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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에세이] 끊임없이 변화, 창조하는 삶 살아야

2001년 05월 건강다이제스트 상큼호

?법정 스님

인생은 끝없는 실험이자 시도

불임암에서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살았는데 새로 옮겨온 이곳에서는 늘 시냇물 소리를 들어야 한다. 산 위에는 항시 바람이 지나간다. 그러나 낮은 골짜기에는 바람 대신 시냇물이 흐른다.

바람소리 물소리가 똑같은 자연의 소리인데도 그 느낌은 각기 다르다. 숲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때로는 사는 일이 허허롭게 여겨져 훌쩍 어디론가 먼길을 떠나고 싶은 그런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폭풍우라도 휘몰아치는 날이면 스산하기 그지없어 내 속은 거칠은 들녘이 된다.

그런데 이번에 옮겨온 집은 시냇가에 잡은 곳이라 쉬지 않고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좋으나 싫으나 밤낮으로 듣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처음 며칠 동안은 비가 내린 뒤라 그 소리에 여간 마음이 쓰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무심해져서 별로 거슬리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는 소리라고, 인생이 흘러가는 소리라고 생각하니 도리어 시간에 대한 관념이 새로워진다.

바람소리가 때로는 까칠까칠 메마르고 허전하게 들리는 것과는 달리, 물소리는 어딘지 촉촉하고 풍성하게 들리는 듯 하다. 그리고 한없이 무엇인가를 씻어내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한때 높은 데서 드러나게 살았으니, 이제는 낮은 데 내려와 은신해서 살고 싶다. 혼자서 유별나게 살아보았으니 이제는 또 여럿 속에 섞이어 그 그늘 아래 묻혀서 살고 싶다. 이 세상을 내 힘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을 바에야, 내 자신의 생활구조만이라도 개조해보고 싶은 것이다. 새로운 변화를 통해서 잠재된 ‘나’를 일깨워 보고 싶다. 인생은 어떤 목표나 완성이 아니고 끝없는 실험이요 시도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원천인 흙을 가까이 해야

나는 맨발로 밭에 들어가 흙 밟는 그 감촉을 좋아한다. 여름날 산그늘이 내릴 무렵에 채소밭에서 김을 맬 때, 맨발이 되어 밭흙을 밟고 있으면 간질간질한 그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땅기운이 내 몸에까지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흙이 생명의 원천임을 알아야 한다. 마른 씨앗을 흙에 묻어두면 거기서 움이 크고 잎이 펼쳐지고 꽃을 피우다가 열매를 맺는다.

흙에서 멀수록 병원과 가까워진다는 말은 어김없는 진리다. 우리가 살만큼 살다가 돌아가 삭아질 곳 또한 이 흙이다. 이런 흙을 더럽히면 자신의 뿌리가 그만큼 허약해진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명심해야 한다.

인연·관계의 다리는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

이번 태풍의 영향으로 개울물이 불어나 오두막으로 이어진 다리가 떠내려갔다. 비가 멎은 날 아침 개울가에 내려가 다리가 없어진 걸 보고 허망한 감회와 함께 아하 지금까지 이 다리가 세상과 나를 이어주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울물이 줄어들기까지는 산을 내려갈 수 가 없게 되었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다.

통나무로 걸쳐놓은 다리를 건너다니면서도 이 다리가 세상과 나를 이어주고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했었다. 하룻밤 사이에 다리가 없어져 버리니 이 산중이 갑자기 바다에 떠 있는 섬처럼 여겨진다.

우리에게는 건너다니는 다리 말고도 이웃 사이에 놓여진 인연의 다리, 관계의 다리가 있다. 눈에 보이는 다리가 무너지면 다시 놓으면 된다. 그러나 관계의 다리가 불편하거나 단절되면 인간의 영역이 그만큼 위축되고 상처를 입는다. 관계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관계 또한 우리들을 만들어간다.

홀로 있는 시간은 진정한 자신과 마주하는 기회

홀로 있는 시간은 본래적인 자기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다. 발가벗은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기다. 하루하루를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 앞이다. 그리고 내 영혼의 무게가 얼마쯤 나가는지 달아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외부의 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그리고 감촉에만 관심을 쏟느라고 저 아래 바닥에서 울려오는 진정한 자기 소리는 듣지 못하고 있다.

찻간이나 집안에서 별로 듣지 않으면서 라디오를 켜놓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이 바깥 소리에 깊이 중독되어 버린 탓이다. 우리는 지금 꽉 들어찬 속에서 쫓기면서 살고 있다. 여백이나 여유는 조금도 없다. 시간에 쫓기고 일에 쫓기면서 허겁지겁 살아가고 있다. 쫓기기만 하면서 살다 보니 이제는 쫓기지 않아도 될 자리에서조차 마음을 놓지 못한 채 무엇엔가 다시 쫓길 것을 찾는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허(虛)가 아쉽다. 빈 구석이 그립다는 말이다. 일, 물건, 집, 사람 할 것 없이 너무 가득 차 있는 데서만 살고 있기 때문에 좀 덜 찬 데가, 좀 모자란 듯한 그런 구석이 그립고 아쉽다.

변화없는 삶은 침체되고 무기력해져

가을바람이 선들거리면 불쑥불쑥 길을 떠나고 싶은 충동에 암자를 지키고 있기가 어렵다. 그리고 맨날 똑같은 먹이와 틀에 박힌 생활에 더러는 염증이 생기려고 한다. 다른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지내다가도 10월 하순께가 되면 묵은 병이 도지듯 문득 나그네길을 떠나고 싶다.

그날도 점심 공양을 끝내고 세상 소식 좀 듣다가 여느 때처럼 뜰에 나와 장작을 패고 있었다. 오동나무와 후박나무에서 마른 바람결에 뚝뚝 지는 낙엽을 보고 있으니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서둘러 짐을 챙겨 가지고 길을 떠나오고 말았다.

삶이 하나의 흐름이라는 걸 실감한다. 그 어떤 형태의 삶이라 할지라도 틀에 갇혀 안주하다보면 굳어진다. 굳어지면 고인 물처럼 생기를 잃는다. 사람은 동물이라 움직임이 없으면 무뎌지고 또한 시들고 만다.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든 모두가 움직이고 있다. 변화가 없는 삶은 이내 침체되고 무기력해진다. 그리고 진부하고 지루해지게 마련이다. 생활에 리듬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연은 인간의 영원한 귀의처

겨울비가 내린다.

눈이 와야 할 계절에 비가 내린다. 메마른 바람소리만 듣다가 소근소근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니 내 마음도 촉촉이 젖어드는 것만 같다.

이런 날 산방에서는 좌선이 제격이다. 덤덤히 앉아서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되니까. 선의 명제인 화두고 뭐고 다 놓아버린 채 빈 마음으로 귀를 열어 놓는다. 자연의 질서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마음에 묻은 때가 조금씩 씻겨나가는 것을 가늠할 수 있다. 이런 날 누구에게도,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음 없이 적적히 앉아 있으면 그대로가 존재의 기쁨이 된다.

아무리 훌륭한 음악이라도 이 자연의 소리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온갖 모순과 갈등으로 부침하는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 놓은 것이므로 자연처럼 우리 마음을 편하게 해줄 수가 없다. 자연의 소리는 그 자체가 생명을 지니고 있고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자연은 사람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무엇 하나 강요하는 일도 없다. 그러나 사람은 자연에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고 빼앗고 허문다. 자연은 요구대로 다 내어준다. 대지는 이래서 인간의 어머니이다. 엄마의 품에 안기면 어린애의 마음이 아늑해지듯이, 자연에 기대고 있으면 그저 편안하고 넉넉할 뿐이다.

현대 문명의 해독제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어온 자연이어야 한다. 그 어떤 종교라 할지라도 만인에게 자연처럼 영원한 귀의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산다는 건 쉼 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

겨울숲은 부질없는 가식을 모조리 떨쳐 버리고 본질적인 것으로만 집약된 나무들의 본래 면목이다. 숲은 침묵의 의미를 알고 있다. 침묵을 딛고 일어선다. 봄날 움을 틔워 초록빛 물감을 풀어 수줍게 설레다가, 여름에는 뜨거운 태양을 받아 서늘한 그늘을 대지에 드리운다. 가을이 되면 열매를 익히면서 이 골짝 저 골짝에서 울긋불긋 서로 손짓하다가 마침내 미련없이 낙하(落下). 머리와 팔을 허공에 치켜든 채 이제는 말없이 묵상에 잠겨 있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자신에게 자신을 만들어 준다. 이 창조의 노력이 멎을 때 나무건 사람이건 늙음과 질병과 죽음이 온다.

겉으로 보기에 나무들은 표정을 잃은 채 덤덤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잠시도 창조의 일손을 멈추지 않는다. 땅의 은밀한 말씀에 귀기울이며 새봄의 싹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시절 인연이 오면 안으로 다스리던 생명력을 대지 위에 활짝 펼쳐 보일 것이다.

 

글쓴이 법정 스님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수행자로, 자연 속에서 직접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며 청빈의 도(道)와 맑고 향기로운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글은 산 속에 사는 산 사람(山之山人)으로 살아온 그가 지난 20년간 쓴 글 가운데 계절과 자연에 관한 수상들만을 명상시인 류시화가 최근 모아 엮은 단행본 <봄 여름 가을 겨울>(이레 刊, 02-3143-2900) 중 일부를 발췌한 것.

늘 새롭게 태어나는 자연과 간소하고 소박한 삶을 소망하는 법정 스님의 깨어 살기 위한 배움과 사색으로 충만한 면면들을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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