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이은혜 기자】
“신이 감동한 여자로 불린답니다”
누가 봐도 ‘가망 없음’이었다. 병원에서도 그랬고 가족들도 슬픔 속에서 마지막 준비를 했다. 그런데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 않았던 사람이 10년이 지나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팔팔하게 생존의 의미를 실현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사는 오애자 씨(70세).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다시 살아온 사람, 담당의사까지도 ‘신이 감동한 여자’라며 혀를 내둘렀던 사람. 그런 그녀가 담낭암 말기에서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
자장면 한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하고…
1997년 9월5일, 그날 하루의 기억은 오애자 씨 인생에서 결코 지울 수 없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70년을 통틀어도 그렇다. 일찍이 목사와 결혼하여 즐겁게 목회활동을 하며 무난한 삶을 살아온 그녀였다.
그런데 누가 시샘이라도 한 걸까? 그날 점심으로 딸과 함께 자장면을 시켜 먹었다. 딸은 빨리 먹고 막 외출을 했고, 천천히 먹고 있던 오애자 씨는 일순 멈칫했다. 자장면을 1/3도 채 못 먹었는데 갑자기 배가 뒤틀리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칼로 난도질을 당하는 듯, 새우등처럼 꼬이면서 아팠다. 죽는구나 싶었다. 소파에서 마루로 꼬꾸라지면서 나오지 않는 말 대신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딸애를 다시 보내주세요.’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외출했던 딸이 뭘 두고 갔다며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 후의 일은 마치 꿈결 같다. 딸애의 비명소리,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오애자 씨가 눈을 떴을 때는 병원 응급실이었다. 그런데 가족들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찾아볼 요량으로 일어나려는데 주위에 있던 의사가 다가와 “아줌마 술은 왜 이리 많이 드셨어요?”하는 게 아닌가?
입에도 대지 않는 술을 많이 먹었다니…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자 의사는 “혈압이 580이고 간수치가 1450인데 그래도 술을 안 마셨다고요?” 영 믿기지 않는다는 투였다.? 그래도 “저는 술을 못 마십니다. 목사의 아내입니다.” 했더니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
“나중에서야 들은 이야기지만 그 당시 담당의사는 담낭암 말기 같다면서 오늘밤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니 당장 더 큰 병원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더군요.”
그날 밤 오애자 씨는 영문도 모른 채 또 다른 병원으로 옮겨졌다. 왜 병원을 옮기느냐고 묻는 그녀에게 자식들은 “엄마 담낭에 염증이 있어서 놔두면 아프대. 수술을 해야 된대. 그래서 병원을 옮기는 거야.”라고 했다. 그런 자식들에게 그녀가 한 말은 “기도하면 되지. 수술은 왜 해.”였다.
그녀의 이런 생각은 입원 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날마다 이어지는 각종 검사들. 오애자 씨? 말에 의하면 15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하얀 영양제만 맞으면서 매일 검사만 하는 나날이었다고 한다. CT를 찍고 MRI를 찍고 위내시경도 했다. 그러다보니 몸은 앙상하게 말라갔고, 얼굴은 누렇게 뜨면서 눈뜨고 못 볼 지경이 됐다. 그런데도 수술은 안 하겠다고 버티는 엄마를 아들은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입원실 창문 너머로 먼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있던 아들의 뒷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런 아들이 ‘엄마 수술 한 번 해보자.’ 하는데 어찌 안 할 수가 있었겠어요.”
오애자 씨는 결국 1997년 10월20일 수술대 위에 올랐고, 11시간 30분 동안 힘들고 어려운 수술이 진행됐다.
수술로 끝이 아니었다!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에게도, 노심초사한 가족들에게도 11시간 30분간의 긴 수술은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수술이 끝났을 때 기진맥진한 의사는 가족들에게 느타리버섯 같이 피어 있는 암 덩어리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담낭에 7.4cm 크기의 암이 있었고 간으로도 전이돼 간에도 4.3cm, 4.5cm, 4.6cm, 4.8cm 크기의 암이 4개나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간과 담낭, 인대 20조각을 떼어내는 수술을 했다는 것이 의사의 말이었다.
그런 때문이었을까? 오애자 씨가 수술실 문밖을 나섰을 때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온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기구들을 보고 가족들은 경악했다. 코에도 목에도, 팔에도, 배에도 각종 기구가 매달려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수술 후에도 밥 한 숟가락, 죽 한 모금을 넘길 수 없었다. 오로지 영양제 주사만 맞아야 했다. 목에 낀 기구 때문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참으로 알 수 없었다. 담낭에 염증이 있어서 수술한다더니 그 수술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 알았으면 안 했을 텐데…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시간은 흘러 10일이 지나고 15일이 지나고, 그러면서 기구들도 하나둘씩 떼어내게 되고…결국 수술한 지 한 달이 넘어서야 퇴원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퇴원 직전 이상한 말을 얼핏 들었다.
“퇴원을 하려는데 처음 보는 인턴이 ‘내일부터 항암제를 15번 맞아야 하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하더군요. 제가 펄쩍 뛰면서 암도 아닌데 왜 항암제냐고 따져 물었더니 당황해서 얼버무려 그대로 퇴원을 했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당시 항암제를 안 맞는다면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으니 퇴원하라고 했나 봐요.”
오애자 씨는 그 당시 항암제 치료를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수술을 집도했던 담당의사 선생님께서 가족들에게 ‘내과로 넘어가면 항암제를 맞으라고 할 건데 항암제는 맞지 말라.’고 했나 봐요. 항암제를 맞으면 죽 한 그릇도 못 먹고 죽을 수 있으니 삶의 질이라도 높이려면 항암제를 맞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대요.” 이런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오애자 씨는 한껏 들떠 병원문을 나섰다. ?
비로소 알게 된 병명, 절망은 안했다
퇴원은 했지만 수술 후유증은 여전히 오애자 씨를 괴롭혔다. 수술할 때 오른쪽 어깨에 낀 기구가 신경을 건드려 오른쪽 팔로는 종이 한 장도 들어 올릴 수 없는 처지였고, 걸음도 제대로 못 걸어 지팡이를 짚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고, 이때 간호사 출신인 올케는 큰 의지가 됐다.
그런 올케가 적극적으로 권한 것이 있었다. 독일에서는 식이요법을 해서 병이 낫는 사례가 많다면서 식이요법을 한 번 해보자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수소문해서 한 연구소를 찾아냈다. 식이요법도 지도해주고 정보도 교환하는 그런 곳이었다.
이때부터 오애자 씨의 생활은 많이 달라졌다. 식이요법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녀가 온 정성을 다해 실천한 식이요법은 다음과 같다.
● 신선초, 케일, 돌나물, 돌미나리, 토마토, 씀바귀 등으로 즙을 짜서 아침, 점심, 저녁 식전에 각각 300cc씩 마셨다.
● 생즙을 마신 지 한 시간 후에는 현미 + 율무+팥+강낭콩을 갈아서 죽으로 끓여 먹었다.
● 반찬은 나물종류를 주로 먹었다. 열매, 뿌리, 잎 종류를 골고루 배합해서 많이 먹었다. 단오날 전에 땅에서 나는 모든 뿌리는 보약 중의 보약임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민들레, 씀바귀, 냉이, 쑥 등은 다양하게 요리해서 즐겨 먹었다.
● 붉은살 고기와 생선까지도 금했다. 돼지고기, 쇠고기, 오리, 개고기 등 붉은살은 철분이 많아서 암의 먹이가 된다는 건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붉은살 생선인 연어, 고등어, 참치 대신 흰살 생선인 명태, 갈치, 도다리 등만 먹었다.
● 김도 반짝이는 김은 안 먹었다. 반질반질한 김은 염산 처리를 해서 그렇다는 말을 듣고 파래김만 먹었다.
● 질 좋은 단백질 보충을 위해 효모를, 소화를 돕기 위해 매실엑기스 등도 즐겨 먹었다.
이런 생활 때문이었을까? 한 20일 정도 지나자 수술 후유증도 하나둘씩 없어지기 시작했고 더 이상 올케의 간호를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너무 미안하기도 해서 이젠 괜찮다고 했더니 올케가 울면서 말하더군요. ‘형님,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형님은 말기 담낭암인데 수술을 했지만 몇 개월 안 남았을 수도 있대요.’ 하더군요.”
그제서야 비로소 알게 된 병명, 암이었다. 말기 담낭암이었다. 그녀는 암 환자였고, 암 수술을 했던 거였다. 비로소 모든 의문점들이 실타래처럼 풀렸다. 담낭 염증 수술이 그렇게 오래 걸린 이유도, 온몸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야 했던 기구들도, 항암제 치료를 해야 한다던 인턴의 말도 비로소 이해가 됐던 것이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무 생각도 안 났다. 한참을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 그녀를 현실로 다시 불러들인 건 신앙의 힘이었다. 어느새 그녀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 저를 암으로 죽이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저에게 건강을 주시어 하나님의 살아계신 표적을 보여주십시오.”
그래서 시작했다.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식이요법을 실천하고, 운동을 하고, 면역공부도 하고, 건강강의도 들으면서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피눈물 나는 노력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기적은 일어났다.
15년째 재발 없는 소견서의 주인공
마스크 쓰고 지팡이 짚고 모자 내려쓰고 관악산 줄기를 올랐다는 오애자 씨. 오늘 20m 걸었으면 내일은 30m, 나날이 강도를 높여서 하루도 빠짐없이 운동을 했다.
식단은 면역력을 높여서 암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되는 식품 위주로 일주일 치 식단을 짜서 그대로 실천했다. 햇볕 좋은 낮에는 아파트 베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햇볕이 등뒤에서 비치게 해서 온몸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마음은 항상 기쁨이 넘치게 다스렸다. 미워하는 마음이 들면 “용서합니다, 사랑합니다.”를 되뇌이며 미움을 지웠고, 그러면 거짓말처럼 기쁨이 넘쳤다.
그래도 종종 죽음에 대한 준비는 했다. “하루는 그릇도 꺼내 깨끗이 닦아놓고, 또 하루는 이불도 정리해놓고…그러나 그 다음날 아침 햇살이 비치면 ‘오늘도 살았구나.’ 기도하면서 하루하루를 맞이했어요.”
그렇게 4개월 정도가 지났을 때 다시금 찾은 병원. 혈액검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를 본 간호사도, 담당의사도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살아 있는 것이 영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혈액검사 결과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검사 결과 암세포는 발견되지 않았고, 항체가 4000개만 있어도 되는데 8000개가 넘게 있다면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의사가 한 말은 “신이 감동한 여자.”였다.
이 같은 검사결과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6개월에 한 번씩 혈액검사를 하고 2년에 한 번씩 CT를 찍지만 검사할 때마다 오애자 씨 몸에 암세포는 없다.
“물론 암은 완치가 없다는 걸 잘 알아요. 10년 후, 혹은 20년 후 다시 나타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걱정하지 않아요. 수술하면 한 달 살고, 그냥 두면 며칠 만에 죽을 수도 있다던 제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건강하게 살고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실천해온 방법대로만 하면 영원히 “암 재발 소견이 없으며 정기적인 검사상 전이 및 특이소견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완치된 것으로 사료된다.”는 소견서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런 그녀가 절망에 빠져 있을 수많은 암환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다. ‘낙심 금물’이다. 암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죽는다는 생각은 꿈에서조차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세포가 알아듣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담대함을 가지라고 신신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