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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체험기] 생업마저 포기해야했던 만성위염 현미식으로 이겨낸 전학주씨

2001년 10월 건강다이제스트 보양호

【건강다이제스트 | 송화정 기자】

만성위염. 약간 거북스런 소화불량에서 시작된 이것은 결국 미음조차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생업마저 포기한 채로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그리고 1년여간의 만성위염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은 지금의 전학주씨(61)를 새로운 인생의 길로 들여놓았다.

생각지도 못한 위염으로 삶에 대한 의욕마저 잃어버리고 자리에 누워야 했던 몇 개월의 기간. 그를 살린 것은 다름아니라 작은 한톨의 현미였다. 현미로 고통스럽던 위염을 고치고 새 삶을 찾은 전학주씨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새로운 꿈을 안고 시작한 이민

1981년 어느날. 전학주씨는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한 채로 미국으로의 이민을 결심했다. 한국에서 벽지 제조 사업을 운영하며, 사업상 홍콩, 일본, 태국, 미국 등 해외 여러나라들을 다닐 기회가 있었던 전씨는 유독 여유로움과 풍요로움으로 가득한 미국이란 나라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고민과 고뇌 속에서 결정된 미국행은 그에게 ”아메리칸 드림”의 희망을 가슴 깊이 끌어안으며 부푼 가슴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서 희망하나만으로 생활을 꾸려나간다는 것은 그리 녹록치만은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텍사스주 해양연구소에서 일자리를 구해 생활을 영위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언어장벽과 새로운 나라 속에서 동화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잘살겠다”라는 일념하나로 먼 타국땅으로 그를 믿고 함께 건너온 가족들을 위해서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되도록 빨리 타국의 생활에 익숙해지는 길밖에는 없었다. 낮이면 일을 하고, 밤이면 언어를 익히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6개월 정도 흘렀을까. 자주 위가 더부룩해지며, 소화가 잘되지 않는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씨는 이러한 증상들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증상들이 현재의 자신에게는 마냥 귀찮기만 한 일이었기 때문에 소화가 잘 되지 않을 때마다 그는 소화제로 거북한 속을 달랬다.

생업마저 포기하게 한 만성위염

이제 생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혀가고 있었다. 파란 눈과 노란 머리의 외국 아이들과도 거리낌없이 뛰어노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그간의 힘든 노력이 헛되지만은 않았구나라는 생각으로 뿌듯해지기만 했다.

그러나 2년여의 시간은 그에게 이러한 행복만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소화불량이려니 생각하며 소화제로 달려온 속이 더 이상 소화제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그는 소화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음식물을 위에서 받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미음조차도 제대로 먹지못해 토해내고 물 외에는 아무것도 몸속으로 들일수가 없었다.

그때서야 전씨는 힘든 몸을 이끌고 병원을 찾았다. 신경성 만성위염. 그의 병명은 이러했다. 평소 특별히 맵거나 짠 자극적인 음식을 즐기는 것도 아니었으며 폭식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민생활을 시작하며 적응하기위해 힘써왔던 바쁜 생활이 원인이었다.

”그때는 정말 살아있다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음식은 전혀 입에 대지도 못한채 물만 겨우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었으니까요. 통증은 별로 없었지만 소화가 안돼 음식을 먹질 못하니 항상 기운이 없어 누워만 있었어요. 몸은 점점 말라만 가고, 의사들은 음식을 조금씩 조절해서 먹으라며 이런 저런 방법들을 제게 가르쳐 주긴 했지만 더욱 심해지기만 할뿐 차도가 없었죠.”

그사이 그의 몸은 피골이 상접했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뼈만 앙상히 남아 있었다. 168㎝의 키에 68㎏정도의 몸무게를 유지하던 과거와는 달리 50㎏대를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병원도 참 여러군데를 옮겨다녔죠. 유명하다는 큰병원을 이리저리 찾아다니며 종합진찰도 여러번 받았습니다. 결국 더욱 심해지기만해서 일도 그만두고 몸조리를 해야했습니다.”

古정사영 박사와의 만남, 현미식의 시작

2개월간의 병원치료에도 차도가 없자 전씨는 삶에 대한 의욕까지 상실해가고 있었다.

마침 그때 그는 미국 휴스톤에서 前수도병원 원장이었던 古정사영박사의 건강세미나에서 강연을 듣게 되었다. 정사영박사는 그당시 ’기적을 낳는 현미’라는 책의 저자로 국내외 현미보급에 힘쓰고 있던 분이셨다.

전씨는 정박사의 강의를 들으며 직접 그자리에서 진찰을 받고 현미식사법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정사영박사가 전해준 현미식사는 이러했다. 넘어가지 않음에도 식사를 억지로 하지 말 것, 물을 먹지 말고 대신 야채즙으로 많이 섭취할 것, 밥대신 현미밥을 먹을 것. 이 세가지였다.

현미밥은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가지고 다니며 아주 소량만 껌 씹듯이 오래오래 씹어 수시로 먹으라는 것이 정박사의 가르침이었다. 전씨는 꾸준히 그것에 따랐다. 비록 현미만을 밥으로 먹는 것이 그리고 오래오래 얼마나 씹었는지 기억도 안날만큼 계속 씹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현미식사에 매달렸다.

그렇게 두달정도 흐른 뒤 그는 현미밥외에 조금씩 다른 반찬들도 입에 넣기 시작했다.

6개월후 전씨는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100%완치까지는 아니었지만 이제 어느정도 식사도 할 수 있었으며 활동도 가능했다. 모두 현미 덕분이었다.

쉽게 먹을 수 있는 현미 개발

그렇게 1년후 그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고생스럽게 병치레를 한 이후 다시 시작하는 일이라 의욕에 넘쳤다.

그러나 일을 다시 시작하고 1년이 조금 지났을까. 그간 해오던 현미식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완치가 되어서란 이유보다 먹기가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일을 시작하며 현미를 수시로 껌처럼 씹으며 먹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다른 음식물을 섭취할 때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위에 부담을 주지않도록 소식을 하며 백미라고 해도 많이 씹으며 조심조심 식사를 했다.

전씨는 몇 년전 자신이 정사영 박사를 따라다니며 현미에 대해 공부하던 때를 떠올렸다.

첫 강의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6개월가량 강연하는 곳마다 정박사를 따라다니며 현미에 대한 정보를 얻었었다. 정박사는 항상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곤 했다.

”현미가 건강에 좋다는 것은 강의를 들으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상식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강연을 열심히 한다해도 이를 실천하는 이는 몇 안 되죠. 그 이유는 현미는 80번이상 씹어야 제대로 소화가 가능한 것이라 먹기에 너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전선생께서 부드럽게 가공해서 쉽게 먹을 수 있는 현미를 한번 개발해 보세요.”

전씨는 정박사의 이런 이야기를 가슴에 품으며 먹기좋은 현미개발에 대한 꿈을 가슴 한켠에 키웠다.

91년 드디어 그는 미국에서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국의 땅을 밟았다. 그리고 그간 품어오던 일들을 실행에 옮겼다. 한국과 일본, 중국을 오가며 현미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에 실패만을 거듭했다. 한때는 개발을 포기하기도 했었다. 그러기를 10여년. 종자학, 인체학, 식품발효학 등 여러 학문을 독학으로 섭렵하고, 개발비가 없어, 공장, 아파트 등의 수위를 하며 연구에 매달렸다. 정보가 부족할 때마다 찾아갔던 각계전문가들은 전씨의 노력에 혀를 내두르기까지 했다.

전씨는 이러한 노력 끝에 현미피막이 너무 강질이어서 물을 잘 흡수하지 못하고, 식사때 껄끄럽고 미끄러워서 잘 씹히지 않는 것이 관건이라는 것을 발견. 직접 개발한 압연롤러에 널링(knurling)무늬를 성형하여, 현미를 압연하여 현미 피막을 균열시키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먹기 힘들 뿐 아니라 소화도 잘 안되고 밥짓기도 힘들었던 현미의 모든 문제를 한번에 해결하는 일이었다. 드디어 먹기 좋은 현미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현미전도사’가 되어

”이럴 때 정사영박사님께서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눈앞에 선합니다. 지금 그분을 더 이상 뵐 수 없다는 것이 가슴 아프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분의 바램을 이루어서 기쁩니다. 아마도 제가 정박사님을 만나뵙지 못했더라면 지금의 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정박사님께 지금도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전씨는 古정사영 박사에 대한 고마움을 여전히 안고 산다.

현재 자신이 개발한 현미로 다시 식단을 현미식으로 바꾸어 생활하고 있는 전씨의 얼굴에는 편안함과 여유로움이 묻어나고 있다.

”처음 현미식을 시작할 때만 해도 혹시나 하는 기분으로 시작한 건 사실입니다. 당시 이것이 아니면 더 이상 희망이 없었으니까요. 현미식을 시작하고 점점 나아지는 자신을 보며 참 많은 생각들을 했습니다. 믿음과 여유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병을 치유하는 진짜 치료약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악몽같은 치료의 시간동안 그의 또다른 치료약은 삶의 여유와 살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믿음이었다.

또, 힘든 시간동안 자신의 곁에서 말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던 가족들의 정성이 없었다면 이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아플 때, 그리고 연구에 골몰하며 집안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을 때도 아내와 아들은 항상 자신의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곱던 얼굴에 주름이 하나둘씩 늘고 흰머리가 희긋희긋해지도록 자신만을 바라봐준 아내와 이제는 어엿한 청년으로 자라나 밝게 웃으며 아버지의 일을 이해해줄 줄 아는 아들이 마냥 고맙기만 한다.

그러나 ”고맙다”는 그 말한마디가 어려워 아직도 한마디도 입밖으로 꺼내본 적이 없다.

”허허.. 말안해도 이제는 다들 알겠죠. 그동안 함께 해온 시간이 있는데요.”

여전히 그말은 쑥쓰러운가보다. 얼굴 가득 붉은 홍조가 느껴지는 듯하다.

”제게 바램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현미로 건강한 생활을 유지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먹기 좋은 현미를 개발하기도 한 것이고요.”

이제 그의 얼굴은 또 다른 희망과 기대로 빛나고 있다. 다른이에게 현미의 이로움을 알리고 전파하는 것. 이것이 앞으로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금더 가족들에게 미안한 일을 해야겠습니다. ”

이 말과 함께 웃는 그의 얼굴이 참 행복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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