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이은혜 기자】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암 환자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위암 진단! 병원에서는 수술을 하자고 했다. 반드시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정도만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리고 결심했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로 기억되기 위한 시간을 살기 시작했다.
평생 하지 않았던 설거지를 도맡아 하고 집안 청소도 하고 빨래도 했다. 갑자기 변한 남편을, 아빠를 가족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그랬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암세포가 선명하게 찍힌 내시경 사진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 또한 믿지 못할 일이었다. 암세포가 없어졌다고 했다. 그것도 1년 만에!
좀체 믿을 수 없는 사연의 주인공은 바로 광주에 사는 김영지 씨(58세)다. 군에서 전역한 후 지금껏 예비군 지역대장으로 살아온 그가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주책없이 눈물부터 난다며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털어놓은 이야기는 많이 놀라웠고, 또 많이 특별했다.
점심 먹으면 토하고 헛구역질도 나고…
군에서 소령으로 전역해서 예비군 지역대장으로 살아온 김영지 씨! 그런데 이상했다. 어느 날부터 그랬다. 점심을 먹으면 토하고 헛구역질이 났다. 달리기를 할 때도 힘에 부쳤다. 그래서였다. 건강검진 전문병원에 갔다. 위 내시경을 해볼 생각이었다.
2013년 8월, 위내시경 검사를 했던 김영지 씨는 아연실색했다. 내시경을 하자마자 위암이라고 했다. 조직검사를 해봐야 정확한 건 알 수 있지만 그래도 위암이라고 했다. 이럴 수도 있나 싶었다. 느닷없이 위암이라니…. 그것도 내시경 검사로 위암이라니….
그 후의 일은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대학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했고,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되었다. 위암이었다. 아직 전이는 안 됐고, 크기는 5cm 정도 된다고 했다. 의사는 말했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위 전체를 절제하는 수술을 하자고 했다.
“그때는 참 어렵대요. 수술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으니까요. 다른 의사도 만나봤지만 이구동성으로 수술이 최선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김영지 씨는 선뜻 결심을 하지 못했다. 가슴 아픈 가족사가 그의 결심을 방해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두 명이나 위암으로 잃어야 했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2012년 둘째형이 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위암을 발견해서 수술을 했는데 1년도 못 돼 돌아가셨어요. 설상가상 2013년 초에는 큰 형수님마저 위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바로 그해, 그까지 위암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줄줄이 이어진 불행 앞에서 그는 할 말을 잃었다. 그 또한 위암의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였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그는 수술을 포기했다. 수술을 해도 결국은 죽는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했다. ‘암이라는 것 자체가 깊이를 모르지만 수술 안 하면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정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부터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시한부 삶을 받아놓은 사람처럼 마음이 급해진 김영지 씨는 마음을 정했다. ‘남은 생은 가족들에게 봉사하자.’ 적어도 가족들에게 좋은 남편, 좋은 아빠로 기억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 말한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로 기억되기 위해
위암 진단을 받고, 수술까지 포기한 김영지 씨. 째깍째깍 다가오는 죽음의 초침소리를 들으며 마지막 임무처럼 여겼던 것은 좋은 남편, 좋은 아빠로 기억되고 싶다는 거였다.
그래서였다. 그는 달라졌다. 예전의 권위적이고, 집안일 나몰라라 했던 삶과 180도 다른 삶을 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면서 가족들을 위해 살기 시작했어요.”
달라진 남편을, 아빠를 가족들은 신기해했다. 그래도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위암이라는 사실도 알리지 않은 채 자상한 남편, 좋은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며온다며 굵은 눈물을 훔치는 김영지 씨! 그러면서 하는 말은 “자신은 복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최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왜일까?
수술 대신 했던 것들?
짧게는 2년 정도만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던 김영지 씨가 위암 수술을 포기하고 찾아간 사람이 있었다. 전남 화순에 있는 정용재 약사였다. 둘째형이 위암으로 사경을 헤맬 때 수소문해서 알아낸 분이었다. 둘째형은 너무 늦어서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그에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방송에도 여러 번 소개가 되었고, 또 암 환자들이 많이 실천하는 것으로 알려진 바보요법을 주창하신 분이었는데 저도 그 방법을 한 번 실천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난 정용재 약사도 그에게 수술을 권했다. 또 직장은 그만두라고 했다. 지금부터는 오로지 무너진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시간을 살아야 한다고 권했다.
하지만 김영지 씨는 그럴 수 없었다. 수술은 하고 싶지 않았다. 직장도 그만둘 수 없었다. 1년만 더 다니면 한도가 끝나는 연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남은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약사님으로부터 독한 사람이라고 독설도 들었지만 그것 말고는 약사님께서 하라는 대로 다했어요. 꾀부리지 않고 정말 열심히 실천했어요.”
이때 그가 실천했다고 알려주는 방법은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저 바보처럼 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한다.
■ 1 하루 세 끼는 바보죽을 먹었다.
찹쌀, 멥쌀 현미 싸라기, 검정콩 볶은 가루, 검정참깨 볶은 가루, 율무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소금 없이 죽으로 쑤어 한 번에 한 공기씩 하루에 여러 번 나누어 먹었다.
죽을 먹을 때는 반드시 바보처럼 싱글싱글 웃으면서 매우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100번 이상 꼭꼭 씹어서 먹었다.
한 그릇 먹는 데 한 시간씩 걸려서 먹었다. 바보죽을 입에 넣고 설거지도 하고 청소도 하면서 먹기도 했다. 식탁에서 앉아서 밥을 먹는 대신 입에 넣고 돌아다니면서 먹었다. 다섯 살 아이가 밥 먹듯이 먹었다.
■ 2 녹즙도 빼놓지 않고 마셨다.
양배추즙과 사과즙을 반반씩 섞어서 마셨다. 녹즙을 마실 때도 꼭꼭 씹어서 먹는다는 생각으로 마셨다. 너무 차지 않게 입안에서 오래오래 씹어서 따뜻하게 해서 넘겼다. 녹즙을 마실 때도 싱글싱글 웃고 콧노래를 부르면서 마셨다.
■ 3 출퇴근 시에는 차 안에서 큰 소리로 웃고 떠들고 소리를 질렀다.
배꼽이 아플 정도로 웃었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나는 바보다.”를 외쳤다. 정말로 바보가 된 것처럼 살았다. 스트레스 없이, 생각 없이 살려고 노력했다. 절박하니 가능했다.
■ 4 몸은 늘 따뜻하게 했다.
면역력을 높이는 데 좋다고 해서몸을 따뜻하게 했다. 반신욕도 자주 하고, 주열기도 늘 사용했다. 그렇게 하면 몸도 가벼워지고 기분도 좋아지고 컨디션도 좋아져서 더 열심히 했다.
■ 5 실크 아미노산도 꾸준히 먹었다.
우연히 알게 된 실크 아미노산도 큰 도움이 됐다. 병든 조직을 재건하고 세포의 밥이 되는 아미노산을 흡수율 높게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 지금도 꾸준히 섭취하고 있을 정도다.
■ 6 밤 11시 이전에는 꼭 잤다.
먹고 자고 먹고 자는 것이 좋다고 했지만 직장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밤 11시 이전에는 꼭 잠자리에 들었다.
이외에도 ▶과식 절대 안하기 ▶햇볕 많이 쬐기 ▶주말에는 산에 가서 맑은 공기 마시기 ▶미지근한 물 많이 마시기 등도 꾸준히 실천하며 수술도 안 하고, 항암치료도 안 한 위암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김영지 씨는 빌고 또 빌었다고 말한다.
2014년 3월 27일,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2013년 8월 위암 진단을 받았던 김영지 씨는 2014년 3월 27일 믿을 수 없는 사연의 주인공이 됐다.
오랜만에 간 병원! 내시경을 했다. 그런데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진단 당시 화산 폭발처럼 볼록볼록 덩어리져 있었던 위암세포가 없어졌던 것이다.
담당의사도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그래서 조직검사도 여러 번 다시 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암세포는 발견되지 않았다. 내시경 사진에 선명하게 있던 암세포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1년도 안 돼 없어졌던 것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어요. 처음 암세포를 발견했던 담당의사도 황당해했으니까요.”
그러나 암세포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였다. 그해 12월 또다시 내시경을 했다. 결과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암세포는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으로 기쁘고 한편으로는 믿기지 않고…그래서 서울대병원에도 검사를 의뢰 했어요.”
혈액과 진단서, 조직검사 결과지를 함께 보냈다. 그리고 나온 결과는?
“김영지 님의 5대암 검진 인덱스 수치가 모두 정상 범위입니다. 문진표상 위암 환자분이신데 혈액검사 소견상 암 관련 종양표지자도 모두 정상범위 내에 있는 것으로…(중략)”라고 했던 것이다.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었다는 김영지 씨! 특히 서울대병원 검사 결과지에 덧붙여져 있던 소견서는 그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제가 갖고 있던 암 자체가 악성 중의 악성이라고 하더군요. 이런 암은 수술을 해도 죽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어요.”
자신에게 그런 행운이 주어졌다는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김영지 씨다. 그래서일까? 김영지 씨는 2016년 2월 현재 조금 특별한 삶을 꿈꾸고 있다.
“올 3월 그동안 몸담았던 예비군 지역대장도 명예퇴직을 할 생각입니다. 앞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김영지 씨는 여전히 건강관리도 열심히 하고, 그에게 나타난 기적이 다른 사람에게도 일어나길 염원하며 수많은 암 환자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