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허미숙 기자】
“암 환자들 사진 찍으면서 제 고통도 사라졌어요”
2013년 6월3일 오후 7시경.
서울 아차산역 근처 라이브카페 경춘선에는 삼삼오오 짝을 이룬 사람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양복을 입은 중년 신사도 있고, 지긋한 노부부도 눈에 띄었다.
금세 작은 카페 안에는 70~8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서로 반갑게 인사도 하고 안부를 묻기도 했다. 야심한 밤에 70~80명의 사람들이 작은 카페를 찾은 이유는 뭐였을까? 그 궁금증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인물이 있다. 김완철 씨(56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본명은 김완철 씨이지만 찰리라는 예명으로 더 친숙한 사람이다.
70~80명의 사람들을 야밤에 작은 카페로 불러들인 장본인 김완철 씨. ‘찰리와 함께 하는 희망 나눔 콘서트’를 통해 봉사와 나눔을 온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그는 도대체 누굴까?
암 환자들에게 웃음을 찾아주는 사람!
사진 한 장에 행복을 담는 사람!
그래서 포토테라피스트로 불리는 사람!
사람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은 많지만 이 정도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자, 지금부터 김완철 씨, 아니 찰리의 숨겨진 이야기 속으로 따라가보자.
30대 초반에 B형 간염
1988년 대한민국은 88올림픽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김완철 씨도 그랬다.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몸이 좀 이상했다. 심하게 피곤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거뜬하게 풀리던 피로가 좀체 풀리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봤어요. 그런데 의사가 하는 말이 뜬금없었어요.” B형 간염이라고 했다. 설상가상 약도 없다고 했다. 그러니 무리하지 말라는 말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잊혀졌다. 30대 초반, 김완철 씨의 하루하루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의류, 패션, 유아용품 등을 제조, 유통하는 CEO로 늘 하루해가 짧았다. 그래서 B형 간염은… 잊고 살았다. 조금 무리하면 피곤했지만 ‘설마?’ 했다.
‘설마’는 간경화를 부르고…
이것저것 벌려놓은 사업으로 김완철 씨의 30대는 인생 황금기였다. 국내시장뿐 아니라 베트남, 스리랑카 등 동남아까지 뻗어나간 그의 사업적 수완은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 누가 시샘이라도 한 것일까? 그의 성공은 30대 중반 커다란 암초를 만나게 된다. 건강이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갔더니 간경화라고 하더군요. B형 간염이 간경화로 진행됐다고 했습니다.” 너무도 젊은 나이에 받게 된 간경화 진단. 그땐 정말 몰랐었다. 그 진단이 그의 인생을 어떻게 헝클어 놓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었다.
20년 동안 간경화와 고군분투한 삶
간경화 진단을 받고 김완철 씨가 향한 곳은 산이었다. 강원도 평창에 있는 한 요양원으로 향했다. 이 같은 그의 시도는 적중한 듯 보였다. 산은 병든 몸을 회복시켜주는 천연 치유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산에 들어간 지 두어 달 지나자 건강이 회복됐고, 다시금 세상 밖으로 나와 하던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못했다. 사업상 일에 쫓기고, 사람에 치이고 하는 날이 이어지면서 또다시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던 것이다.
“이때부터는 간경화와의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었어요. 건강이 나빠지면 산으로 들어가 요양하고, 회복되면 세상 밖으로 나와 일을 하고…그런 생활을 수차례 반복했어요.” 하지만 그 생활도 16년 만에 끝이 났다. 피를 토하고 쓰러지면서 종지부를 찍게 됐다.
담당의사는 간 수술과 간 이식을 권하고…
그것이 한계점이었을까? 2010년 김완철 씨는 누가 봐도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이었다. 피를 토하고 쓰러지면서 ‘비로소 올 게 왔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그 당시 간이 소화기능을 못하니까 비장이 대신 그 역할을 하다가 과부하가 걸렸던 모양이에요. 비장 자체가 부어버렸다고 했으니까요. 그러니 소화기능이 올스톱 되면서 식도정맥류가 생기고, 고혈압이 오고, 당뇨가 생기고, 복수가 차고, 황달에 흑달까지… 몸 구석구석 성한 데가 없었어요.”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간암수치도 급격히 올라가 있었다. 그래서 찍게 된 MRI. 결과는 참담했다. 담당의사는 말했다. “간에 동그란 원 같은 게 보이는데 종양 같다.”면서 “제거수술을 하자.”고 했다. 그런 다음 간 이식수술도 해야 한다고 했다.
두 번의 수술? 도저히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 몸 상태도 최악이었다. “그래서 결심했어요. 의사에게는 한 달만 시간을 달라고 하고 또다시 산으로 들어갔어요.”
2010년 이른 봄, 김완철 씨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한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마음의 기쁨은 몸의 치유를 부르고…
먹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몸. 먹으면 곧바로 토해버렸고, 빈혈이 심해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그런 몸으로 찾아든 요양병원에서의 생활은 하루하루 위태롭게 이어졌다. 이러다가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사람이 먹지를 못하니 어찌 살 수가 있겠어요. 그때 볶은 곡식마저 없었다면 아마도 오늘은 없었겠죠.”
다행히 식사로 나온 볶은 곡식은 목넘김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다시없는 축복이었다. 먹을 수 있게 되면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은 몸을 회복시키는 단초가 돼주었다.
“그래서 아침에 눈만 뜨면 볶은 곡식을 배낭에 넣고, 똑딱이 카메라를 챙겨서 산길을 걷기 시작했어요. 가다 쉬다, 가다 쉬다를 반복하면서 걷고 또 걸었어요.”
그런 그가 걸으면서 하는 일도 있었다. 연신 똑딱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사람. 그런 때문이었을까? 사진을 찍으면 그렇게 아픈 통증도 참을 만했다고 한다.
“흔히들 간은 침묵의 장기라고 하지만 그 당시 저는 너무나 아팠어요. 간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 통증이 심했어요. 그런 때문인지 똑바로 누워도 고통스럽고, 옆으로 누워도 고통스러웠어요. 심지어 숨쉬기도 힘들었어요.”
그런데 사진을 찍으면 그런 통증을 잊을 수 있었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본 자연의 아름다움은 경이롭기까지 했고, 그것을 사진에 담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보면 통증은 잊기 일쑤였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꽃도 찍고 새도 찍었다.
“그러자 슬그머니 한 가지 욕심이 생기대요. 저처럼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환우들의 사진도 찍어주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러나 이 같은 그의 생각은 시작부터 암초에 부딪혔다. 환우들이 사진 찍기를 극구 사양했던 것이다. 아픈 모습을, 그것도 방사선 치료,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머리는 빠지고 피부도 얼룩얼룩 보기 싫은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싫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 마음은 접었다. 대신 산, 나무, 곤충, 야생화를 찍고 또 찍으면서 통증을 잊었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그런 생활을 한 지 4~5개월 지났을 때 그의 몸은 많이 변해 있었다. 10m도 걷기 힘들어 가다 쉬다를 반복했던 몸이 2.5km를 걸어도 끄떡없는 몸으로 변해 있었다. 살맛이 났다. ‘어쩌면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도 생겼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날아든 제안 하나! 그것은 김완철 씨의 인생 2막을 여는 전주곡이 되었다.
암 환자 사진 찍는 포토테라피스트로~
살기 위해, 심한 통증을 잊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산길을 걸었고, 카메라 셔터도 눌렀다는 김완철 씨. 그런 생활을 한 지 4~5개월 지났을 때 그는 두 가지 큰 선물을 받았다고 말한다.
“하나는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동안 찍은 사진이라는 보물이었어요. 산길에서 만난 나무, 꽃, 새, 야생화를 찍은 사진이 하나둘 모이면서 수백 장이 넘었어요. 그런데 우연한 계기로 이 사진들을 동영상으로 만들고 음악과 함께 편집해 상영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 반응은 뜨거웠다. 자연의 말간 아름다움은 하루하루 생사의 기로에서 힘들어하는 환우들에게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때부터였어요. 제가 꼭 해드리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이 동영상을 본 환우들이 산책길에서 저를 만나면 먼저 포즈를 취해주면서 사진 찍기를 자청하고 나섰던 거예요.”
기뻤다. 그래서 최고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암 환우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농담도 하고 몸 개그도 했다. 그렇게 해서 찍은 사진은 예쁘게 포토샵을 거쳐 액자로 만들어졌다. 이것을 선물하면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는 김완철 씨. 그런 덕분이었을까? 얼마 되지 않아 병실의 벽면마다 하나둘 사진이 걸리기 시작했다. 환하게 웃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서 환우들도 너무나 좋아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몸도 치유됨을 느꼈다는 김완철 씨. 그래서 시작했다. ‘암환자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포토테라피스트 찰리’의 등장을 세상에 알렸다.
전국으로 다니며 사진 찍기 봉사 중~
2013년 현재, 김완철 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 그는 본명보다 찰리로 더 많이 불리는 사람이 됐다. 포토테라피스트 찰리로 인기 절정이다. 의역하면 사진 치료사쯤 될까? 이제는 활동무대도 전국 방방곡곡이다.
전국 각지를 다니며 여전히 암환자들이 환하게 웃는 일명 ‘행복사진’ 찍기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동안 찍은 사진도 수백 장에 이른다. 사진 한 장 한 장에는 가슴 시린 사연도 많지만 사진 속 표정은 언제나 환하게 웃는 모습들이다. 병마의 고통과 공포와 두려움을 모두 내려놓고, 행복한 표정,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다.
“사진을 보면 다들 말해요. 어쩌면 암환자들의 얼굴이 이렇게 밝고 환할 수 있냐고. 이상하게도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환자들의 얼굴은 점점 밝게 변해간다는 걸 느껴요. 그것은 투병에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줄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그래서 열일 제쳐두고 사진 찍기에 매달렸다는 김완철 씨. 이 일은 신이 그에게 내린 소명쯤으로 여긴다. “솔직히 20여 년 동안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면서도 이렇게 살아있는 것은 분명 이 땅에서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신이 생명을 연장시켜 준 것이라는 생각이 늘 들어요.”
그것이 바로 행복사진 찍기 봉사라고 김완철 씨는 믿고 있다. 이렇게 찍은 사진은 사진 전시회를 통해 대중들에게도 공개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절망의 순간에 피는 희망이 환하게 웃는 행복사진에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하루하루 병마와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암환우들을 찾아가 행복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김완철 씨. 지금 그의 몸 상태는 어떨까? 간경화는?
“지난해에 병원에 가서 MRI를 찍어봤는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간에 있던 동그란 원은 없어져서 보이지 않았고, 간수치는 40 미만으로 떨어져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으니까요. 간경화도 더 이상 확산되지 않은 정지 상태라고 하더군요.”
간이 제 기능을 잘 못해서 생긴 고혈압은 정상 혈압으로 돌아왔고, 다만 당뇨만 증상이 조금 남아있는 상태라고 한다.
피를 토하던 2010년 당시와 비교하면 오늘 이렇게 살아있음이 기적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는 김완철 씨.
그런 탓에 그의 삶 전부는 지금 봉사와 나눔에 맞춰져 있다. 암환자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사진도 찍고 음악회도 연다. 매월 여는 ‘찰리와 함께 하는 희망 나눔 콘서트’도 그 때문이다. 암 환우와 암 환우 가족들, 그의 뜻에 동참하는 지인 등 70~80여 명이 모여 함께 노래도 부르고 시 낭송도 들으면서 1시간 30분 동안 봉사 기금 마련을 위한 콘서트를 진행한다.
종종 지나치게 과로해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듣기도 하지만 봉사하는 삶을 살지 않는 김완철 씨는 존재 가치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그의 생각은 이 세상을 밝히는 찬란한 빛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