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양미경 기자】
“마지막 소풍길이라고 생각하며 오르내린 산자락에서 삶을 보았습니다”
목사의 아내인 오애자 씨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남편이 하느님 곁으로 떠난 후, 담낭암의 시련을 품은 채 살아냈다. 그리고 이제 10년이라는 세월을 지내온 그녀는 마치 소풍갔다온 사람처럼 그 시절을 회상한다. 투병은 언제나 아프고 힘들기만 해서 내 곁에는 내려앉지 않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혹시 그 시련이 당신에게 찾아오더라도 “웃으며 삶을 향해 달려가라”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암은 부지불식간에 한 사람에게 어서 떠날 채비를 하라고 이야기한다. 10년 전인 97년, 오애자(66세) 씨를 찾은 담낭암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 그때처럼 자장면만 먹으면 기분이 들뜨던 그녀는 딸과 함께 오랜만에 찾은 중국집에서 젓가락질도 몇 번 하지 못한 채 급체로 병원에 실려 갔다.
“동네 병원에 갔는데 이상하게 저를 큰 병원으로 이송시키더라구요. 병원에 가서도 응급실에 눕혀놓은 채 의사선생님들이 몇 번 왔다 갔다 하다 저희들끼리 수군수군거리는 거예요. 30분 정도가 지나자 의사선생님 한 분이 다가와서 여자가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냐고 그러잖아요? 저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호통을 치면서 간수치가 10,000이 넘었는데 거짓말 할거냐고 야단을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목사의 아내입니다”라고 말했더니 이상한 표정을 지으셨어요.”
30cm의 수술자국과 팔의 신경 손상
그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녀는 오랜만에 먹은 자장면 때문에 급체를 해서 병원에 실려 갔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 속에는 이미 담낭에서 간으로, 그리고 가슴까지 암세포가 전이된 상태였다. 자녀들은 아무도 그녀에게 암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고 그녀 역시 큰 병도 아니라면서 자꾸 수술을 해야 한다는 자식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간에 작은 불순물이 생겨서 제거하는 편이 엄마 건강에 좋다고 자식들이 애원하는데 계속 싫다고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어요. 그래서 수술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다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어요. 그런데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을 내려주시지 않는 거예요.”
예약해 놓은 수술날짜는 다가왔고 오애자 씨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술과 이해할 수 없는 육체의 아픔 때문에 점점 지쳐갔다. 그렇게 지친 넋으로 잠깐 잠이 들었을 때 하느님 품으로 떠난 남편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나타났다.
“빵이 그득히 담겨있는 그릇이 놓여 있었고 남편이 저를 바라보며 서있었어요. 너무도 반가워서 남편에게 한 발짝 다가서는데 빵 그릇에서 구더기가 득실득실 대는 게 보였어요. 벌레를 너무 싫어했던 터라 남편에게 너무 징그럽다고 말하니까 아무 걱정 말라고 내가 다 치워주겠다고 하면서 저를 안아주었어요.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병실이었어요.”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이 자신에게 나타난 것은 수술을 하라는 뜻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는 30cm도 넘는 수술의 흉터자국이 생겼다. 쓸개에서 인파까지 20군데가 넘는 곳에 헤집어 놓은 수술은 그녀의 팔 신경을 건드렸고 그녀는 그 후 오른 팔로는 종이도 들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외과 수술이 끝나고 내과로 옮기면서 의사선생님께서 이미 몸이 너무 축난 상태라서 항암치료를 해도 가능성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때서야 제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암이라는 사실을 숨겨준 자식들이 고마웠다. 만약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너무 두려워서 정신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며 결국 그녀를 퇴원시켰고, 자식들에게는 황달과 복수에 물이 차는 증세가 있을 것이며 장례식 준비를 미리 해두는 편이 좋겠다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쑥떡과 생즙을 도시락 삼아 오른 산자락
오애자 씨는 2달 반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 부었는 데도 소화제 한 알 안 주고 자신을 내보내는 병원을 나오면서 식이요법을 결심했다.”올케가 독일에서 간호사 생활을 했는데 이미 그곳에서는 30년 전부터 암환자들에게 식이요법을 병행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처음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좋다는 음식을 먹으며 시행착오를 겪었지요.”
그녀가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효과를 보기 시작한 것은 신선초, 케일, 돗나물, 돌미나리, 쑥, 비트를 갈아서 만든 생즙이었다. 하루에 900cc를 목표로 했지만 안 그래도 식욕이 없는 터라 쓰디쓴 생즙은 고역이었다. 그래도 차를 마시듯이 조금씩 지속적으로 마시자 배변활동이 좋아졌고 소화가 잘되는 느낌이 들었다. 병원에서 예고한 대로 그녀의 배는 점점 불러와 복수가 차기 시작했고 그녀는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이끌고 등산을 결심했다.
“아침 10시 반쯤에 관악산에 올라서 1시 30분쯤 내려오는 생활을 했어요. 산에 올라갈 때는 현미, 팥, 쑥을 갈아서 만든 떡과 생즙을 도시락으로 챙겨갔죠. 힘이 닿는 대로 타박타박 산자락을 내 발로 밟고 있으면 마음만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어요. 정오가 지나고 따뜻한 햇살이 비칠 때면 양지에 걸터앉아 책을 읽었죠. 내 몸은 암으로 만신창이가 됐지만 그때만큼은 영혼이 따뜻해지곤 했어요.”
그 시절 부풀어 오른 배를 안고 등산을 할 때 느꼈을 고통 같은 건 그녀의 따스한 눈빛 때문에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웃음이 많았다. 암환자는 억지로라도 웃어야 한다는 지론을 펼치는 그녀는 울고 싶을 때도 웃었고, 숨이 끊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도 비명 대신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을 보내자 그녀의 고통은 차츰차츰 잦아들었다.
암…숨기지 마세요!
그 후 6개월마다 혈액 검사를 하고 1년에 한 번씩 병원에서 검진을 받으며 암세포가 더 이상 증식을 하지 않는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후 오애자 씨는 처음에 자신이 느꼈던 그 두려움의 터널에 첫발을 내딛은 암환자들을 찾아 상담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암환자들은 먹는 것, 운동하는 것, 정신 수양 그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돼요. 하지만 고통 때문에 혼자서 그 길을 가기는 것이 너무 힘들 때가 많죠. 그래서 저는 그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무엇보다 암환자들은 병을 숨기기보다는 드러내야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셨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몸을 추스르기 시작하면서 9년여의 시간동안 암에 대해 공부하고 꾸준히 식이요법을 실행한 오애자 씨는 고통의 터널을 고독하게 걸어가고 있을 암환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암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이에요. 물론 저도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지만 결국 암도 제 몸에 생긴 일이기 때문에 자신을 잘 다스려야 암을 극복하는 길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오애자 씨는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오는 암환자들의 전화를 받으며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제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제가 겪었던 고통을 함께 나누고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보다 보람된 일이 어디 있겠어요!”
《☞오애자 씨의 투병 생활에 도움을 주었던 수칙들》
– 감잎차와 녹차를 수시로 마셔라. 쓰고 떫은 음식은 암세포의 전이를 막는 데 도움이 된다.
– 붉은 살 고기는 피하라. 동물성 철분은 피하되 식물성 철분은 섭취해도 좋다.
– 몸을 항상 따뜻하게 유지하라. 부추, 양파, 달래 등 몸을 따뜻하게 하는 음식을 섭취하거나 손바닥, 등에 뜸을 뜨는 방법도 좋다.
– 하루에 한 시간씩은 무조건 걸어라.
– 복수로 고생할 때는 염분을 피하고 질경이, 민들레의 즙이나 팥, 호박 삶은 물을 섭취하고 온욕을 하면서 크게 웃어라.
– 황달로 고생할 때는 오이 꼭지 5, 6개를 볶아 가루내서 먹으면 효과를 볼 수 있다.
– 계절과일과 해초류를 즐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