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송화정 기자】
예사롭지 않은 눈빛에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이 인상적인 김상태 목사(63). 3개월이란 시한부생을 선고받고도 살아야겠다는 일념하나로 모진 시간을 이겨낸 그. 이제는 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위해 분주히 발을 움직이는 그가 과거 암이란 굴레를 힘겹게 벗어난 그간의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암을 이기는 이들의 모임’이란 조금은 낯설기까지한 간판이 베이지색 건물의 한층을 차지하고 있다. 커다란 눈에 서글서글한 웃음을 가득 담은 김상태 목사에게서 사람의 마음을 편히 해주는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그러나 힘들었던 과거의 회상에 젖는 그의 얼굴에서 그간의 고충을 그대로 보여주는 굵은 선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의사들의 실수로 뒤늦게 발견한 암세포
1990년 5월. 건강상태가 많이 나빠진 듯하여 김목사는 건강체크를 위해 병원을 찾았다. 스스로 느끼는 이상한 예감과는 달리 혈당이 조금 높다는 결과였다. 그는 피곤해서 그려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겨버렸다.
그렇게 1년이 조금 더 지난 어느날. 김목사는 새벽 기도 인도를 하던 중 쓰러져 신도들에 의해 병원에 이송되었다. 항상 속이 쓰리고 아프며, 썩는 냄새가 올라오곤 했던 것들이 심상치 않은 증세들이 역시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한양대병원에서 괴롭도록 힘든 내시경 검사를 3차례나 받은 결과는 그저 신경성 소화불량이었다.
결국 3개월 후 2번을 더 쓰러진 뒤에야 사건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여 체크를 받은 결과 위암 4기라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을 받아볼 수 있었다.
“암이 있던 부위가 식도와 위가 연결되어 있던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사들이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나머지 위속에 내시경을 다 밀어넣은 후에야 검사를 했던 거죠. 그러니 위입구에 있던 그것들이 보였겠습니까. 결국 덕분에 발견이 더 늦어지게 됐죠.”
그 말을 하던 그의 입가에 약간의 씁씁함이 묻어났다.
‘나는 살아야 한다’는 일념하에
“위암 진단이 내려지고 순간적으로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내가 위암말기라니. 앞으로 3개월밖에 살수없다는 말이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았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나인지…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 지었길래 이런 고통을 주는지…이런 생각들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인 늦둥이 막내딸이 생각나더군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럽던 어린 딸을 두고 가야한다고 생각하니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믿기로 했습니다. 나는 나을 수 있다고.”
92년 3월 11일 서울대 김진복 박사의 집도하에 수술에 들어갔다. 식도의 1/5, 위장, 췌장, 비장, 담낭 등 모두를 잘라냈다. 그리고 그에게 3개월이란 생명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수술 후 일주일후 그는 다시 재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유는 췌장액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복부에 가득차 복막염의 위험으로 치닫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태어날 때 왜 우는지를 그때서야 알겠더군요. 새롭고 넓은 세상으로 나오면서 왜 그토록 울어야 대는지 그전에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일을 겪으며 저는 아마도 그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따뜻하고 친근했던 어머니의 배속에서 나와 그 편안함을 잃으며 삶과 죽음이라는 대상들에 직접적으로 맞닿게 되면서 말입니다.”
투철한 정신력과 믿음만이 살길
‘믿음이야말로 삶의 가장 큰 힘’. 이것은 김목사를 지금껏 버텨오게한 그의 힘이였으며, 생활 그 자체였다.
2000년 8월 미국 샌디에고 국제암연구학회에 특별초청을 받아 간 적이 있었다. 그의 암치료는 현대의학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세계 300여명의 의사들이 모인가운데 노르웨이의 한 의사가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엇을 먹고 나으셨습니까?”
그는 단 한마디를 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병이 있은 후로 그는 몸에 좋다는 것은 이것저것 셀수도 없을 만큼 많이 먹었다. 따라서 어느 것이 암치료에 효과를 나타냈는지 그로서는 알길이 없었다. 다만 그에게서 확실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믿음이었습니다. 전능하신 그분을 믿고 나는 살 수 있다는 내 자신을 믿는 믿음. 그것밖에 없었죠. 호랑이 굴에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지 않습니까. 그때의 저는 호랑굴에 들어와 있는 것과 다를바가 없었습니다.”
그는 암치료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정신력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온몸의 세포가 경직되고 신진대사가 잘 되지 않는다. 그는 그간 자신을 삼키려 해왔던 암을 이기기 위해 수많은 책을 뒤졌고 여기저기를 다니며 암에 대해 공부를 했다. 그에 대한 결론은 항상 분열하는 세포들이 이렇게 스트레스로 인한 경직으로 제대로 분열되지 않고 뭉쳐서 암이 생기는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생각에 도달했다.
우리 몸의 임파구나 백혈구와 같은 면역체계들은 암세포를 공격하지 않는다. 이것은 암세포를 침입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면역체계에 그들을 적으로 인식할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신력은 바로 내가 살수있으며 암을 나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면역체계에 전달함으로써 암세포를 적으로 인정하게끔 하는 센서역할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이야기한다 “살고싶다면 정신력으로 투철하게 자기를 이끌어라!”
당석증 그리고 역류성 식도염
1992년 3월 첫 수술이후 올해 1월 30일의 마지막 수술에 이르기까지 그는 4번에 걸친 암수술과 두 번의 담석술, 한번의 역류성 식도염에 대한 수술을 받았다. 담석술은 그에게 또 한번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는 순간이었다.
1996년 5월 18일 오후 2시 갑자기 복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밤 10시가 넘도록 멈추지 않는 통증으로 인해 그는 서울대학교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그의 병원기록부를 본 의사들은 다시 암이 재발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으니 편안하게 돌아가라는 말을 그에게 남겼다.
그러나 그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을 받고 싶었다. 3일 후 그는 김진복 박사로부터 암이 아닌 담석증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간에서 배출되는 담즙이 담낭이 없는 관계로 고일 곳을 찾지 못하다 서있는 자세에서 조금만 각도가 변형이 되어도 식도를 타고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역류성 식도염. 덕분에 올해 1월 말 치료를 위한 수술을 받기 전까지 제대로 누워서 잘 수 없는 힘든 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제는 어떤 음식이나 잘 먹을 수 있었고, 편히 누워 잘 수도 있었다.
“올해 초 수술이후로 7㎏정도 체중이 불었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훨씬 보기좋은 모습이죠.”
활짝 웃는 그의 얼굴에서 더 이상 병마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암을 이기는 이들의 모임’ 결성
첫 암진단을 받은 후 그는 3개월이란 시간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3개월 후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그는 생각했다. 자신이 이렇게 건강히 살아있다는 것을 다른 암환자들에게 알림으로서 그들에게 살수있다는 희망을 주자고.
이에 그는 1992년 12월 1일 서울대 간호대학장 이은옥 교수와 함께 ‘암을 이기는 이들의 모임’을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암은 불치병이 아니라 난치병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낫는 사람들이 나을 수가 없겠죠. 그러나 사람들은 암 진단이 내려지면 바로 나는 죽는다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암을 진단이 내려졌다고 하지않고 선고를 받았다라는 표현을 주로 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그들의 죽음에 대한 스트레스를 벗어날 수 있게 도움으로써 그들에게 나을 수 있다는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암과의 싸움,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을 알기에 그는 주변의 도움이 필수적이라 여긴다. 때문에 전국의 암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과 함께 암을 이기는 것에 대해 같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길만이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는 현재 국립암센터 공공보건의료계획 심의위원회 위원으로 있다. 그곳에서 그는 말기 암환자를 위한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호스피스 암센터 건립을 위해 분주한 날을 보내고 있다. 암은 알아야만 제대로 알고 있어야 다스릴 수 있는 것. 때문에 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공간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가치있는 삶을 위해
‘늘 기쁘게, 늘 즐겁게’. 그가 항상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말이며 다른이에게도 전염될 수 있도록 힘쓰는 말이기도 하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잠드는 순간까지 그의 하루는 바쁘기 그지없다. 다양한 복지재단을 다니며 암환자를 돕고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은 이제 그에게는 세상을 다하는 날까지 그가 해야할 가장 기쁜일 중의 하나이다.
투병생활은 그에게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 보며 삶에 대해 진지해 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가장 먼저 자신부터 위하여야 했으며, 다른 이의 눈에 비춰지는 모습들에 충실했을 뿐인 과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변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 지금 그는 자신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가장 여유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파고들었던 힘든 기억들을 누군가의 안배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 생각한다. 스스로 자신의 뒤를 돌아볼 수 있도록 그 누군가가 그에게 배정해놓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지금과 같이 내 자신이 목사라는 것에 만족한 적이 없었습니다. 다른 이를 돕고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스스로의 만족과 보람만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어찌보면 이기주의적인 생각이 아닐까 하네요. 그것에 가치를 부여한다면 가장 인간다운 삶이 되지 않을까요.”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어렵고 힘든 암환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일을 계속 하겠다는 그. 그의 얼굴에는 따스한 미소가 드리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