등으로 정신없이 살았다. 특히 50이 넘은 나이에 전공인 예방의학과 보건의학에서 방향을 달리하여 동양의학사와 서양보건사를 새롭게 공부하여 학생들을 가르쳤고, 시원시원한 말투와 필체로 방송이나 신문에서도 맹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한동안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상식의 허실-건강 편’ 칼럼은 허정 박사로 인해 신문 발행 부수가 50%나 더 늘었을 정도였다고.
또 ‘허정 박사의 생긴대로 건강법’, ‘허정 박사의 건강 클리닉’ 등 그가 펴낸 건강 관련 서적도 기존의 통념을 깨는 신선한 시각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허정 박사의 생긴대로 건강법’은 그가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역 의학연구자문위원장으로서 티베트, 몽고,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등 유라시아의 장수촌과 전통의학 현장을 15년간 답사한 소감과 연구 결과가 담겨 있어 장수를 연구하는 데 있어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요즘도 여전히 그를 찾는 곳은 많다. 기업 CEO들 모임이나 장성들 모임에 초청돼 강연을 하기도 한다. 또 올해 초에는 KBS ‘언제나 청춘’의 특강을 맡았는데, 반응이 뜨거워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창 바빴던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그저 노는 게 일이란다. “나이 들어서는 조용히 사는 게 좋지. 사실 너무 오래 사는 것도 골치 아픈 거 같아. 특별히 아픈 데는 없어도 늙으니까 무릎도 안 좋고, 시력도 나빠지고, 보청기도 끼게 되더라고. 내가 의학을 공부한 사람인데도 어쩔 수 없어(웃음). 사람이라는 것이 참 쓸쓸하고 약한 존재야. 그냥 죽을 때까지 열심히 살고, 가능하면 올바른 길로 가면 좋아. 남한테 잘하고, 나쁜 짓 조금만 하자고!!”
그의 이러한 인생철학은 평생 공부해온 의학보다도 더 소중한 진리이자, 나이 여든이 되고서야 깨달은 삶의 교훈이기도 하다. 여기에 평소 올바른 생활습관만 더해진다면 누구나 건강하고 즐겁게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앞으로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나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 나이에 특별한 계획은 무슨! 여기저기 슬슬 다니다가 답답하면 주역이나 논어 보고 그러는 거지 뭐. 또 오라는 데 있으면 가면 되고. 아참, 우리나라는 앞으로 잘 될 거야. 국운이 융성기에 접어들었거든.”이라며 주역을 공부하는 사람답게 우리나라의 미래도 점쳐준다.
한 평생을 의학 연구와 교육에 바쳐온 허정 박사. 여든이라는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건강과 열정이야말로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선물인 듯싶다.
인터뷰 말미에 “오늘 아침은 제과점에 가서 바게트에 치즈랑 햄 넣어 먹고, 우유 한잔 마셨지.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있더라고. 그런 게 행복이지 뭐. 별 다른 거 있나?”
정말 허정 박사의 얼굴에는 행복함과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소소한 일상에도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마음가짐. 이것이 바로 허정 박사의 가장 큰 건강 비결이 아닐까?
<허정 박사가 추천하는 건강법 9계명>
1. 음식을 고루 먹고 과식하지 말자.
2. 나이를 먹어서도 고기를 많이 먹자.
3. 강장음식은 성욕을 돕지 않는다.
4. 목욕을 자주하되 때를 밀지 말고 비누를 적게 쓰자.
5. 커피와 술은 자기 몸이 허락하는 선에서 마시고 싶은 대로 마신다.
6. 나이를 먹어서도 부부관계를 갖는 것이 좋다.
7. 약은 되도록 적게 먹는다.
8. 건강에 관련된 잘못된 금기를 버려라.
9. 소문난 의사보다는 단골의사를 갖는 것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