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양미경 기자】
“이제는 제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어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운명의 흐름은 남, 녀, 노, 소를 구분하지 않는다. 숙주가 처음 골육종을 앓을 때는 아직 자신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 지를 구체적으로 꿈꿔보기도 전이었다. 운명의 거대한 힘은 아직 자각조차 해보지 못했을 때였다. 숙주가 겪어내고 있는 좀 특별한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자.
여느 아이들과 같았다. 수업이 끝나면 PC방에 가서 친구들과 오락을 하거나 학원으로 직행하는 생활.
때론 선생님과 부모님에 대한 불만이 있었고, 친구들과 다툼이 있었지만 그건 사소한 문제들이었고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뜰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더위가 찾아왔고, 여름방학을 맞이하였고, 학교 후배가 백혈병에 걸려 모금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땐 그것이 연예인 누구누구가 사귄다는 뉴스보다 더욱 먼 나라 이야기 같았다. 방학이 되니 학원이 학교로 대체되었고 그래도 친구들과 PC방 가는 시간이 조금 늘어난 것이 즐거웠다.
나만이 아닌 고통
숙주가 처음 자신이 골육종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이미 병이 진행될 대로 진행되고 나서야 골육종이란 뼈에 생기는 암이란 것을 알았다고 숙주는 이야기한다.
“친구들과 PC방에 몰려가면서 백혈병에 걸렸다는 후배 이야기를 전해들었던 것. 그것이 그제서야 마음에 사무쳤어요.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막상 내게 닥치고 나니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나만의 고통은 아니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철같은 의지로 세상을 살아내는 사람들도 어느 날 갑자기 달려갈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찾아오면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절규를 하게 된다. 그러나 어쩌면 아직 세상을 알지 못했던 숙주에게는 고통 역시 미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 속에서 나온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숙주와는 달랐다.
“의학적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검사 결과 골육종이라고 하는데, 실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얼마나 무서운 가를 그때 처음 깨달았습니다.” 라고 숙주의 어머니 김수연 씨는 이야기한다.
그 절박했던 순간의 기억들
골육종의 20%에 달하는 환자들은 다른 부위로 암이 전이가 되는데 폐가 가장 흔한 부위이다. 숙주는 이 20%에 속하는 환자였다. 워낙 무딘 성격 탓에 아파도 아픈가 보다만 했고, 그 정도가 점점 심해져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으려던 시점에서 폐로의 전이가 이루어졌던 급박함.
그러나 숙주 어머니가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그리 넉넉지 않은 집안 환경에 혹 숙주의 치료비가 모자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었다고 털어놓는다.
“감정의 슬픔보다 더 혹독한 것은 현실의 벽이었습니다. 가슴을 치며 숙주 수술비와 치료비를 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했지만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 제게 정말 도움이 되셨던 분은 숙주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인 안춘희 선생님이셨습니다. 조선시대 여인 같은 성격과 외모를 지닌 안 선생님은 힘든 사람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도와주시던 분이었습니다.”
숙주 중학교 2학년 때의 담임을 맡았던 안춘희 선생님은 1년 내내 후원금 모금 운동을 벌여 주시던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독한 병마 때문에 숙주가 학교를 그만둔 지도 3년이 되었지만 학교를 따뜻하고 예쁜 추억 속에 담아 놓을 수 있었던 건 안춘희 선생님과 친구들 때문이라고 한다.
숙주 어머니가 현실적인 문제와 싸우고 있을 때 숙주는 어쩌면 절단해야 할 지도 모르는 자신의 오른 팔을 바라보며 절망과 맞서고 있었다.
“점점 무기력해지는 팔을 바라보면 미래를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힘들었지만 병으로 생기는 신체적 고통보다 더 아팠던 것은 엄마의 눈물이었습니다. 엄마의 인생 속에는 저도 포함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엄마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게 가장 힘이 들었어요.”
자신의 수술비와 치료비를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하는 엄마 앞에서 마냥 어려져만 가는 자신을 견디기 힘들었다는 숙주는 제 나이 18살보다 어린 모습을 한 철든 청년이었다.
환자 가족들의 판단력이 중요
“다행히도 주위에 좋은 분들을 너무나 많이 만났습니다. 늘 각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질적으로 좀더 풍족했으면 하고 바란 적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어려운 순간에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과 도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수술로 흉터가 남은 오른쪽 팔을 거리낌없이 보여주는 숙주는 이젠 패스트푸드를 가끔은 먹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밝힐 만큼 상태가 호전되었다.
”암과 같은 무서운 병에 걸렸을 때는 무엇보다 환자 보호자들의 판단력이 중요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너무나 냉정한 의사들 때문에 힘든 적도 많았습니다. 암담한 심정에서 곁을 주지 않는 의사들의 모습에 과연 내가 저들을 전적으로 믿어도 될까하는 의문마저 든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암과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해 스스로 많이 노력했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항암 치료를 받아야 했던 숙주는 폐에 전이된 종양 세포에 대한 항암치료는 거부했다고 한다. 약한 체력 때문에 잘못하면 다른 장기까지 손상이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식이요법이었다.
“면역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피가 맑아야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체질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숙주의 체질에 맞는 음식에 우선 순위를 매겼습니다. 숙주의 경우에는 가장 효과를 보았던 것이 홍삼 엑기스였습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구역질이 많이 나 하루 한 끼의 식사조차 못했는데 홍삼 엑기스를 먹으면서부터 구역질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식이요법에 대한 정보를 주위 환자 보호자들과 공유하면서 알게 된 단체가 ”암 환자 가족을 사랑하는 시민연대(www.ilovecancer.org)”이다. 무엇보다 도움이 되었던 건 똑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에게 좀더 믿을 수 있는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얻기 위해 잃다
골육종이라는 병이 무엇을 가져다 주었느냐는 질문에 숙주는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잃은 시간”이라고 대답했다.
어쩌면 그 또래의 학부모와 아이들이 입시에 지쳐 서로에 대한 사랑조차 잃어가고 있을 때 숙주와 숙주 어머니는 병을 통해 궁극적인 삶의 비밀을 깨달은 지도 모른다. 경남 양산에서 살면서 두세 달에 한 번씩 검사를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고 있는 숙주는 이제 병마의 터널이 끝나는 지점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태다. 검정고시 준비를 하는 틈틈이 외로운 병실에서부터 즐겨보았던 환타지 소설 작가가 되는 꿈을 꿔본 적도 있다는 숙주.
아직 무엇을 하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정한 건 없지만, 그저 누군가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말한다. 친구들과는 조금 달랐지만 ”삶은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철학적인 말을 툭툭 던지는 숙주는 이제 다시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삶의 길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