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송화정 기자】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겨울로 들어서는 길목. 햇살이 꽤 따뜻한 날 환한 미소를 머금은 정윤검, 그녀를 만났다. 12년전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이제는 다른 어려운 이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펼치는 그녀의 진솔한 그간의 이야기를 담았다.
정윤검. 그녀의 첫인상은 ’참 잔잔하구나!’ 라는 것이었다. 유난히 환하지도 않지만 은은한 빛을 발한다고나 할까.
”안녕하세요.”
조금은 왜소한 듯한 그녀의 밝게 웃는 모습이 참 넉넉하고 평화로워 보인다. 지금 그녀의 모습에서는 그 어떤 병색도 느낄 수가 없다. 그저 유난히 편안하고 따사로운 모습외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갑상선질환
그 녀가 처음 갑상선에 이상을 느낀 것은 77년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하고있을 때였다. 왼쪽 목이 불룩하게 나와 부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전혀 인지를 못하고 있던 그녀. 이런 그녀에게 부어있는 목을 인식시켜준 것은 회사에서 청소를 하시던 아주머니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아가씨. 목이 많이 부어있는데…”
이 에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녀는 부산 메리놀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후 갑상선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의사는 그녀에게 단지 ’갑상선에 이상이 있다’고만 했을뿐 정확한 병명을 이야기하지 않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술이 필요하다고 해 내친 김에 부산대학병원에서 수술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수술을 예약하고 기다리는 시간은 약 한달남짓. 목이 불룩하게 부어있는 것 외에 별다른 통증이나 이상을 느낄 수 없었던 그녀는 수술을 포기하기로 했다.
어느덧 그녀는 이일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채로 결혼을 했다. 결혼후 약간의 변화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점점 몸이 피로해지며 앓아 누울 정도로 생리통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1년이 다되어도 기다리던 아이가 생기질 않았다. 병원을 다녀보았으나 별이상이 없다는 이야기뿐이었다.
한의사였던 친구 중 한명이 갑상선 때문일 것이라며 갑상선에 좋다는 약을 환으로 지어주며 하루에 20개씩 복용하라고 전해주었다. 그러나 그 약에 몸에 맞지 않았는지 환을 먹은 이후부터 혀가 오그라들어 더 힘이 들기만 했다.
결국 그녀는 원자력병원에서 진찰후 호르몬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아이를 기다리는 그녀가 안쓰러웠는지 그녀의 어머니가 10년 묵은 도라지를 약병아리와 고와 먹으라며 보내주셨다. 얼마후 그녀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갑상선 제거 수술
첫아이가 5살이 되었을 무렵 나날이 심해지는 피로에 힘들어 할 때쯤 목덜미쪽에 자그마한 뾰루지가 돋아났다. 이것이 순식간에 콩알만하게 커지며 그녀는 병원을 찾았다.
병실문을 들어서는 순간 의사선생의 첫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엇! 갑상선이잖아!”
여전히 부어있던 그녀의 목을 보며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그 곳에서 목덜미의 뾰루지를 치료후 갑상선 진찰을 한번 받아 보라며 소개해준 한양대병원을 찾았다. 바로 조직검사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단순히 갑상선에 이상이 있다는 말뿐이었다. 그러나 과거와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외부로 조직 검사를 보내 다시한번 결과를 기다리자는 말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검사결과가 동일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수술을 받아야한다는 통보를 받아들었다. 2시간 정도걸리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다. 그래서 91년 5월 23일, 28일 두차례에 걸쳐 수술을 받으며 갑상선 모두를 절제했다.
” 수술이 끝나고 나서 제가 갑상선암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어요. 아무도 암이라고 말을 해주질 않더군요. 남편에게는 말을 한 모양이던데. 그런데 그걸 말을 안해준다고 모르나요. 두차례나 수술을 해야하고, 2시간 걸린다던 수술이 5시간이상 연장되었는데요.”
암으로 인해 제거된 갑상선은 그녀에게 평생 갑상선호르몬제를 복용해야 하는 짐을 얹어 주었다. 그러나 호르몬제 복용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약을 먹어도 부족한 호르몬으로 인해 제대로 부부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으며, 삶의 의욕을 저하시켜 우울증의 위기까지도 치닫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호스피스 교육으로 적응 쉬워
” 암이란 것이 어디 수술만 받고 끝나는 건가요. 그후의 관리가 가장 중요하죠. 저는 제가 종교가 있다보니 기도를 참 많이 했어요. 항상 꼬박꼬박 새벽기도를 나갔죠. 무언가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많은 도움이 되더군요. 두려움이 엄습해 올때면 스스로 마음을 다스려 평안을 바꾸는 일을 반복했어요. 굉장히 힘든 일이었죠. 하지만 이런 일들이 제 스스로를 추스리고 강인한 정신력을 갖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게다가 원래 명랑하고 낙천적인 성격이라 정신적인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많이 이득을 보았죠.”
그녀는 수술이후 매 식사때면 흰쌀밥이 아닌 잡곡을 주식으로 바꾸었다. 쌀외에 콩이나 조, 보리 등 꼭 2개이상의 잡곡을 함께 먹도록 했다. 또한, 되도록 갖은 음식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도록 힘썼다.
또한,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자세도 잊지 않았다.
”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고 생활하다보니 마음이 참 평안해졌습니다. 호스피스 교육이 모든 증상과 고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거든요. 젊었을 적 미리 받아둔 것이 제 자신에게 이렇게 큰 도움이 될줄은 몰랐어요.”
그녀가 젊은 시절 사회봉사에 관심을 기울이며 시작할 무렵, 라디오 광고에서 호스피스 환자들에 대한 교육 모집 광고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이것이구나!’ 싶어 바로 지원을 하여 한국능력개발연구원에서 호스피스 교육을 받았었다.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었을까. 다른 이를 위해 시작한 일이 그녀에게 수백배의 도움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암에게 삶의 기쁨을 빼앗기자 마라
”암은 두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두려운 것이예요. 그런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보다는 스스로 즐겁게 임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녀는 현재 3년동안 몸담았던 광진구청 자원봉사센터 상담실을 떠나 지금은 암환자를 위한 자원봉사를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다.
”저는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할 때 가장 큰 기쁨을 느낍니다. 때론 피로에 지쳐 힘들 때도 있지만 막상 봉사활동을 위한 장소에 가면 그렇게 힘이 날수가 없어요.”
그녀의 얼굴에 끊임없이 그려지는 환한 미소를 조금은 이해할 것만같다.
”제가 가지고 있는 지금의 이 여유와 평화를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지금껏 저를 있게한 분들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구요.”
’나누는 삶을 살자!’라는 그녀의 인생관이 빛을 발하는 듯하다.
이러한 그녀의 나누는 삶에 대한 보답으로 재작년과 작년, 2년에 걸쳐 시장으로부터 서울자원봉사상과 서울시민상 화합부분 표창장을 받아들었다.
” 항상 제 가족들에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투병생활 중에도 제게 조금의 걱정스런 빛도 보이지 않은채로 언제나 평상시와 같은 모습으로 저를 대해 주었으니까요. 제가 평상시와 같은 마음을 항상 유지하길 바라는 가족들의 바램이었지요. 이것이 지금의 제가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보살피며 살수있도록 단단히 버티게 하는 힘이고, 원동력입니다.”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다. 그녀의 가녀린 모습이 대지처럼 한없이 넓을 것만 같던이유를.
그녀는 암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스스로가 걸어온 길이기에 더욱 자신있게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암환자들이여! 용기를 잃지마라! 삶의 기쁨을 빼앗기지 마라!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