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허미숙 기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암에 대해 공부해야 살 길도 열립니다”
2012년 1월, 간암 진단을 받았다. 2.5cm 크기라고 했다. 수술하면 괜찮을 거라고 해서 수술을 했다.
2013년 6월, 림프로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3.5cm 크기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수술을 하자고 해서 또다시 수술을 했다.
그 정도로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3개월 만에 또 다시 림프에 5.5cm 크기의 암세포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비로소 알았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때부터였다. 전이와 재발을 거듭하는 암과의 사투에서 끝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지금은 수많은 암 환우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되고 있는 사람! 박학근 씨(54세)의 용감무쌍한 암 치유기를 들어봤다.
어쩌면 예견된 일!
24세에 경찰공무원으로 발령을 받아 베테랑 정보형사로 이름을 날리기까지 박학근 씨의 하루하루는 치열했다. 밤낮 없이 일했고, 주말도 잊고 살았다. 정보를 수집하고 갈등도 중재하면서 늦은 밤까지 술자리가 이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렇게 23년이 흐른 2012년 1월 어느 날, 박학근 씨는 병원을 찾았다. 심한 피로감 때문이었다.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여서 큰 맘 먹고 병원을 찾았던 그는 아연실색했다. 초음파 검사 결과 간 종양수치가 많이 올라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던 것이다.
그 후의 일은 예상대로다. 병원으로 달려가 정밀검사를 받았고, 간 우엽에 2.5cm 크기의 종양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박학근 씨는 “느닷없이 닥친 일이었지만 수술로 제거하면 괜찮을 거라고 해서 안심하고 수술대 위에 올랐다.”며 “2012년 2월 간을 35%나 절제하는 수술을 했다.”고 한다. 그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수술만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수술은 잘 됐다고 했다. 항암, 방사선은 안 했다. 10일 만에 퇴원도 할 수 있었다. 담당의사는 “이제 관리만 잘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술·담배도 끊었다. 연가, 병가를 다 쓰고 다시금 출근도 하게 되면서 갑자기 찾아온 간암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암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년 4개월이 흐른 2013년 6월, 정기체크를 하던 박학근 씨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간 옆에 있는 림프에 암이 전이됐다고 했던 것이다.
수술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림프로 전이라니…. 결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담당의사는 또다시 수술을 하자고 했다.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2013년 8월 또다시 수술대 위에 올랐다.
박학근 씨는 “간 가까이 뭉쳐 있는 림프에서 3.5cm 크기의 암세포를 긁어내는 수술을 하면서 제발 두 번으로 끝나기를 빌고 또 빌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기도는 끝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3개월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정기체크를 하던 중 림프에 5.5cm 크기의 암세포가 또다시 생겼다고 했다. 수술도 어렵다고 했다. 항암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박학근 씨는 “이쯤 되니 돌아버리겠더라.”고 말한다.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한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알게 됐다. 암이라는 게 잘라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그래서 시작했다. ‘공부를 하자!’ 박학근 씨는 “하나뿐인 생명에 너무나 무지했던 자신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며 “곧바로 병원에 가서 의무기록지부터 복사를 했다.”고 한다.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들
간암 발병에서 림프 전이까지 꼼꼼히 기록된 의무기록지는 책 2권 분량이나 됐다. 박학근 씨는 “CT 판독지, PET CT·MRI 검사지, 혈액 검사지를 펼쳐놓고 몸 상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록 대부분이 영어로 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의학용어였다. ‘그래도 알아야 한다.’며 휴대폰을 옆에 놓고 판독지 단어 하나하나를 검색해서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갔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은 놀라웠다. 간암 진단부터 수술까지 2년간의 몸 상태가 한눈에 들어왔다. 언제 암이 커졌고, 어떨 때는 좋아졌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림프에 생긴 5.5cm 암세포는 대략난감이었다. 항암치료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정하기 쉽지 않았다.
박학근 씨는 “고민고민하다 결국 병원에서 권하는 대로 항암치료를 시작했지만 10일 만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세상에 그런 고통이 있을 줄 몰랐다. 항암제를 복용하고 3일째 되던 날부터 무기력증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손톱, 발톱 밑에는 노랗게 고름이 잡혔는데 살짝 스치기만 해도 자지러지게 아팠다. 화장실에서 바지 올리기도 힘들었다.
박학근 씨는 “항암약을 먹기 전에는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는데 항암약을 먹으면서 사는 게 아니었다.”며 “어차피 누구나 한 번 죽는 것 항암약 안 먹고 조금 일찍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고 말한다.
그래서였다. 10일 만에 항암치료는 중단했다. 그런 결정을 했어도 현대의학에서 포기한 환자가 된다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그럴 즈음이었다. 엔도르핀 박사로 화제를 모았던 재미의학자 이상구 박사가 TV에서 한 말이 생각났다. “암, 그것 걱정 말라.”며 “감기보다 더 쉽게 나을 수 있는 병”이라고 했던 말이었다. “뉴스타트 건강법을 실천하면 암도 얼마든지 나을 수 있다.”는 거였다.
10일 만에 항암치료를 중단했던 박학근 씨가 2013년 12월 강원도 속초로 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9박 10일 뉴스타트 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뉴스타트 프로그램을 알게 되면서…
박학근 씨는 “9박 10일 간 참가한 뉴스타트 프로그램은 전이암, 재발암의 덫에서 벗어나는 희망의 출구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고 말한다. 투병 밑그림을 그리는 데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생각을 바꾸고, 생활을 바꾼다고 해서 암이 나을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웃고 다니고 기쁨을 느낀다고 해서 암이 없어질 것 같지는 않아서였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박학근 씨는 “9박 10일 프로그램을 다녀온 뒤 병원 체크에서 407이던 종양수치가 184로 떨어지는 이변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래서였다. ‘바로 이거구나.’했다. 그동안 올라가기만 했던 종양수치가 내려가니 세상을 다 얻은 듯했다.
9박10일 프로그램이 끝나자마자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에덴요양병원으로 향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뉴스타트 프로그램을 실천하는 곳이었다.
박학근 씨는 “이곳에서 뉴스타트 건강법을 실천하면서 습관도 바꾸고, 먹거리도 바꾸고, 마음도 바꾸면서 암이 나을 수 있다는 희망도 함께 갖게 됐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실천했다는 뉴스타트 생활은 어떤 것일까?
▶ 5시 기상해서 기도 10분, 스트레칭 30분하기 : 매일 아침 이 두 가지를 하지 않으면 아침밥을 먹지 않았다. 그 생활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6시 아침기도 30분 하기 : 매일 참가했다. 무신론자였지만 매일 아침 일어날 수 있음에 감사하는 기도를 했다.
▶7시 아침체조 30분 하기 : 매일 참가했다.
▶7시 30분 아침식사 하기 : 채식 식단을 먹었고, 음식을 먹을 때는 200번 이상 꼭꼭 씹어 먹었다.
▶9시 등산 1~2시간 하기 : 칼바람을 맞으며 능선을 타고 걸었다. 날아가는 새 한 마리도 반갑고 나무 가지 하나도 기억 속에 남기고 싶었다.
▶12시 명상 30분 하기 : 암이 나아서 건강한 모습 상상하기도 했다.
▶12시 30분 점심식사 하기 : 채식 식단 위주로 먹었다.
▶14시 웃음치료 1시간 한 후 휴식 취하기
▶17시 30분 저녁식사 후 간단한 산책하기
▶21시 30분에 저녁 잠자리 들기
▶매 식사 후에는 30분간 복식호흡하면서 산책하기
박학근 씨는 “밥을 먹을 때도 이 음식이 내 몸에 들어가서 암세포를 없애는 자양분이 되기를 염원하면서 먹었고, 겨울바람에 입술이 틀 정도로 복식호흡도 했다.”며 “그런 간절함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됐던 것 같다.”고 말한다.
전이와 재발의 위협에도 꿋꿋하게~
뉴스타트 생활을 통해 종양수치가 뚝뚝 떨어지면서 전이암과의 싸움에서 반전의 기회를 마련했다는 박학근 씨!
하지만 암은 끈질겼다. 두 번의 위기를 통해 반격이 시작됐다. 뉴스타트 생활을 한 지 4개월 정도 됐을 때였다. 내려가던 종양수치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학근 씨는 이미 그 이유를 짐작할 만큼 암의 생리에 대해서도 꿰뚫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운동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박학근 씨는 “운동을 조금 줄이고 완전 채식에서 단백질을 보충하는 식생활로 돌아서자 다시금 종양수치가 내려갔다.”며 “이 일을 통해 암은 얼마든지 관리가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암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뉴스타트 생활을 한 지 10개월이 되었을 때 또 한 번의 위기가 그를 찾아왔다.
박학근 씨는 “또다시 종양수치가 치솟아 CT를 찍어보니 간 좌엽에 1cm 크기의 암세포가 새롭게 발견됐다.”며 “림프에 있는 5.5cm 전이암도 있는데 재발암까지 가세하니 마음이 많이 복잡해지더라.”고 말한다.
하지만 크게 동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뉴스타트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간에 1cm 재발암이 생긴 이유를 짐작하고 있어서였다.
박학근 씨는 “구구절절 밝힐 순 없지만 마음의 원한을 털어내지 못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그것이 원인이 돼 발생한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비로소 마음까지 비워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원망도 버리고 미움도 버리고 욕심도 버렸다. 부정을 버리고 긍정으로, 미움을 버리고 사랑으로 마음을 채웠다.
그러자 비로소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좋은 일도 많았다. 간 좌엽에 새로 생긴 1cm 암세포는 고주파 열치료를 통해 거의 부작용 없이 사멸됐고, 림프에 있던 5.5cm 암세포까지 수술로 깨끗이 제거할 수 있었다.
자연치유를 큰 원칙으로 삼고 현대의학의 힘을 적절히 빌리는 투트랙으로 전이암, 재발암과 대적해온 박학근 씨! 전이암도 재발암도 모두 몰아내고 3년이 지난 2018년 10월 현재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2018년 10월 박학근 씨는…
2018년 10월 초 서울 망원동에서 만난 박학근 씨는 분주해보였다. 경찰공무원으로 살아온 26년 세월에도 종지부를 찍고 2년 전 명퇴를 했다고 했다.
지금은 암 환우들의 희망지기가 되기 위해 조그마한 쉼터를 구상 중이라고 했다. 경험보다 좋은 교훈은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간암, 전이 림프암, 재발암까지 끊임없이 이어진 암과의 대적에서 축적해온 다양한 경험들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건강은 어떨까? 이 물음에 박학근 씨는 “지난 6월 정기체크를 했는데 다 좋게 나왔다.”며 “현재 종양수치인 AFP는 2.5인데 정상수치가 20임을 감안하면 지극히 양호한 상태”라고 말한다.
그 비결을 묻는 질문에 박학근 씨는 “지금도 여전히 뉴스타트 생활을 실천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1.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도를 하고 30분간 스트레칭을 하는 생활은 변함이 없다.
2. 날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좋은 말만 하려고 하고, 기쁘고 즐겁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암 치유에 있어 마음치유가 8할이라면 음식치유는 2할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3. 음식은 균형식을 먹는 편이다. 제철 음식 위주로 먹고, 자연적인 환경에서 자란 것을 먹으려 노력한다. 무, 배추, 시금치 등 우리가 흔히 먹는 음식이 최고의 항암제라고 여긴다. 단 기름지고 가공식품은 자제한다.
4. 하루에 한두 시간은 무조건 걷는다.
5. 피곤하면 시간이 날 때마다 잔다. 피곤하다는 것은 쉬어야 한다는 신호로 여긴다.
제2의 인생 설계로 하루해가 짧다고 말하는 박학근 씨! 그런 그가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꼭 전하고 싶다는 말이 있다. 암을 이기려면 암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알면 이길 방법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결코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설사 내일 죽는다 해도 오늘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내일 얼마든지 새로운 길이 열릴 수도 있다는게 그의 지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