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박현아 기자】
【도움말 |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세원 교수】
신문사 부장으로 일하던 정수빈(49)씨는 지난해 봄 퇴직한 후 백수로 살고 있다. 준비되지 않은 퇴직을 하는 바람에 인생 계획은 엉클어졌지만 정 씨는 몇 달 뒤에 받은 회사의 재입사 제안을 거절했다. 인생 2막을 설계하진 못했어도 번아웃 증후군으로 고통 받던 당시의 기억이 생생해서 다시 일할 자신이 없었다. 정 씨는 퇴직 전 주당 60시간씩 일했다. 스스로가 다 타버려서 불씨조차 없어진 장작 같이 느껴져 결국 사표를 썼다. 워커홀릭인 CEO는 아침이든 한밤중이든 카톡으로 업무 지시를 내렸다. 정 씨는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까톡~ 까톡~’ 하는 소리가 들리는 환청도 겪었다.”며 “노동시간은 길고 사생활도 없이 일하다보니 결국 번아웃이 되더라.”며 씁쓸해 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노동시간 1위! 한국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과로가 일상화된 직장인들에게 최근 들어 번아웃 증후군이 화제를 낳고 있다. “내 이야기네~” 하며 폭풍공감하는 직장인들도 적지 않다.
지금 탈진증후군에 빠져 있나요?
아직도 상당수 기업들이 초과근무를 당연시하다 보니 일에 지치고 동료들에게 시달린 직장인들은 번아웃 증후군에 시달리다 퇴직의 길을 걷게 된다.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은 미국의 정신분석의사 H. 프뤼덴버그가 자신이 치료하던 한 간호사에게서 이 증후군의 첫 사례를 찾아내면서 사용한 심리학 용어다. 쉽게 말하자면 탈진증후군이나 연소증후군이다. 직무와 관련된 스트레스 반응의 형태로 ▶동기 저하 ▶무기력 ▶냉소주의로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는 심리적 상태를 가리킨다.
어떤 일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어느 시점에서 갑자기 모두 불타버린 연료 같이 무기력해지는데 육체적 피로와 정신적 피로가 극에 달했을 때 나타난다.
번아웃 증후군은 질병은 아니다. 심한 경우 자살을 동반한다는 것 역시 과장이다. 하지만 맥이 빠지고 무기력한 증상이 퇴근 후까지 지속된다면 전문가를 만나 상담을 받아야 한다. 우울증으로 발전하진 않았는지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성균관대 의대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임세원 교수는 “현대인에겐 직업이 곧 자신의 정체성인데 왜 일을 하는지 모를 정도가 되면 불행한 일”이라며 “이는 조직의 생산성도 심각하게 떨어뜨리고 냉소주의가 동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주면서 창의성과 능률을 해친다.”고 말한다.
번아웃 증후군은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보다는 직장인들에게 많다. 임세원 교수는 “여러 연구를 보면 헬핑 프로페션(helping profession), 즉 소방관·사회복지사·간호사 등 남을 돕는 직업에서 번아웃 증후군이 흔하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간호사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 행동하는 직업이다. 의사는 늘 환자 곁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환자는 간호사에게 불만을 제기한다. 하지만 곧바로 이를 해결해주지 못하므로 간호사가 받는 스트레스가 심하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감정노동도 같이 해야 하는 직업군이므로 위험에 노출돼 있다.
업무량이 많을 때만 번아웃 되는 것은 아니다. 변화와 자극이 거의 없는 단조로운 일을 오래 지속했을 때도 올 수 있다. 예컨대 기차가 하루에 두 번 다니는 기차역 매표직원이 그렇다. 일이 너무 없는 업무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상사나 동료, 부하직원과의 관계 갈등 역시 번아웃 증후군을 부를 수 있다.
연차가 높아질수록 심해지는 것은 아니다. 간호사들에 대한 연구를 보면 10년차가 되기 전에 번아웃을 경험한 사례도 많다. 직장생활 연차가 짧은 젊은 세대도 경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창조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즘은 직원들에게 재충전의 기회를 많이 줘야 한다. 요즘은 많은 기업들이 법적 휴가의 보장을 당연시한다. 직원들이 재충전해야 창조성이 높아지고 국제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다는 마인드를 갖고 있다. 관리자들의 인식 역시 크게 바뀌었다.
하지만 재무 구조가 부실하거나 CEO 마인드가 후진적인 기업들은 인력이 충분하지 못하다. 개인 업무량이 많다 보니 핵심 인력이 유지되지 못한다. 또 근로시간으로 업무 성과를 평가하는 기업들은 여전히 휴가를 주는 데 인색하다.
생산성이 근로시간과 비례하지 않는데도 회사에 오래 남아 있어야 열심히 일하는 사람으로 착각하는 기업이나 직장상사들이 여전히 많다. 핵심 인력이 업무에 익숙해져서 고차원적인 일을 해야 기업이 성장하는데 이들을 번아웃 시키면 더 손해다. 직원들의 휴식과 놀이는 조직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번아웃 증후군, 이렇게 극복하세요!
1 잘 놀 줄 알아야 한다
휴식과 놀이는 삶의 필수 요소다. 잘 놀고 잘 쉬어야 한다. 등산이나 여행, 레저 등 업무 스트레스가 퇴근 후로 연장되지 않는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임세원 교수는 “육체적, 심리적 에너지는 무한하지 않다.”며 “일하면서 지친 체력도 보충해야 하고, 심리적 에너지도 재충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 직장인의 상당수가 일과 생활의 균형을 추구하지 못하고 일과 휴식만 반복한다. 일하고 잠깐 쉬고, 다시 일하고 또 쉴 뿐이다. 취미생활과 여행을 즐기면서 여가를 보내는 게 아니라 일하다 집에 가서 자고 다시 일하고 자는 패턴을 반복한다. 피로한 상태에서 벗어나 생기를 되찾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2 관계성을 강화하라
개인적, 사회적 관계가 좋은 사람은 번아웃에 빠지지 않는다. 퇴근 후 집에 좋은 아내, 귀여운 아이들이 있다면 가족 관계가 그 사람을 보호해준다. 그런데 직장에서 종일 시달렸는데 집에서도 홀로 밥을 먹는다면 번아웃이 우울증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개인적,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잘 유지해야 하는 이유다.
3 스스로를 다면화하라
“재미의 세계가 넓으면 넓을수록 행복의 기회가 많아지고, 운명의 지배를 덜 당하게 된다.” 러셀의 말이다.
오랫동안 현업을 유지하고 싶으면 일에 몰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과 개인생활의 균형을 맞추면서 입체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 사람은 관심의 영역이 좁으면 좁을수록 문제가 생길 때 대응이 어려워지고 결국 무너진다. 내가 가진 자원이나 관심도가 여러 가지라면 한쪽이 잘 안 되더라도 다른 쪽 에너지로 채울 수 있다.
임세원 교수는 “어떤 일을 오래하고 싶으면 다른 일에도 폭넓어져야 한다.”며 “본업과 비슷하거나 혹은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 흥미를 느끼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고,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는 입체적 인간이 돼야 성공이 다가온다.”고 조언한다.
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도 진료 외에 클래식 음악 청취, 클래식 음반 수집 등 인생의 폭을 넓혀서 살 필요가 있다. 직장에 나와서 일하고 집에서 잠자는 생활만 반복하면 언젠가는 지친다. 주말에는 동호회에서 야구도 하고, 평일 저녁에는 레고 조립도 하면서 입체적으로 살다 보면 직장 스트레스에 더 잘 대처할 수 있다.
4 스스로에게 보상을 줘라
열심히 일한 당신에게 보상을 아끼지 마라. 맛집 투어를 다니거나 문화예술을 즐기면서 좋은 자극을 주는 것도 방법이다. ‘오늘은 고생했으니 내게 돈을 쓰자!’ 7만 원짜리 저녁식사를 하면서 자신에게 보상하라. 스트레스 해소는 공짜로 얻어지진 않는다. 투자가 필요하다.
5 사직도 솔루션이 될 수 있다
회사가 자신을 너무 괴롭혀서 결국 사직한 다음 번아웃에서 빠져 나왔다면 문제는 해결된 셈이다. 생계 방편이 해결됐다면 사직도 해법이다. 자신과 너무 맞지 않는 배우자와 이혼한 후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임세원 교수는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과 임상조교수를 지냈다. 현재 성균관대 의대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겸 기업정신건강연구소 부소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