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허미숙 기자】
이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 그래서 오늘 주어진 하루를 가장 행복해 하며 사는 사람!
경기도 부천시 도당동에서 공인중개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문구 씨(61세)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되고 있는 사람이다. 사망률 1위 암으로 악명이 높은 위암 수술 후 13년을 살고 있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생존율 낮기로 원성이 자자한 췌장암 수술 후 9년을 살고 있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위암도, 췌장암도 거뜬히 이겨내고 새로운 희망의 증거가 되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느닷없이 위암
‘이참에 건강검진을 한 번 받아볼까?’
2004년 7월, 느닷없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행운처럼 여겨진다고 김문구 씨는 말한다.
“그 당시 경기도 부천에서 부동산 중개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이 몰리면서 서너 달 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어요. 밥 먹을 시간조차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7월이 되자 일이 뚝 끊기면서 모처럼 한가해지자 ‘이참에 건강검진을 한 번 받아보자’며 대학병원을 찾았어요.”
특별히 아픈 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생전 처음 거금 40만 원을 들여 종합검진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내시경 검사에서 가슴 서늘해지는 말을 들었다. “보호자와 함께 오세요.” 그 말이 시련의 전주곡이 될 줄 몰랐다. 보호자와 함께 다시 찾은 병원에서 담당의사는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말했다. “위암 초기입니다.”
그 순간 김문구 씨는 ‘의사 선생님이 돌팔이인가?’ 생각부터 했다고 한다. “아무런 증상이 없었는데 갑자기 암이라니…믿기지가 않았어요. 암이 그렇게 쉽게 생길 수 있는 거라고도 생각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또다시 든 생각은 ‘내시경 사진이 바뀌었을 것이다.’라는 거였다. 그만큼 건강했기 때문이었다. 검사 CD를 가지고 서울백병원으로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위암이 맞다고 했다.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다행히 위암 초기여서 90%는 산다고 했다.
그러나 김문구 씨 귀에 더 크게 들렸던 건 10%는 죽는다는 생략된 말이었다. ‘이걸로 끝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술 날 아내한테 유언도 했다. 잘 살라고. 2004년 8월 김문구 씨는 그렇게 수술대 위에 올랐다고 한다.
위암 수술 4년 만에 또다시…
유언까지 했지만 다행히 위암 수술은 잘 됐다고 했다. 위를 3분의 2나 잘라냈고, 전이는 안 됐다고 했다. 김문구 씨는 “죽는 10%에 들지 않은 행운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고 한다.
게다가 항암과 방사선 치료는 하지 않아도 되는 억세게 운 좋은 편에 속하기도 했다. 하지만 암 수술 후유증은 결코 피해갈 수 없었다.
“속이 쓰리고 아파서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어요. 이걸 먹어도 안 되고 저걸 먹어도 안 되고…그러다가 같은 병실에 있던 위암 수술 환자가 포도를 먹길래 한 알 달라고 먹었더니 괜찮았어요. 그래서 한 달 넘게 포도만 먹고 살기도 했어요.”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는 것도 너무나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잠만 자면 악몽을 꾸었어요. 죽은 사람이 나오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담당의사한테 말했더니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김문구 씨는 “정신과 치료를 받느니 차라리 공부를 하자 결심했다.”고 한다. 암 수술도 모자라 정신과 치료까지는 받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잠이 안 오면 공부를 하자는 거였다고 한다.
젊은 시절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니며 힘들게 공부를 했던 그였다.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늘 부족한 것이 잠이었다. 잠 한 번 실컷 자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그였다.
그래서였다. 한국사이버대학 부동산학과에 편입을 했다. 잠이 안 오면 책을 펴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방법이 적중했다. 불면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위암 수술 후유증도 하나둘 극복해가면서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4년째 되던 해였다. 1년에 한 번씩 하는 정기 체크를 위해 병원을 찾았던 그는 또다시 닥친 시련 앞에서 넋을 놓고 말았다.
2008년 8월에 또다시 췌장암
2008년 8월 어느 날, 정기 체크를 위해 병원을 찾았던 김문구 씨는 CT를 보면서 담당의사가 했던 말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위암은 전이도 없고 재발도 없는데 별개의 암으로 췌장암이 생겼다.” 고 했던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제 정말로 죽는구나 했어요. 걸리면 죽는 암으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또다시 암이라는 사실도 기가 찬데 게다가 췌장암이라니? 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그런 그에게 담당의사는 “생존율은 낮지만 초기라서 행운”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곧바로 수술을 하자고 했지만 수술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알아보니 췌장암의 5년 생존율은 5%로 낮았다. 그런 상황에서 고통스럽게 수술하면 뭐하나 싶었다.
그런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가족이었다. 죽더라도 최선을 다해보자며 그를 설득했다. 결국 2008년 9월 국립암센터에서 췌장 꼬리 쪽과 비장을 다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17년 12월 현재 김문구 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당뇨 관리 힘들지만 하루하루 행복해~
한 가지 암도 아니고 두 가지 암을, 그것도 생존율 낮기로 악명이 높은 췌장암까지 이겨내고 9년째 장기 생존하고 있는 김문구 씨는 뜨거운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주인공이다. 의료계도 주목하고 있고, 암 환우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억세게 운 좋은 사람으로 불리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그가 들인 노력은 말로 다 못 한다.
김문구 씨는 “췌장암은 생존율이 낮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며 “췌장암 수술을 하자마자 곧바로 당뇨 환자가 됐다.”고 말한다.
그 후환은 실로 고통스러웠다. 당뇨 약을 먹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식이요법, 운동요법도 마찬가지였다. 주머니에 돈 대신 비상 사탕, 물, 긴급 전화기만 넣고 집에서 나와 직선으로 하루 종일 걸어도 혈당은 잡히지 않았다. 혈당 수치가 500 이상 치솟아 잴 수조차 없게 됐다가 곧바로 저혈당이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생사의 고비도 숱하게 넘나들어야 했다.
그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이 되어주었던 것은 인슐린 펌프였다. 인슐린 주사를 정밀하게 구간구간 나눠서 놓는 인슐린 펌프를 알게 되면서 자신에게 맞는 인슐린 수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김문구 씨는 “그것도 3년 동안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알아낸 수치”라며 “비로소 혈당을 잡을 수 있게 되면서 하루 식사량을 조절할 수 있게 됐고, 운동량도 정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췌장암 수술 후 9년이라는 장기 생존의 비결이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소개하는 췌장암 수술 후 건강 회복의 밑그림으로 삼은 것은 크게 4가지다.
1. 하루에 2시간씩 날마다 운동하기
출퇴근은 반드시 자전거로 한다. 일을 보러 갈 때도 자가용 대신 자전거를 이용한다. 하루에 꼭 해야 할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사무실에 출근해서도 오전에 1시간, 오후에 1시간씩 꼭꼭 헬스를 한다. 이를 위해 사무실 2층에 운동공간도 마련돼 있다. 그만의 헬스장인 셈이다. 이렇게 마련된 헬스장에는 러닝머신, 훌라후프, 아령, 역기 등 8종의 운동기구가 구비돼 있기도 하다.
2. 원형이 유지되는 식품 위주로 먹기
많이들 궁금해 한다. “혹시 뭐 먹고 효과 봤어요?” 하지만 김문구 씨는 이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다. 특별히 챙겨 먹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음식을 먹을 때는 원형이 유지되는 음식을 주로 먹는다. 사과를 먹을 때도 그냥 사과로 먹지 갈아서 먹지 않는 식이다.
다만 탄수화물 섭취는 반드시 조절한다. 하루 150g으로 제한한다. 또 간식은 먹지 않는다. 주스 한 잔을 마셔도 인슐린을 공급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3. 욕심을 버리고 스트레스 안 받기
일 욕심도 버리고, 돈 욕심도 버리니 스트레스 받을 일도 별로 없다. 내려놓는 만큼 스트레스가 줄어든다는 걸 알게 되면서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고 한다.
4. 일주일에 한 번 산에 가고 한 달에 한 번은 패러글라이딩 즐기기
일주일에 한 번은 가까운 산을 오르며 일상의 찌꺼기를 몰아내고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다. 패러글라이딩은 20년간 즐겨온 취미생활이기도 하다. 새처럼 나는 기분이 황홀해서 한 달에 한 번은 꼭 즐긴다. 췌장암 수술 후 복대를 한 몸으로 살 수 있나 없나를 테스트 해보겠다며 인천 대부도에서 패러글라이딩을 탔던 그였다. 무사히 비행을 마쳤을 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오늘도 식사하기 전에는 반드시 버튼을 눌러서 인슐린을 공급하고 식사를 해야 하고, 주스 한 잔을 마실 때도 혈당 생각을 해야 하지만 그래도 오늘 살아 있어 행복하다는 김문구 씨!
날마다 혈당과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해야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날마다 2시간씩 꼭꼭 해야 하는 운동도 최대한 즐겁게 한다.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절제된 삶도 기꺼이 즐기며 산다. 지금도 여전히 경기도 부천시 도당동에서 부동산 중개일을 하면서 암 이후의 삶도 성공적으로 꾸려가고 있다. 그런 그에게 한 마디 부탁했다.
“암 환자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요? 암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야 암과의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디 김문구 씨의 이 말이 많은 암 환자들에게 희망의 메신저가 되었으며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