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신미현 기자】
“꿈이 있는 한 항상 젊습니다”
10년 전 KBS2TV를 통해 방영됐던 ‘왕룽일가’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다면 단연 ‘쿠웨이트 박’ 최주봉이다. 캬바레의 제비로 한 밑천 잡겠다는 실없는 소리로 우리를 울고 웃겼던 그가 이제 다시 SBS ‘왕룽의 대지’에서 ‘절루박’이 되어 돌아왔다. 서민적인 삶의 애환을 그만큼 잘 소화해 낸 사람이 없는데 … 서초동 예술회관에서 만나 그간의 이야기와 연기에 대한 30년 외사랑에 대해서 들어본다.
연기를 꽤 오랫동안 해 오셨는데, 처음 연기를 시작하게 된 동기는?
나는 중앙대 연영과를 나왔고 69년도 연극 `바다 위에 부르짖는 7개의 절규’라는 작품으로 처음 무대에 올랐다. 이 연극은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인간 군상들을 다룬 연극이었다. 나는 여기서 백작 역할로 출연했다. 처음이다 보니 너무나 흥분되고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 연기를 계속 하면서 그 때의 감동은 지금도 나에게 자극제가 되고 있다. 그런 흥분과 감동 때문에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고 힘든 시기를 걸어오는 데 있어서 나를 지탱해준 버팀목이었다.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왕룽일가’?
이후에는 계속 무명으로 연극활동을 하다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건 ‘한지붕 세가족’에서 만수 아빠로 출연한 것이었고 ‘왕룽일가’는 내 연기가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는 계기가 된 작품이었다. ‘쿠웨이트 박’이라는 배역이 정말 맘에 들었다. 그렇게 개성이 있으면서 서민적인 인물은 드물기 때문이었다.
지금 연기생활을 하신 지 30년이 넘으셨는데 그 기간동안 숱한 애환이 있으셨을텐데요?
연극을 처음 시작할 당시는 백수나 다름이 없는 생활이었다. 그 당시에는 12개의 극단이 해마다 2개의 작품을 할 수 있었고, 여기서 성공을 해야만 국가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는 연극이 끝나면 모여서 막걸리나 마시고 헤어져야 했고, 돈이 없어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했다.
그렇게 힘드셨는데 다른 길을 생각해 보신 적은 없는지?
정말 힘들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생활이 피지 않아서 아내도 많이 고생시켰고, 한때는 정말 연극을 때려치우고 장사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1년만에 망하고 이 길은 내가 갈 길이 아니란 걸 알았다. 사람은 어떤 일이든 성공을 하려면 그거 하나에 매달려야 하는데 마음은 콩밭에 가있었으니 될 리가 있나.
악극을 계속하고 계시는데, 특별히 악극을 고집하는 이유라도?
악극은 우리의 전통극이다. 물론 일제시대 때 변질된 양상도 있지만 그 시절 우리 민중의 한을 얘기해 주고 그 한서림을 풀어 주던 것이 이 악극이었다.
그런 악극을 일제가 가만히 놔 둘 리가 없었다. 싸구려 연극으로 치부해서 갖은 탄압 끝에 결국은 사장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이 악극을 이렇게 사장시켜 버리는 것은 우리의 전통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서 지난 93년 뜻있는 몇몇 연극인과 함께 자비로 무대에 올리게 된 것이다. <번지 없는 주막>이 그 당시 대성공을 거두었고 지금도 해마다 많은 분들이 악극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온다.
악극은 문화에서 소외당해 있던 중장년층에게는 그 목마름을 풀게 해 주고 자녀들로서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다. 나도 연기를 하는 입장에서 관객들에게 그 시절의 향수와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데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이번 드라마에서 ‘절루박’으로 출연 중이신데 그런 컨셉은 어떻게 선정하신 것인지?
배우는 창조하는 직업이다. 나는 나이가 먹어도 배우로서 창조성만은 녹슬지 않도록 갈고 닦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배역을 보면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쿠웨이트 박’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10년 동안 열심히 지루박을 추다보니 관절염이 생겨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설정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카츄사 군시절에 흑인들을 많이 봐 왔다. 그래서 흑인들의 리드미컬한 걸음걸이가 이번 배역과 잘 맞을 것 같아서 응용을 했고 그 결과 ‘절루박’이 탄생한 것이다.
지금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계신데 후배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은?
나는 올해는 이 악극을 뉴욕 맨하튼의 링컨센터에서 공연할 예정이다. 난 쉰이 넘은 나이지만 아직도 못 이룬 꿈이 너무 많고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다. 연기에 대한 사랑만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외곬수가 아니면 지금은 성공하기 어렵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를 파고들어 최고가 되어야 한다.
강단에 서서도 학생들에게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그것을 특화시켜 최고가 되라고 말한다. 난 그들이 어떻게 해야할지 길을 안내할 뿐 결코 어떤 이론만을 강의하지 않는다. 나도 학생들에게 배울 점이 있는 것이고 그들은 나에게 기본을 배우고 개성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지를 배워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단숨에 스타가 되야겠다는 허황된 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스타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 끝에 다듬어 지는 것이다.
나도 젊을 때는 조급하게 모든 일을 해내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것도 해 놓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 때를 돌아보면 내가 그때 왜 그렇게 조급해 했는지 부끄러울 뿐이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해야 하고 인생도 순리대로 풀어야 한다. 언젠가는 노력한 대가가 주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고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
30년 동안 힘든 일도 많으셨을 텐데 건강관리는 어떻게 해 오셨는지?
건강에는 별 것 없는 것 같다. 항상 열심히 일하고 즐겁게 생활하려고 하는 평소의 생활자세가 나의 건강의 비결이다.
그리고 틈나는 대로 아내와 함께 등산을 하고 등산길에서 만나는 분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좋아한다. 그들이 날 알아보고 반갑다고 악수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보면 내 자신의 삶이나 생활을 반성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된다. 그리고 정상에 오르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나의 꿈을 실행하기 위해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할지 생각한다. 그 시간이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다. 그리고 꿈이 있는 한 난 항상 20대의 청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