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허미숙 기자】
“치유의 땅 손죽도에서 새 생명을 얻었어요”
암 환자들 사이에서 전설이 돼 있는 사람!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수많은 암 환자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있는 사람! 여수에서 두 시간 남짓 배를 타고 가면 닿을 수 있는 손죽도에는 생존율 5%의 간담도암을 이겨내고 기사회생한 김영란 씨(56세)가 살고 있다.
다들 기적이라고 말한다. 암 중에서 포악하기로 악명이 높은 간담도암을 이겨내고 장기 생존의 새 길을 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비결은 과연 뭐였을까? 손죽도의 한 점 그림이 되어 살고 있는 김영란 씨의 지난 이야기를 들어봤다.?
솜이 물에 젖은 듯…
그렇게 몸이 무거웠다. 2007년도부터 시작된 피로감은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졌다. 일상생활조차 힘들었을 때는 얼굴까지 노랬다. 동네병원에 가서 검사도 해봤다. 황달검사도 했고, 간초음파도 했고, 간 피검사도 했다. 이것저것 검사를 받으면서 10여 가지 검사기록지를 받았지만 특별한 증상은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날이 몸은 더 힘들어지던 2009년 초, 혹시나 하며 진단방사선과 문을 열고 들어섰던 건 지금 생각해도 행운처럼 느껴진다.
김영란 씨는 “심한 피로감에 복부팽만감까지 몸이 너무 안 좋아 무작정 들어가게 됐다.”며 “초음파를 찍은 지 얼마 안 돼 안 찍어주겠다는 걸 실랑이를 벌여 겨우겨우 찍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결과는 충격이었다. 간암인 것 같다고 했다. 그 후의 일은 아직도 김영란 씨 뇌리에 또렷이 각인돼 있다. 검사기록지를 들고 이 병원, 저 병원 정신없이 쫓아다니며 황망했던 절망감!
세브란스병원도 가고, 서울대병원도 가고, 삼성의료원에도 갔다. 이구동성으로 간암이 맞다고 했다. 수술을 하자는 병원도 있었고, 에탄올요법으로 치료하자는 병원도 있었다.
2009년 6월 하루, 우여곡절 끝에 삼성의료원에서 수술을 했다. 그런데 수술 후 담당의사가 이상한 말을 했다. “간암이면 걱정 안 하겠는데…”라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상했다. “조직검사 결과 간암이 아니라 담도암이어서 걱정스럽다.”며 “앞으로 미래가 어떻게 될지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다.”고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어요. 하지만 알고 보니 담도암은 암 중에서도 가장 포악한 성질을 지닌 암으로 알려져 있었어요. 암 중에서 최악의 암이라고 하더군요.”
생존율이 고작 5%밖에 안 되는 암이었다. 한 마디로 수술을 했어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항암도 방사선도 의미 없다고 했다. 그저 추적 관찰만 하자고 했다.
2009년 6월, 담도암 수술을 받았던 김영란 씨는 생존율 5%라는 최악의 수치를 받아들고 거동조차 힘든 몸으로 퇴원을 했다. 그때 그녀 나이는 고작 마흔일곱이었다. 아이들도 어려서 막내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죽음의 길목에서 얻은 어떤 깨달음
수술을 해도 생존율 5%라는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수술 후 김영란 씨가 처한 현실이 이를 방증했다. 거동조차 힘든 몸, 얼굴은 노랗다 못해 시커멓게 변해갔다. 웬일인지 목소리까지 안 나오고, 허리도 펼 수 없었다. 김영란 씨는 “어쩔 수 없이 요양원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며 “요양원에서도 하루 종일 누워서 기도밖에 할 게 없었다.”고 말한다.
“사람 몰골이 아니었어요. 남편이 요양원에 오는 것도 싫었어요. 얼굴은 노랗다 못해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듯 시커멓게 타버렸고, 푸석푸석 까맣고, 노랗고… 너무도 비참했어요. 병든 살이 너무도 부끄러웠어요.”
어린 자식 생각해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며 일본에서 나온 건강식품도 거금을 들여 사먹기도 했고, 유명 다단계 회사에서 파는 건강식품도 500만 원어치나 사먹어 봤지만 서서히 내려앉는 죽음의 그림자는 나날이 짙어만 갔다.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김영란 씨는 “많은 것을 포기한 시점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보다 못한 친구가 권한 것이 있었다.
“해독을 해보라는 거였어요. 책을 한 권 갖다 주면서 권했지만 저는 더 이상 노력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어떤 것도 늦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울며 매달리는 친구에게 ‘마지막 보답이라도 하자.’며 10일 해독을 하게 된 것이 그녀의 인생 지침을 돌려놓을 줄 몰랐었다. 김영란 씨는 “녹즙도 마시고 풍욕도 하면서 몸속의 독소를 빼내는 자연 해독방법을 10일 프로그램으로 실천했는데 10일도 되기 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얼굴이 노랗다 못해 흰 눈동자까지 노랬는데 해독 프로그램을 시작한 지 4일 만에 눈동자의 노란색이 빠지기 시작했다. 또 남편에게조차 보이기 싫었던 살갗의 노란 독소들도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다.
김영란 씨는 “해독 프로그램을 10일간 실천한 뒤 그리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말한다. 집을 떠난 지 꼭 10개월 만이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집안에 나뒹굴고 있던 아이들 사진을 벽에 거는 일이었다. 그 일을 하면서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지금도 10일의 해독시간을 치유의 시작점으로 치는 그녀다.
김영란 씨는 “해독을 알게 되면서 많은 것이 변했다.”고 말한다. 암에 대한 공부도 시작했고, 살기 위한 몸부림도 새롭게 시작됐기 때문이다.
여수에서 2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손죽도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도 그래서였다. 김영란 씨는 “망가진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며 “도시를 떠나자 결심했다.”고 말한다.
치유의 땅 ‘손죽도’에서 만난 기적
2010년, 허름한 농가를 빌려서 홀로 손죽도 생활을 시작했다는 김영란 씨! 가족들은 부천 집에 둔 채였다. 집안 청소조차 버거운 몸이었지만 섬생활을 감행했다.
그렇게 시작된 손죽도에서의 하루하루는 예전 생활과 많이 달랐다. 해독을 통해 자연치유에 눈을 뜨게 된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자연요법에 대한 공부도 새롭게 시작했고, 날마다 투병일기도 쓰기 시작했다.
김영란 씨는 “손죽도 생활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병든 몸을 회복하기 위한 투병 밑그림도 그릴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그런 그녀가 치유의 기본으로 삼은 것은 막스거슨요법이었다. 반복적인 해독을 통해 몸속의 독소를 비워내는 데 집중했다. 3개월마다 한 번씩 했다. 황달이 올 때마다 했다. 황달을 해결 못하면 죽는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았다. 복수가 차면 더 이상 가망 없음도 너무도 잘 알았다.
몸이 조금만 안 좋으면 곧바로 나타나는 황달은 참으로 다스리기 버거운 적수였다. 손바닥이 노랗고 얼굴이 노래지면서 붉은 핏기가 전부 사라졌다. 김영란 씨는 “황달을 해결하는 것이 투병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며 “다양한 해독방법을 총동원해 황달을 제압하면서 최소한 걸을 수 있는 힘이 생겼고, 병색도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때 김영란 씨가 몸속의 독소를 비워내기 위해 달력 뒷면에다 하루생활 계획표까지 그려놓고 날마다 실천하기 시작한 해독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1.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30분 간 풍욕하기
깊은 호흡을 통해 몸속의 독소를 빼냈다. 모포를 갖고 산에서 풍욕을 하면서 신선한 산소를 몸속 깊숙이 주입했다.
2. 하루 6~10잔 녹즙 마시기
수시로 녹즙을 짜 먹었다. 하루에 6잔도 마시고 10잔도 마셨다. 녹즙은 병든 조직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았다. 병든 몸을 회복할 훌륭한 복구의 재료임도 알았다. 엽록소의 구조가 혈액 구조와 흡사해서 모든 중금속을 제거하고 세포에 영양을 공급해주기 때문이었다.
손죽도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잘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묵혀버린 산을 개간한 것도 그래서였다. 농약에 오염되지 않은 땅을 개간해 당근씨도 뿌리고, 무씨도 뿌렸다. 셀러리도 키우고 치커리도 키웠다. 비료 한 줌 뿌리지 않고 자연의 힘으로 키워낸 채소로 녹즙을 짜 먹고 생채식으로 매일 먹었다. 외식 한 번 안 하고 먹거리는 직접 키워서 먹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3. 산에서 바닷가에서 날마다 30분씩 맨발로 걷기
아침 식사 후에는 날마다 30분씩 맨발로 바닷가를 걷거나 산길을 걸었다. 맨발로 걸으면 몸속에서 짝을 잃고 방황하는 활성산소가 -전자가 풍부한 땅속으로 빠져나가면서 활성산소를 없애준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맨발로 모래를 밟으며 바닷가를 걷거나 흙길을 걷고 나면 미열이 뚝 떨어지면서 활력이 되살아나서 좋았다.
4. 자연의 한 점으로 살기
해가 뜨면 일어나 자연 속으로 나가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드는 자연의 시간표대로 사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비록 간, 담, 쓸개를 잘라내서 그런지 걸음도 빨리 못 걷고 옆구리도 자주 아팠지만 그런 몸으로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으며 하루 종일 몸을 움직였다. 일을 하다 힘들면 손죽도의 햇볕과 바람에 몸을 맡기고 휴식을 취했다. 풀벌레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까지 비울 수 있어서 좋았다.
김영란 씨는 “이렇게 살기 시작하면서 3개월에 한 번씩 오던 황달이 5개월에 한 번, 8개월에 한 번 점점 그 틈이 길어지면서 몸도 서서히 회복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피곤함도 덜해지고 얼굴색도 날로 좋아졌다.
그렇게 산 지 5년쯤 흘렀을까? 김영란 씨는 “2015년 즈음, 죽음과 같은 시간이 지나고 ‘이제 죽지는 않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손죽도에 집도 샀다. 남편에게 부탁도 했다. 손죽도에서 같이 살아달라고.
그리하여 남편 조순오 씨와 함께 손죽도의 한 점 풍경이 되어 살고 있는 김영란 씨! 2018년 6월 현재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손죽도의 유명인사가 되어…
2018년 6월, 손죽도에서 만난 김영란 씨는 하루해가 너무 짧다고 하소연부터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밤 8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하루 종일 쉴 틈이 없다고 했다. 운동도 하고, 농사도 짓고, 민박도 치고,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만나야 한다.
언제부턴가 손죽도의 유명인사가 되어버린 그녀다. 병원에서 들었다면서 물어물어 손죽도로 그녀를 찾아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아내가 간담도암이라며 찾아온 사람도 있고, 그녀를 찾아왔다가 손죽도에서 1년 6개월째 살고 있는 암 환자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신저가 되고 있는 김영란 씨!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공부한 것도 알려주면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암 환자들에게 희망을 선물한다.
김영란 씨는 “어떻게 알고 물어물어 찾아와 도움을 청하는 그 절박감을 너무도 잘 안다.”면서 “그래서인지 제 인생이 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고 말한다. 절망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희망을 줄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강도 철저히 챙긴다. 담도암을 수술한 지 9년,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해졌지만 여전히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서 자연의 섭리대로 살고, 자연의 먹거리를 먹으며, 일 년에 한 번씩 해독도 한다. 깨끗한 쓰레기통에서는 구더기가 생기지 않는다는 걸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부탁했다. “암 환자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가 있을까요?” 이 물음에 김영란 씨는 “살다가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자연은 그녀에게 죽음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새 길을 열어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