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에리히 프롬】
의미보다는 방법과 길을 묻는 일에 몰두해야
우리는 길을 잃었는데도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계속 자동차를 몰고 가는 사람과 같다. 방향을 바르게 잡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멈추어 서서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는 대신 자동차를 더 빨리 몰려고 한다. 우리는 점점 속력을 내지만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이렇게 방향을 잃은 운전은 인간의 자기 파괴를 의미한다. 우리는 한층 더 파괴적인 무기를 고안해 내고 있고, 자신을 소멸시키는 길에 접어들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의미보다는 방법과 길을 묻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 그곳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지 못하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낸 실재, 즉 통제할 수 있는 일을 조직하는 것과 이윤 추구에만 관심을 쏟고 그 외의 현실과는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 아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부분은 우리가 생산한 물건과 사회의 일상이다.
우리는 많은 물건을 생산하는 데에 관심을 쏟을 뿐 인간 존재의 기본적인 실재에는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또한 느낌, 실제로 느끼는 행복감, 불행한 느낌, 공포, 회의 등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들과 더 이상 연결되어 있지 않다. 동료들과는 물론 자연과의 관계를 상실한 채 그저 세계의 작은 부분들과 관계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우리는 근원적인 것과의 만남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에 시달리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말하자면 그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 자신을 힘겨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알지 못하여 고통스러워하는데, 그것은 해결할 수 없는 짐이자 과제이다. 그들은 낱말 맞추기는 풀면서도 인생이 그들에게 내놓은 수수께끼를 풀 능력은 없다.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우리의 타락이 아니라 무관심, 관심과 내적 참여의 부족, 마지못해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 무엇에 유익한 것인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편안하게 사는 삶, 자신과 미래에 대한 무관심이다.
인생에 첫 번째 촛불을 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신에 맞선 아담과 이브의 반항은 죄로 표현되지 않는다. 아담과 이브의 불복종이 인간을 파멸시켰다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인간이 자신을 자각하고 결정 능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오히려 이런 불복종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불복종의 첫 번째 행위는 자유의 길로 가는 과정에서 인간이 넘어서야 할 첫 번째 단계의 마지막인 것이다.
우리는 꽉 쥐고 있던 것을 놓아 버리면서 맨 먼저 이기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는 포기와 나눔을 시작한다는 의미이자 첫 번째 단계가 동반하는 근심을 이겨낼 준비를 갖추었다는 의미이다. 그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상실할까 걱정한다. 이런 걱정은 자존심을 지탱해 주는 목발로 쓰던 물건을 잃어버리면 한층 커진다.
선불교 신자 다이제크 T. 스즈키는 인간의 성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비유한 적이 있다.
‘칠흑처럼 어두운 공간을 상상해 보자. 한 개의 촛불이 이곳을 밝히면 상황은 변화한다. 초가 켜지기 전에는 칠흑과 같이 어두웠던 공간이 이제 환해지는 것이다. 이어 10개, 100개, 1천개, 1만 개의 초에 불을 붙이면 더욱 환해진다. 이렇게 촛불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한결 환해지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첫 번째 초에 의해 어둠이 벗겨진 바로 그때이다.’
인간의 발전은 빛이 점점 밝아지는 것과 같은 과정이다. 자신의 인생에 첫 번째 촛불을 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생의 목표는 삶에 열중하고 완전히 태어나고 깨어있는 것
인생 자체는 예술이다. 인간이 영위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예술인 동시에 가장 어렵고 가장 다양한 예술이다. 그 대상은 이런 저런 특별한 일이 아니라 삶 자체의 일상적인 일이고 인간의 잠재의식의 발전 과정이다. 인생이라는 예술에서 인간은 예술가임은 물론 그 예술의 대상이다. 인간은 석재이자 조각가이고 의사이자 환자이다.
인생의 목표는 삶에 열중하고 완전히 태어나고 완전히 깨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지전능하려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에서 벗어나 비록 제한된 힘일지라도 현실적인 힘을 인식하는 것,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긴 하지만 벌레나 풀보다 소중한 존재가 아니라는 역설을 받아들이는 것, 삶을 사랑하는 한편 두려움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삶에서 마주 하게 되는 중대한 질문들에 대한 불확실한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우리 생각과 감정을 믿는 것, 혼자 있을 수 있는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과 이 땅의 동료와 살아 있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것, 양심의 목소리를 좇고 자신에게 외치는 목소리를 따르는 것, 그런 한편 우리가 그 목소리를 좇지 않을 때 자신을 증오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은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키우는 것
삶과 행복, 성장과 자유의 긍정은 사랑의 감정에, 배려와 존중, 책임감과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생산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 또한 사랑한다. 오로지 다른 사람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
사랑은 능동적이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가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키우는 것이지 누군가에게 빠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사랑은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능동적인 특성을 이렇게 일반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 서로 떨어져 있어 보아야 한다.’
‘혼자 있는 것과 다른 사람과 헤어지는 것, 이 두 방식의 결합이 삶의 과제이다. 대중 속에 매몰되지 않는 것, 자기애에 빠지거나 이기적이어서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과제이다.’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것이 삶에 대한 대답을 주고 확신을 주며 신이 된다고 믿는다면 사랑은 우상 숭배가 된다. 이념이나 사람에 대한 우상 숭배에서 벗어난 사랑은 평온하고 날카롭지 않다. 조용하고 깊다. 그런 사랑은 순간순간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도취나 흥분에 빠지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망각하지 않도록 하고 에고를 극복하면서 자라난다.
사랑은 내면의 활동을 완전히 펼칠 수 있게 하는 공동체의 경험이자 나누기의 경험이다.
희망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을 위한 끊임없는 준비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영역에서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는 보존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한다. 그는 무엇인가에 놀랄 수 있고 익숙한 것에 순응하는 한편, 확신을 찾기보다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체험한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 모험을 실천하는 것은 확신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다.
삶에 대한 그의 입장은 기계적이지 않고 기능적이다. 그는 부분을 보지 않고 전체를 본다. 그는 요약한 것을 보지 않고 구조를 본다. 그는 사랑과 이성과 본보기로 모양을 갖추고 영향을 끼치고 싶어한다. 폭력이나 관료주의로 사물을 다루듯 인간을 지배하고 사물을 해체하기를 원치 않는다.
자기 인식의 확대, 의식의 초월, 사회적 무의식의 공간에 대한 관찰은 인간에게 모든 이를 자신 안에서 체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안겨 준다. 인간은 자신을 죄인, 성자, 아이, 어른, 정신이 건강한 자와 정신지체자로서, 과거의 인간과 미래의 인간으로서 체험하게 된다. 인간은 인류가 과거에 무엇이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 모든 것을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고 느낀다.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며 서로를 구분짓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무의식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리는 양적인 관심에서 상당히 차이가 있지만, 노력의 질에서는 같음을 더 많이 발견한다. 무의식에 대한 철저한 연구는 많은 사람을 자기 안에서, 또 다른 인간적인 본질 안에서 발견하는 길이다. 이런 발견은 이론적인 사고가 아니라 격정적인 체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거나 있을 수 없는 것을 희망하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실낱같은 희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폭력을 선호한다. 그러나 강한 희망을 가진 사람은 순간마다 새로운 인생의 신호를 하나하나 모두 인식하고 사랑하여 새롭게 태어날 준비를 한다.
희망은 역설적이다. 희망은 기다림도 아니고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비현실적인 소망도 아니다. 그것은 뛰어오를 순간이 오면 언제든 덤벼들려고 웅크리고 있는 동물과 같다.
희망은 지친 개혁주의도 사이비 급진 모험가 기질도 아니다. 그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을 위해 끊임없이 준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태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글쓴이 에리히 프롬은 20세기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흐름인 신프로이트 학파를 대표하는 정신분석 학자이자 사회심리 학자로, 전 생애를 통해 현대사회의 부조리와 병폐를 분석·비판, 대안을 제시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특히 인간 심리와 사회의 상호 작용을 깊이 탐구하고, 문화의 병폐를 고치는 데 정신분석학의 원리를 적용했는데, 이 글은 그의 여러 글 중 삶에 관한 글들을 모아 엮은 신간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씽크북 刊, 359-8628) 중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