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김진경 기자】
“가족들의 사랑이 새생명을 주었어요”
“꽃다운 스물 여섯, 이 한 해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더랬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암으로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간암과 췌장암으로 의사와 가족 모두 소생하기를 포기했었다는 서정순 씨(43). 스물 여섯 서러운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그녀가 지금은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다. 간암과 췌장암을 이겨내고 건강하게 살고 있는 그녀의 암 투병담을 들어본다.
갈라진 아스팔트 사이로 듬성듬성 피어있는 꽃과 여기저기 심어져 있는 각종 채소들이 보이는 길. 이 길을 따라 동네로 들어서면 정겨운 동네 풍경이 펼쳐진다. 너른 마당에는 누구나 와서 앉으라는 듯 주인 없는 평상이 하나 놓여져 있고, 집 앞 자그마한 공간에는 상추와 고추들이 싱그러움을 뽐내고 있다.
그리고 이 공간을 적막하지 않게 만드는 한 사람! 순박한 얼굴로 사람을 포근히 맞아주는 서정순 씨가 그곳에 있었다.
갑작스레 내려진 죽음 선고
올해로 마흔 셋인 서정순 씨는 순박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 서울 생활을 한지 벌써 20년이 되어 가는 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직도 스스로를 ’촌댁’이라고 한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싫은 내색 하나 하지 못할 것만 같은 그녀. 그러나 한때 그녀는 간암과 췌장암으로 저승길에 발을 내딛었다 돌아왔다고 한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열이 펄펄 끓었습니다. 남편에게 업혀 찾아간 병원에서 간암과 췌장암 진단을 받았었지요.”
당시 백일 된 딸이 하나 있었던 서정순 씨는 평소 체한 것처럼 속이 미식거리고, 통증이 있었다고 한다. 기운이 없어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나 어린 젖먹이가 있어서 병원에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저 참고 또 참고 하다가 결국 남편의 등에 업혀 병원을 찾게 되었다.
”작은 병원에 갔더니 병명이 나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며칠 입원했다가 의사의 권유로 큰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그렇게 서정순 씨는 대학병원으로 후송되어 이것저것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검사 결과 그녀에게 떨어진 병명은 간암과 췌장암이었다. 온몸에 암이 전이가 되었기 때문에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은 것은 그녀의 부모님과 남편이었다. 내 피와 살 같은 자식을, 이제 막 태어난 내 딸의 엄마를 먼저 보내야 했던 그녀의 부모님과 남편은 그저 망연자실할 뿐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병원에 누워 있는데 암이라고 그러더군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암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당시 기운이 전혀 없었던 탓이었는지 서정순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자신이 죽을 병에 걸렸다는 데도 큰 동요가 일지 않았다는 그녀. 그러나 이렇듯 의연했던 그녀도 통증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단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통증이, 정말 말할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오더군요. 복수도 차고, 열도 나고… 음식도 전혀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사를 하도 맞아서 더 이상 주사 놓을 자리도 없었다. 숨도 차고 기운도 없고… 그렇게 죽은 사람 마냥 늘어져 하루하루를 간신히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순간 숨이 차오르더라고요. 중환자실로 갔는데 순간 숨이 끊어진 것 같다고… 제 기억에도 그때 잠깐 꼭 죽었던 것 같아요.”
이후 서정순 씨는 죽은 자신을 붙들고 남편은 심폐소생술을 하고 아버지는 배를 계속 쓰다듬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남편과 아버지의 손길에 그녀는 까무룩 잃었던 정신을 차렸단다.
다시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운이 없어서 말도 안 나오고, 몸이 너무 약해서 수술도 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다시 살아났지만 가망이 없다고 했다. 오히려 살날이 이제 고작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퇴원할 것을 권했다. 시댁에서는 관까지 짜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있었다. 친척 어른 중 한 분이 암에 걸렸다가 회생했다며 광주의 한 약국을 소개해 준 것이다.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나
병원에서 쫓겨나다시피 퇴원한 서정순 씨. 생떼 같은 자식 차마 가슴에 묻을 수 없었던 그녀의 아버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약국을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식이요법 몇 가지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가르쳐 준 식이요법대로 여러 가지 곡물로 죽을 쑤어 먹었습니다. 간도 하지 않고 그냥 먹었지요. 한 몇 개월 먹다보니까 식욕이 점차 돌아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친정에서 투병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끼니때마다 약과 죽 등을 꼬박꼬박 챙겨주셨다. 덕분에 그녀는 현미, 검정콩, 찹쌀, 멥쌀, 검은깨, 율무 등을 갈아서 만든 죽을 꾸준히 먹을 수 있었다. 부모님은 암환자의 경우 몸에서 염분을 빼내야 좋다는 말에 소금간은 일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과일도 많이 먹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감을 많이 먹었다고. ”실로 꿰어 마루에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감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면서 잘도 집어먹었다.”며 그녀는 웃었다.
그렇게 식이요법을 한지 5개월이 지나자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게 생기기 시작했다는 서정순 씨. 이에 부모님은 오리죽에 토끼죽 등 기운을 보해준다는 음식들을 챙겨주기 시작했다고 한다.
”입맛이 돌면서 기운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힘이 생겨 앓고나서 처음으로 밖에 나와봤는데 온 나무들이, 이 세상이 그렇게 깨끗해 보일 수가 없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니까 살려고 그랬나봐요”
항상 감사하는 마음 잊지 않아
서정순 씨는 지금은 암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벌써 17년 전 이야기지만 당시 어린 젖먹이 남겨두고 어찌 가나 서러웠다며 눈물짓는 그녀. 그녀는 자신이 산 것은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과 사랑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젖먹이였던 큰딸이 어느새 18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고맙게도 아들을 둘이나 더 낳아 다섯 식구가 되었지요. 이게 다 부모님과 남편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 덕분입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삶은 거저 얻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더욱 감사하다고 한다. 자신을 보살펴 준 부모님께 감사하고, 회사까지 그만두면서 자신에게 매달려 준 남편에게도 감사하고,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준 친척들에게도 감사하고, 아픈 자신을 다시 받아준 시댁 식구들에게도 감사하단다.
지금의 이 삶이 여러 사람들 덕분인데 잘 하지도 못하고 산다는 서정순 씨. 그녀에게 건강하게 사는 것이 보답이 아니겠냐며 조심스러운 말을 건네자 마치 수줍은 처녀 마냥 배시시 웃는다.
인터뷰를 끝내고 뙤약볕 속을 걸어 돌아가는 기자가 안쓰러웠는지 그녀는 손을 꼭 잡으며 양산을 쓰고 다니라고 권했다. 처음 만난 사람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그녀. 그녀가 살아난 것은 분명 하늘이 세상에 이런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