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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만년 소녀 같은 순수함과 해맑은 미소가 아름다운 연기자 김혜자

2001년 08월 건강다이제스트 정열호

【건강다이제스트 | 박선희 기자】

” 마음을 아름답고 순하게 해주는 것이 배우의 역할 “

연극 ‘김혜자의 셜리 발렌타인’에 온 열정 쏟아

김혜자! 만년 소녀 같은 순수함과 꾸밈없이 해맑은 미소부터 먼저 다가오는 여자. 거기에 어머니 같은 따뜻한 시선과 자상함까지. 그래서일까? 왠지 단박에 속내를 털어놓고 친해질 수 있을 것만 같은 친근감이 느껴진다. 가장 닮고 싶고 또 존경하는 연기자로 늘 손꼽히는, 그야말로 한국 최고의 연기자인 그녀가 요즘 얼마 전 공연을 시작한 연극 ‘김혜자의 셜리 발렌타인’ 에 푹 빠져 있다. 연극 연습에 한창인 그녀를 만나봤다.

공연시작 일주일 전 연극 연습에 한창인 극장(제일화재 세실극장)으로 김혜자씨를 만나러 갔다. 역시나 함박 웃음으로 먼저 고개를 내미는 그녀. 그 환한 미소로 단박에 사람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만다.

그녀의 이번 공연작 ‘셜리 발렌타인(작가 윌리 러셀, 연출 하상길)’은 무뚝뚝한 남편과 이제는 다 자라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1남1녀를 둔 평범한 40대 주부가 소극적이고 무능하게 느껴지는 일상적 삶의 권태에서 탈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그녀에겐 꼭 10년만의 무대 외출이다. 그런 만큼 많이 떨리고 두렵단다.

사실 이번 연극은 그녀에게 있어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장미와 콩나물’이 끝나고 TV에서 적당한 배역을 찾을 수 없어 굉장히 침체된 느낌이었어요. ‘이게 내가 연기자로서 살아있다고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다만 그 동안 월드비전 일로 세계 각국의 가난한 나라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만나는 게 유일한 기쁨이었죠. 그것마저 없었다면 아마 죽은 것 같았을 거예요.”

그간 20년이 넘은 장수프로그램인 ‘전원일기’ 등의 영향으로 그녀는 대표적인 ‘한국의 전통적 어머니상’으로 꼽히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또한 ‘고향의 맛’이라는 슬로건 아래 25년간 한 회사의 광고모델로 활동, 지난 95년에는 한국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덕분에 지금껏 많은 이들에게 그녀는 푸근하고 넉넉한 어머니의 이미지로 강하게 각인돼 왔다.

그러나 바로 그 고착화된 이미지가 늘 변신이 필요한 연기자인 그녀에게는 때로 마이너스로 작용하기도 한다. 들어오는 섭외의 태반이 그런 비슷한 류의 역할들인 것. 그러나 그녀는 이제 너무 일상적인 역은 지겹단다. 그런 역은 ‘전원일기’ 하나만으로 족하다고.

“걸핏하면 그런 비슷한 역만 하라고 하는데, 이제 거절하는 것도 진저리가 나요. 전 ‘장미와 콩나물’이나 영화 ‘마요네즈’에서와 같이 살아있는, 뭔가를 표현할 수 있는 그런 역을 하고 싶어요.”

그 때문에 그녀는 지난 3~4년간 거의 늪에 빠진 기분이었단다. 그것이 얼마나 심했던지 이제 정말 죽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정도라고.

이번 연극 통해 인생 및 연기자로서의 전환점 기대

이처럼 한동안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그녀에게 이번 연극은 다시 한 번 연기자로서 그녀의 정열을 끄집어낼 수 있는 계기가 돼주었다.

“제 마음과 주인공 ‘셜리’의 마음이 이번에 딱 맞아떨어졌어요. 이번 공연을 잘 해냄으로써 남편과의 사별과 ‘장미와 콩나물’ 종영 이후 침체돼 있던 제 인생은 물론 연기자로서의 전환점도 될 것 같아요.”

아직 우리 연극의 현실이 열악하긴 하지만 그래도 ‘연극은 공부’라 생각한다는 그녀는 시험 보는 기분으로 할 것이라며, 이렇게 다시 연기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게 너무 감사하단다.

그런 만큼 그녀의 이번 연극에 대한 열정과 각오는 뜨거울 수밖에 없다. 아울러 모노드라마란 부담 때문에 두려움도 크다. 그래서인지 처음 연극 연습을 시작하고 한 달간은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한두 시간마다 벌떡 일어나 계속 대사를 중얼거리곤 했어요. 제가 너무 큰일을 벌여놨다는 생각에 무섭고 두렵기도 했구요. 이제 그런 고비는 넘겼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그녀는 현재 ‘전원일기’ 이외의 모든 TV드라마 출연을 중단한 상태다. 또 공연 일정도 마감 일을 정하지 않고 관객이 이어지는 한 계속할 작정이다.

“관객만 많이 와준다면, 그리고 TV든 연극이든 영화든 앞으로 더 좋은 배역이 들어와서 제가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때까지는 이 연극만 할 생각이에요.”

대단한 열의와 결의가 아닐 수 없다. 어느덧 작품 속 여주인공 ‘셜리’가 돼있는 그녀. 그렇다면 그녀가 이번 연극에서 가장 공감이 갔던 부분은 어떤 것일까?

“그리스 해변으로 여행을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공항의 탑승 전철을 기다리던 셜리가, 꼬리표를 달고 컨베이어벨트를 따라가는 자신의 가방을 바라보면서, 문득 그것이 평생을 끌고 다닐 자신의 삶의 무게라는 걸 깨닫고 다시 돌아서 걷기 시작해요. 결국 자기 자신을 찾기로 한 거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쉽고 안전하다는 이유로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녀는 “안락한 현실로부터 탈출해서 자기를 찾는 게 진짜 인생을 사는 게 아니냐”며 “그냥 편안하게 안주해버리면 그 모든 인생을 소모해버리고 마는 것”이라고 말한다.

상처를 입더라도 자신의 꿈이 무엇이었던가는 한 번쯤 생각해 보는 게 좋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야도 넓어진다고. 주위를 돌아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체력관리 위해 운동 열심, 식사량도 늘어

혹독한 연습이 필요한 연극은 그만큼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에 스스로 체력관리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녀의 경우 매일 8시간씩 죽기살기로 맹연습을 하는 탓에 따로 시을 낼 여유가 없어 가끔 다니던 수영 대신 집에서 자전거와 줄넘기 등을 매일 열심히 하고 있단다. 아울러 예전에 비해 식사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고. 본래 적게 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그녀인지라 이는 꽤 놀라운 변화에 속한다.

“집에서 일 봐주는 아줌마가 “아무 것도 안 먹어 속상해서 죽겠다”고 하소연 할 정도로 밥을 잘 안 먹었어요. 그랬던 것이 이제는 집에서 아침 먹고, 낮에 여기 와서 김밥 이만 한 것(손으로 흉내를 낸다) 다 먹고, 거기다 점심으로 비빔밥 한 그릇까지 다 먹어요. 전 여태까지 ‘나 밥줘’ 이래본 적이 없는데, 이제 ‘나 밥 왜 안줘요?’ 이런 대니까요.”

그녀에게 전화하는 사람들도 한결 같이 그녀가 기운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한단다. 목소리가 씩씩해졌다”며 기운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한단다. 아마도 그녀 스스로 신명이 나 하는 이번 연극이 그녀에게 생기와 삶의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것 같다.

고통받는 아이들에 사랑 전하는 수호천사

연기 말고 또 한 가지 그녀에게 삶의 의미가 되어주는 것이 있다. 바로 지난 92년부터 월드비전 친선대사로 활동하며 가난과 전쟁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세계 곳곳의 아이들을 만나는 것.

“아이들 생각만 하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요. 인도에선 아직도 결혼 지참금 때문에 첫째딸을 제외한 나머지 딸들은 낳은 지 사흘만에 독초를 먹여서 죽여요. 그리고 부모가 빌린 단돈 50불을 갚지 못해 평생 잎담배를 말고 코코넛 껍질로 새끼를 꼬며 노예로 살아가는 아이들도 있어요.”

가슴이 너무 아파 몇백 명분의 50불을 대신 갚아줬다는 그녀. 그러나 그것만으로 끝나선 안된다고 한다. 빚을 대신 갚아줘도 아이 부모들이 얼마 안가 다시 돈을 빌리기 때문. 그보다는 결연을 맺고 꾸준히 아이들을 돌봐주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선 1~2만원이라도 자신이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형편껏 도와주는 것이 좋다고.

“배고파 우는 사람에게 밥을 줘야지 기도해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게 그녀가 몸으로 체득한 신념이다.

남편과의 사별 이후 더욱 사랑과 고마움 느껴

남편이 다른 세상으로 가고 없는 지금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느낀다.

“저희 남편은 절 배우로서 인정해줬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고맙고 감사한 사람이었다는 게 느껴져요. 살아있을 땐 몰랐는데 이별하고 나니까 그 사람이 날 정말 사랑한 사람이었구나, 진짜 날 배우로 인정해준 사람이었구나 그걸 느끼게 돼요.”

98년 췌장암으로 그녀 곁을 떠난 지 벌써 몇 년째지만 그녀는 아직도 남편과 헤어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한다. 거실에 걸려있는 웃는 모습의 영정 사진을 보면 꼭 그녀에게 말을 하는 것 같다고. ‘열심히 배우로서 훌륭하게 돼야 돼. 죽을 때까지…’ 그래서 그녀는 더욱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단다.

“자기 전에 거실에 앉아 마음으로 얘기를 나눠요. 그냥 실제로 제게 말을 안 붙여 주니까 그게 좀… 그렇긴 하지만, 맨날 거기서 웃고 있으니까 그렇게 없는 것 같진 않아요.”

어느덧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어지는 그녀의 남편 회상.

“그 사람이 저 때문에 일찍 죽어버린 것 같아요. 저 잘 살라고. 췌장암 선고받고 한달 반만에 돌아가셨거든요. 그간 남편 옆에서 시중들어 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 ‘이 동안만은 병원에서 이 사람 곁에 있어 줘야지’ 싶어 쭉 같이 있었는데, 입술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하니까 의사들이 저보고 가라고 그러더라구요. 안 그러면 저도 죽는다구, 간병인을 두라구요. 사실 그때 저도 꼭 쓰러질 것만 같아서 결국 간병인을 뒀는데, 그리고 나서 이틀만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죽더라도 계속 옆에 같이 있어줬어야 했는데…”

죽음과의 사투 앞에서도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 대한 걱정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친구에게 “먹고 죽는 약 있으면 하나만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을 정도인데도 그녀에게는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던 것.

그런 사실을 전해들은 그녀는 의사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항의하지 않을 테니 남편이 아프기만 하면 계속 진통제를 놔주라.”고 부탁을 했단다. 이미 살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남편에게 고통이마나 덜어주고 싶었던 것. 그로 인해 남편이 더 빨리 죽게 된 것 같다고.

지금 와 생각하면 그녀는 남편에게 미안한 게 너무 많다. 특히 늘 일이 우선이었던 그녀 때문에 많이 외로웠을 것이라고.

“어떨 땐 너무 미안해서 예쁘고 젊은 여자랑 연애하라고 얘기 한 적도 있어요. 그럼 남편은 ‘사람, 참!’ 하며 웃을 뿐, 늘 7시면 집에 들어왔어요. 집에 오는 게 제일 행복하다고…”

그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여서 그녀도 집에 있는 게 가장 행복하단다. 때문에 연기와, 봉사활동 나갈 때를 제외하곤 꼭 집에 있는다고.

“연기하는 것 이외에는 밖에서 행복을 찾는 건 거의 없었어요. 전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하고 부를 때 항상 ‘응’ 하고 대답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촬영 때문에 늦는 날을 제외하곤 늘 그렇게 해줬어요. 아이들에게 맛있는 걸 만들어주거나 하진 않았지만, 언제나 그애들이 부를 때 옆에 있어줬어요.”

인간적이되 수다스럽지 않게 늙고 싶어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말이 많아졌다며 조금 걱정을 내비친다.

“<어느 수녀의 기도>라는 잠언시집 중에 ‘말 많은 늙은이가 되게 하지 마시고, 어느 일에도 내가 참견해야 된다고 믿는 그 마음을 없애 주시고, 사려가 깊되 우울한 여자는 되지 말게…라는 기도문이 있어요. 전 그걸 매일 봐요. 그런데 진짜 잔소리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이렇게 말이 많아졌어요.”

그런 그녀를 보고 어떤 이는 “확실히 말이 많아졌다”고 하기도 하고, 반면에 어떤 이는 “예전엔 너무 깍쟁이 같았는데, 인간적이라 오히려 더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자칫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퍼질러 앉아 수다 떠느라 자기 자세가 어떤지도 모르는 그런 아줌마’가 되는 건 정말 싫다는 그녀는, 때문에 인간다운 것과 수다스러움과의 경계선을 잘 생각하려 애쓴다며 웃는다.

그런데 기자는 그녀가 말이 다소 많아졌다는 게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모든 것들에 좀더 넉넉해진, 여유로와진 탓은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순하게 하는 연기 하고파

김혜자, 그녀는 언뜻 보면 부드럽고 연약한 듯 하나 그 누구보다 내면에 강한 열정과 에너지를 갖고 있는 연기자다.

그녀는 앞으로 관객들이 공연을 보고 마음이 양 같이 순해져서 나갈 수 있는 그런 연극을 했으면 좋겠단다. “사람들이 너무 삭막해지는 것 같다”며 “TV든 연극이든 영화든 보는 사람들 마음을 아름답고 순하게 해주는 게 배우의 일, 역할”이라 생각한다고. 그녀의 고운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가 오랜 동안 한국의 어머니상으로 지칭되는 건 비단 드라마에서의 이미지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는 그녀의 타고난 천성이 이렇듯 착하고 따뜻해, 무엇이든 끌어안아 포용할 듯 포근하고 넉넉하게 느껴진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록 그것이 그녀의 연기변신에 간혹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대본을 보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는, 암만 봐도 천상 배우인 그녀가 이번 연극에 쏟는 불꽃같은 열정과 에너지를 보면서 그녀가 한국 최고의 연기자가 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고는 결코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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