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허미숙 기자】
하루 종일 미용실에서 사람들의 머리를 자르고 퍼머넌트를 하고….?미용실을 운영하며 헤어 디자이너로서의 삶은 적성에도 맞았고, 재미도 있었다. 수입도 쏠쏠했다.
그런데 지나친 욕심을 부린 것이 화근이 됐을까? IMF 외환위기의 파고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주식투자를 하면서 큰 손해를 봤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녀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였다. ‘어떻게 하면 금전적인 손실을 만회할 수 있을까?’ 그래서 죽을 둥 살 둥 일만 했다고 한다. 아침에 눈 떠서 잠자리에 들기까지 손에서 가위를 놓지 않았다. 안 쓰고, 안 먹고, 하루 종일 일만 하고…. 그런 생활을 10년 정도 했을까? 웬 만큼의 손실은 거의 다 만회가 됐다. 그런데 이상했다. 몸이 이상했다. 6개월 동안 감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약을 먹어도 주사를 맞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손을 다쳐 수술도 하고 갈비뼈가 부러져 꼼짝도 못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병원문턱을 넘나들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랫배가 당겼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배를 만져보다가 깜짝 놀랐다. 계란만 한 혹이 만져졌던 것이다. 그 후의 일은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가 처진다는 박명덕 씨(55세).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07년 8월의 악몽
맹장 부분에서 만져지는 계란만 한 혹! 불안했다. 부랴부랴 산부인과를 찾았다. 그런데 검사를 마친 담당의사는 느긋했다. “자궁도 깨끗하고 난소도 깨끗하다.”는 거였다.
혹이 만져지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니! 좀체 납득을 못하자 큰 병원 외과로 가보라고 했다. 그래서 대형병원에 가서 초음파를 찍어봤다는 박명덕 씨.
“검사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았어요. 담당의사의 말에 의하면 자궁육종일 수도 있고, 그저 단순한 혹일 수도 있는데 확실한 것은 수술을 해봐야 알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4개월 후에 수술을 하자고 하더군요.”
수술 일정이 꽉 차 있어서 그때쯤이나 수술이 가능하다는 거였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박명덕 씨는 자궁육종도 자궁근종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자꾸만 혹이 커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수술은 4개월 후에야 할 수 있다는데 혹이 자꾸 커지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군요. 이곳저곳 알아보다가 누가 추천을 해줘 시립병원에 가게 됐어요.”
또다시 각종 검사가 이어졌다. 자궁과 복부의 CT도 찍었고, 복부 혹에서 조직을 떼어내 조직검사도 했다. 다행히 그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데스모이드 같다는 거였다.
“데스모이드는 양성혹 같은 거라고 했어요. 잘라내면 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다음날 바로 수술을 했죠.”
그런데 이상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퇴원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혹시 집안에 자궁암에 걸린 사람이 있느냐? 그동안 생리는 잘 나왔느냐?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며칠 후 밝혀졌다. 담당의사는 말했다. “수술 때 잘라낸 양성혹의 조직검사를 두고 병원 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는 거였다. “병리과 의료진의 절반은 암으로, 또 절반으로 양성혹으로 의견이 갈리면서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면서 “대형병원 2곳에 조직검사를 의뢰해놓은 상태”라는 거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대요. 수술하기 전에는 별거 아니라더니 느닷없이 암인지도 모른다니…세상에 이럴 수도 있나 싶었어요.”
너무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박명덕 씨가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었다. 제발 별일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한 달 뒤 나온 검사 결과는 그녀의 바람과는 너무도 달랐다.
“조직검사 결과 자궁내막육종으로 나왔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게 뭐예요?’ 하고 물었더니 자궁암의 일종인데 아직 치료법이 없다고 했어요.”
자궁에 아무 이상 없다더니… 양성혹이라더니…치료법이 없는 암이라고? ?2007년 8월 박명덕 씨는 숨막히는 더위에서 오싹한 한기를 느껴야 했다.
자궁, 난소, 림프 38개를 잘라내다!
너무도 생소한 자궁내막육종 진단을 받은 박명덕 씨는 곧 알았다. 일반암은 딱딱한 반면 육종암은 지방덩어리처럼 보여 의사들도 잘 모르고, 설상가상 예후도 나쁘며, 전문의사도 별로 없다는 걸.
이런 사실을 하나둘 알게 되면서 그녀는 절망했다. 한 차례 수술까지 한 몸이어서 더욱더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치료할 수 있는 대형병원을 수소문해서 찾아갔어요. 또다시 검사를 하더니 3일 후 수술하자고 하더군요.”
복부에 있는 종양은 제거가 됐지만 자궁에서 전이된 거여서 자궁을 덜어내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또 다시 수술대 위해 올라야 했던 박명덕 씨. 2007년 9월 하루 그녀는 자궁도, 난소도, 림프도 38개나 잘라내는 대수술을 해야 했다. 비록 암세포는 안 보이지만 예방 차원에서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믿으며 그녀의 몸을 내맡겼다.
만신창이가 된 몸… 새로운 삶을 선택하다
2달 사이에 큰 수술을 2번이나 받았던 박명덕 씨. 그런 때문일까? 수술 부위가 좀체 아물지 않았다. 차고 있던 피주머니는 차고 넘치기 일쑤였다.
그런데다 항호르몬제까지 투여하자 온몸은 만신창이가 돼갔다. 눈을 감아도 핑핑 돌았고, 앉으나 누우나 빙글빙글 돌았다. ?걸어서 들어간 병원이었지만 잘 걷지도 못한 채 피주머니를 차고 퇴원을 해야 했고, 그 후에도 건강은 좀체 회복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관절이 퉁퉁 부어 손발이 붙어 있기 일쑤였고, 다리도 퉁퉁 부어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눈 주위에는 곰 테두리처럼 검은 띠가 둘러져 있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설상가상 척추까지 내려앉으면서 앉아 있을 수조차 없게 됐다.
“항호르몬제 때문이라고 했어요. 연골이 마르면서 온몸 구석구석에서 경고음을 내기 시작하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시작했다.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만 했던 박명덕 씨는 이때부터 서적을 뒤적이고,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암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알았다. 암은 결코 수술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걸.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그래서 결심했다. 퉁퉁 부은 다리로 유기농 매장을 찾았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동네 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일벌레로 살아온 지난 생활을 청산하고, 일명 ‘박명덕 표 항암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그녀가 고집스럽게 실천했다는 ‘박명덕 표 항암생활’은 다음과 같다.
1. 아침마다 야산 오르기
예전에는 결코 산책 한 번 나선 적이 없었던 사람, 산에도 공원에도 갈 겨를이 없다며 멀리했던 사람, 하루 종일 일만 했던 사람. 그랬던 박명덕 씨가 퇴원 후에는 아침마다 동네 야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대모산, 아차산을 오르며 뒷다리가 당길 정도로 트레킹을 했다고 한다.
2. 유기농 매장 활용하기
먹는 것, 심지어 그릇까지도 유기농, 친환경 제품으로 바꾸었다. 어떤 것을 먹고, 어떻게 해서 먹는 것이 좋은지를 알게 되면서 식사는 거친 현미식을 시작했고, 양념까지도 유기농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3. 암 카페 가입하기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어서 그런지 위로도 되고 허심탄회하게 속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한다. 특히 산행팀에 가입하여 산행도 하고 교류도 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4. 야채수프는 하루도 빠짐없이~
박명덕 씨는 야채수프를 직접 만들어 먹으면서 큰 덕을 봤다고 믿고 있다. 권하는 사람이 많아서 먹기 시작했는데 직접 재료를 구해 유리그릇에 끓여서 먹었다고 한다. 이틀만 지나면 맛이 상해 그날그날 끓여야 했지만 기쁜 마음으로 2년 정도 정성껏 끓여 먹으면서 건강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한다.
5. 울금 달인 물 수시로 먹기
울금을 편으로 썬 뒤 물로 끓여서 수시로 먹기도 하고, 울금에 코코넛을 넣고 진하게 달여서 먹는 등 울금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울금이 여성암에 좋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였다.
6. 초밀란 만들어 먹기
달걀 10개에 유기농식초 한 병을 부어놓으면 2주 후에는 달걀껍질도 노른자 흰자도 모두 녹아버린다. 이렇게 만든 것을 체에 걸려 하루 한 잔 정도 마시는 초밀란도 박명덕 씨가 즐겨 먹은 건강식이다. 초밀란은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의 불균형이나 분비 과다를 조절하는 데 효과가 있어 여성암에 좋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박명덕 씨는 “이외에도 효소, 요로법까지 다양한 방법을 실천하며 건강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며 “그런 생활을 3년 정도 했을 때 비로소 몸이 정상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직도 항암생활은 현재 진행형~
2007년 9월 자궁내막육종 수술,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14년 7월 현재, 박명덕 씨는 서울 석촌동에 있는 미용실에서 여전히 빗과 가위가 빚어내는 환상적인 일을 하고 있다. 단골손님도 많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 예전과 많이 다른 삶을 산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아무리 큰 일이 있어도 일주일 중 하루는 오로지 자기만의 시간을 산다.
“매주 목요일을 저만의 휴무일로 만들어 혼자 산에도 가고, 모임을 갖기도 합니다. 휴식 없이 일했던 삶의 방식을 버리고 일주일에 하루는 오직 저를 위한 날로 정해서 휴식을 취합니다.”
달라진 점은 또 있다.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잊게 해주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봉사단체를 통해 음악회도 하고, 모임을 통해 어려운 처지의 환우들에게 보탬이 되기도 한다.
오늘도 봉사하는 삶, 자족하는 삶, 긍정의 삶을 사는 아이콘이 된 박명덕 씨. 비록 일 년에 한 번씩 CT를 찍고, 아직도 척추 2, 3번 함몰로 오래 앉아 있기는 힘들지만 지금 누리는 행복이 너무나 감사하다. 그래서 늘 초심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그녀에게는 꿈도 하나 있다. 암 환자들의 자립을 도와주고 싶다는 거다.
“암 환우들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매우 힘듭니다. 치료비는 감당 못할 정도로 비싸고 게다가 일까지 할 수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죠. 이런 사람들을 돕는 공동체를 만들어 그 수익금으로 암 환우들의 자립을 도와주고 싶어요.”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박명덕 씨는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