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김용태】
사람은 절대로 혼자서 못 산다. 더불어 어우러져 살아가고, 얽히고 설켜서 살아간다. 조직화 되어 살아간다는 말과 동일한 말이다. 더불어 얽히고 설켜 있는 집단을 우리는 사회(社會)라고 한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첫째로 사람은 무엇과 더불어 어우러져 있는가 하면 공기, 물, 햇빛, 곡식 등등의 주변환경과 어우러져 있다. 어떻게 어우러져 있는가? 씨실과 날실이 그물처럼 얼기설기 어우러져 있다.
씨실과 날실이 그물처럼 얼기설기 얽혀져 있으면 무엇이 생기는가? 하면 결이 생긴다. 그래서 이 사회는 결이 있다. 도리(道:길 도, 理: 결 리)가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왜 혼자 안 살고 더불어 어우러져 살까?
이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자체가 혼자서는 살지를 못한다. 자연에는 완전이란 것이 없다. 불완전하다. 부족(不足), 불만(不滿), 즉 불만족 상태이다. 이를 허(虛), 공(空)이라 한다. 항상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더불어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이유는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위 도움을 주고 받아야 한다.
더불어 어우러져 있는 상태를 “상호 교제하고 있다.”라고 하는데, 이것을 우리 말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만남이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으로 줄이고, ?으로 또 한 번 줄일 수 있다.
이렇게 줄여보니 ‘나’가 있고 ‘남’이 있다. 그러면 위의 ‘ㅁ’은 ‘너’이고, 아래의 ‘ㅁ’은 ‘그’로 남에는 너와 그가 있다. “나와 너, 그리고 그”가 어우러져 있다.
노자가 말한 ‘삼성만물(三成滿物)’ 즉 “3가지가 이루어져 만물을 이룬다.”는 말이 “세상에는 나, 너, 그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다.
나와 남이 서로 뜻이 통하면 그것이 디딤돌이 되고 나와 뜻이 맞지 않으면 걸림돌이 된다. 서로 뜻이 안 맞고는 일방이 없고 서로 맞추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뜻이 맞는 것은 하나도 없고 서로서로 협의를 하고 타협을 하는 것이다.
“무조건 내 뜻에다 맞춰라.”는 안 통하고 서로의 뜻을 협의하고 토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협의, 토의, 상의하는 정치를 대의(代議)정치라고 하고 대의 정치가 민주정치이다. 서로 뜻이 맞으면 디딤돌이 되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
서로 만나서 어우러져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협의하는 방법, 토의하는 방법을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한다. 그러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경영에 실패한다.
내가 누구와 협의하여 디딤돌이 되든, 걸림돌이 되든 일단 그 사람과 만났다는 것은 서로 연계(連: 이을 연, 繫:맬 계) 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연계되면 그 사이에 문이 생기는데 관(關:빗장 관)이라는 문이다.
이어져 있어서 만났고, 만났는데 그 사이에 문이 있더라. 문은 문인데 어떠한 문인가 하면 빗장이 있는 문을 가지고 이어져 있다.
저 사람하고 뜻이 맞아 나에게 유익하면 빗장을 열어주고, 해로우면 빗장을 닫아서 문을 닫는다.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살펴보아야 하는데 무엇을?
“관(關)을 관(觀)하라.” 싯다르타는 ‘관세음 보살’, 즉 “보살을 관하라.”라고 했는데 필자는 “관(關) 즉, 관계하고 있다는 것을 관하라, 관관(觀關)하라.”라고 이야기한다.
빗장을 가지고 이어져 있는데 저 사람이 나와 뜻이 맞으면 또는 맞지 않으면,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또는 없으면, 내가 도움을 받았을 때 내가 이로워서 보탬이 되면 또는 손해가 되면, 이익과 손해, 유리와 불리, 이러한 것을 따지는 것을 실용주의(實用主義)라 하고, 옛말에 실사구시(實事求是)라고 했다.
도움을 줄 수 있으면 이익이고, 도움을 줄 수 없으면 손해보는 유(有), 불리(不利)를 따지는 관계를 이권관계라고 한다.
그래서 산업사회는 모든 게 이권사회다. 그래서 이것이 유리한지, 불리한지 판단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 현대사회는 잘 살아가느냐, 못 살아가느냐가 달렸다. 내가 유리하다고 판단을 해서 마음의 문을 열어 주었는데 유리하지 못하고 손해가 왔다하면 사람에게 화병이 생기고, 나한테 뜻이 맞아서 디딤돌이 된다하면 기쁘고 즐거우며, 뜻이 안 맞아 해롭다 하면 화나고 슬프니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생기는 이치가 이와 같다.
남이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다른 말로 “밀어준다.”라고 할 수 있는데 밀어주는 이유는 믿기 때문이다. 믿지 못하면 남은 나에게 도움을 주지 않고,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의 문을 못 열어주고, 그러면 이런 남하고는 관계하지 않는 것이 세상 논리이다. “믿다.”는 신(信)이라고 한다. 믿었는데 상대가 믿음을 저버리면 불신(不信)이 되고, 불신이 배신(背信)이 되면 “밉다.”가 된다. ‘믿다→밀다→밉다’로 되어져 있다가 ‘밑’ 즉 ‘근본’이다. 사회구조가 이렇게 얽히고 설켜 짜여져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상대를 믿게 되면 어떤 근거로 믿을 것인가?
네가 하는 것이 옳으니까 믿는다(儀:옳을 의). 그럼 옳고 그르다의 기준은 뭘까?
바른 것(正)이 옳은 것(義)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정의(正義)로운 사회를 원한다.
바르다고 하는데 ‘바르다, 바르지 않다’의 기준은 무엇인가? 곧은 것이 바른 것일까? 정직이 바른 것일까?
그러나 이 세상에 곧은 것보다 삐뚤어진 것이 더 많다. 시간도 공간도 비뚤어져 있는데 어떻게 ‘곧을 직’을 바르다고 할 것인가?
무엇을 바르다고 할 것인가? 바른 것이란 소위 맞는 것이 바른 것이다. 어떻게 맞는가? 알맞은 것(適)이 바른 것이다.
무엇에? 도리에 딱 부합되어서 맞는 것, 알맞은 것, 그것이 바른 것이다.
그럼 도리가 무엇이 되는가?
우리가 처음에 이야기했던 “살아간다” 즉 갈 길(道)이 있는데 그 도리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적(適)자를 보면 適 중 을 ‘근본 적, 밑 적, 물방울 적’이고 은 ‘걸어갈 착’으로 “근본으로 걸어야 알맞다.” 라고 적(適)이란 글자를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세상에서 근본을 도리, 원리라고 하고 도리와 원리를 터득한 사람이 소위 성인, 부처, 예수, 공자, 석가이며 무릇 세상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본 받고 그쪽으로 가도록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근본을 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