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정유경 기자】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않으면 행복해집니다!”
환자가 의사를 걱정한다? 얼핏 들으면 이상한 상황이지만 오히려 좋은 일일 수 있다.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재진 교수(강남세브란스병원 부원장)는 환자에게 안쓰러운 대상이 된다. 그것도 자주. 많은 환자가 김재진 교수에게 “항상 우울하고 괴롭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 힘드시죠?”라는 말을 건넨다. 이런 걱정은 큰 힘이 된다. 자신의 고충을 알아주어서가 아니다. 죽을 만큼 괴로운 마음으로 병원을 찾았던 환자가 의사의 마음을 헤아릴 만큼 여유를 가졌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환자의 이런 걱정은 김재진 교수에게 이제 좀 살겠다는 말로 들린다. 치료를 잘 해줘서 고맙다는 말로 들린다. 환자의 ‘걱정거리’라서 행복하다는 김재진 교수가 전하는 행복론을 소개한다.
과학과 사랑에 빠진 의사
많은 사람 앞에서 혼자 발표하기.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쉽지 않은 일이다. 카페에서 커피 주문하기. 대인공포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크나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김재진 교수는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한결 쉽게 만들어준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가상현실(VR)을 통하면 연습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을 모으지 않아도, 카페에 가지 않아도 충분히 시뮬레이션 해볼 수 있는 것이다. 김재진 교수는 가상현실이 만들어진 초기부터 가상현실 기술이 대인공포증이나 조현병 등 정신질환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을 직감하고 프로그램 개발에 몰두했다. 그 결과 사회 적응이 어려워 불안과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가상현실 치료를 이용해 도울 수 있게 되었다.
김재진 교수가 자신의 평생 소임이라고 여기는 연구 분야는 하나 더 있다. 뇌 기능 영상 연구다. 우리가 어떠한 감정을 느끼거나 생각할 때 뇌의 각 영역이 활성을 일으키는데, 이제는 뇌의 활성을 첨단 시각 영상으로 볼 수 있게 됐다.
뇌 기능 매핑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뇌 영상 연구는 정상적인 뇌 기능을 이해하고, 뇌 기능 이상과 관련된 수많은 질환의 진단 및 치료법을 찾는 중요한 분야다. 미국, 유럽에서도 이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김재진 교수는 대한뇌기능매핑학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한국 고유의 뇌 기능 데이터를 축적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이처럼 김재진 교수는 우리 마음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하는 일이라면 의학뿐 아니라 과학 분야까지 자유롭게 넘나든다. 그리고 이런 활약은 어쩌면 예정되어 있었다.
온실 안은 위험해!
의대생 시절, 김재진 교수는 종교가 있지만 우리 마음을 종교가 아닌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싶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뇌과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정신건강의학과를 선택했다. 수많은 환자를 만나 진료를 하고 뇌에 대한 연구를 거듭할수록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딱 맞는 일이라고 느낀다. 뇌 안에 감춰진 긍정적인 요소를 강화해 불행했던 환자들이 행복해질 때마다 옳은 선택이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안타까운 마음도 함께 커진다. 우울과 불안 등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도시는 거대한 온실과 같습니다. 그 속에 사는 사람의 삶은 더 편리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스트레스는 다양해지고 많아졌어요. 많은 사람이 온실의 보호 덕에 잘 자라고는 있지만 외부 스트레스에는 약합니다. 작은 일에도 쉽게 불안해지고 우울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보다 한층 다양해지고, 강해진 스트레스 앞에 한없이 나약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이러한 거대한 온실 속에서 행복해지고 싶다면 적응력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
온실 속에서 잡초처럼 사는 법
김재진 교수는 스트레스에 약한 ‘유리멘탈’이라면 다음의 5가지 방법을 실천해보기를 제안한다.
1. 취미가 멘탈갑을 만든다!
스트레스에서 잘 빠져나오는 비결은 탈출구를 찾는 것이다.
“누구나 우울, 불안은 생길 수 있습니다. 우울과 불안이 마음을 지배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빠져나와야 하는데 쉬운 방법은 취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울, 불안에 시달려 병원을 찾는 환자는 취미 생활이 없는 경우가 많다. 취미가 치료라는 생각으로 가슴 뛰는 취미를 찾아보자.
2. 꿀잠이 멘탈갑을 만든다!
우리 몸은 낮에 아무리 힘들었어도 푹 자고 나면 다시 활동할 힘이 생기고 생기가 돈다. 우리 몸속의 노폐물을 치우고 새로운 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잠이다. 마음도 잠이 필요하다. 꿈을 꾸면 감정의 쓰레기가 정리되고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불면증은 우울과 불안의 원인임과 동시에 결과다. 잠을 못 자서 우울하고 불안해지고, 우울하고 불안해서 잠을 못 잔다. 악순환이다. 불면증이 해결되지 않으면 우울과 불안도 해결할 수 없다. 우울하다면 잠부터 푹 자자.
3. 즐거운 집이 멘탈갑을 만든다!
피는 물보다 진하듯 가족이 주는 스트레스는 남이 주는 스트레스보다 더 아프다.
“진료실에서 가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듣습니다. 끊어낼 수 없는 가족은 행복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불행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누구보다 가족과 잘 지내려고 노력하자. 먼저 손을 내밀어 나빠진 관계를 회복하자. 한결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4. 지는 습관이 멘탈갑을 만든다!
갈등은 흔한 스트레스 유발자다. 사소한 갈등이 생겼을 때는 그냥 져버리자.
“치열하게는 살되,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는 마세요. 이기거나 자존심 상하지 않으려고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쏟을 필요는 없습니다. 또 살다보면 예전에는 졌지만 나중에는 이겨있는 일이 많습니다.”
늘 전투를 치르는 일상은 쉽게 지친다. 사소한 갈등을 줄여 큰 불행에 맞설 ‘맷집’을 키우자.
5. 모르는 것이 멘탈갑을 만든다!
아는 것이 힘이라지만 손가락 터치 하나로 쉽게 별의별 정보를 얻는 요즘은 모르는 것이 약일 때가 많다. 건강염려증처럼 아는 것이 워낙 많아서 없던 병이 생긴다. 남의 일에도 신경을 쓰지 말고 자신에게 집중하자. 행복은 머릿속을 가볍게 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멘탈갑이 되는 비법을 자판기처럼 술술 쏟아내는 김재진 교수의 멘탈은 어떨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답이 돌아왔다.
“저는 스트레스를 잘 안 받는 편입니다. 나쁜 일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나만의 작은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며 활력을 얻습니다.”
실제로 8년 전 김재진 교수는 죽기 전에 우리나라 100대 명산을 가봐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현재 86개의 산에 올랐다. 이제 남은 것은 14개의 산이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100대 명산을 모두 오르면 다른 목표를 세울 생각이다.
행복이 진정한 건강
흔히 몸이 아픈 데가 없어야 건강하다고 말한다. 김재진 교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아프다고 무조건 불행할까?
“아픈 몸 때문에 전전긍긍하면 행복은 멀어집니다. 이제 몸이 아닌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충분히 쉬고 인생을 즐기며 나를 찾으면서 사세요. 진정한 건강은 마음의 건강, 즉 행복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기다리거나 미루는 것이 아니다. 복잡한 마음을 단순하게 바꾸고 지나간 일은 고이 보내주자. 근심을 털어놓고 슬픔을 묻어놓고 다 함께 웃어버리자. 건강한 마음이 곧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