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이은혜 기자】
병원에서 손 놓은 말기 암 환자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있는 사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에 사는 우영훈 씨(62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어느 날 느닷없이 생사의 기로에 섰던 사람. 위암, 폐암, 신장암까지 그의 몸 구석구석에는 암세포가 퍼져 있었다. 병원에서 해줄 것은 별로 없었다. 마지못해 권한 것은 항암치료. 하지만 그는 병원 치료 대신 이삿짐을 쌌다. 경기도 이천으로 이사를 했고, 지금 그는 자신만의 투병 밑그림을 그리며 희망의 증거가 되고 있다.
병원에서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2년을 넘기고, 오늘 강인해보이는 모습으로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복 받은 사람?
신은 언제나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준다고 했다. 하지만 때로는 실수할 때도 있나보다.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시련, ‘왜 내게만?’분노가 치미는 억울함까지….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너무나 의외다. 자신은 복 받은 사람이라며 허허 웃는다. 죽네, 사네 할 일을 두 번이나 당하고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 복 받은 게 아니고 뭐냐는 것이다. 뜻밖의 대답 앞에서 주춤하는 사이, 우영훈 씨는 ‘복 받은 지난 사연’을 털어놓았다.
부품을 만드는 조그마한 중소기업체를 경영하며, 그래도 한평생 호기있게 살았노라 자부하는 우영훈 씨. 하지만 그의 평범한 행복은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서면서 태클이 걸리기 시작했다. 뇌경색 때문이었다.
“젊었을 때부터 고혈압과 고지혈증이 있었어요. 집안 내력이었어요.” 그러나 약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운동도 열심히 하고 등산도 늘 했다. 평소 혈압은 140~150대였지만 관리만 잘하면 괜찮을 줄 알았다. 무엇보다 약을 먹으면 평생 먹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너무도 싫었다고 한다. 또 성기능이 저하된다는 속설도 혈압약을 꺼리게 했다.
“그런데 2007년 12월 말경, 송년회를 끝내고 택시를 타려고 서 있는데 몸의 힘이 쭉 빠지면서 그냥 주저앉았는데 깨어나 보니 응급실이었어요.”
뇌경색이었다. 우측 신경이 마비되는 증상을 동반하고 있었다. 다행히 수술은 하지 않고 혈전을 녹이는 약물치료만 했지만 후유증을 비껴갈 순 없었다. 오른쪽 다리를 절어야 했고, 오른쪽 팔도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어요. 재활치료를 열심히 하면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그가 재활치료로 선택한 방법은 등산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도시락을 싸서 관악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침에 올라가서 저녁에 내려왔다. “심심하지 않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산에 가면 모두가 친구란다. 나무도 바위도, 심지어 이름 모를 풀 한 포기도 친구처럼 생각되었단다. 걸으면서 생각도 하고 바위에 앉아보기도 하고 넘어져보기도 하고 기어보기도 하면서 하루 종일 산에서 지냈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1년 정도 지났을 때 그는 운동 하나를 추가할 수 있었다. 자전거 타기였다. 다리와 팔에 힘이 생기면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됐다.
“눈만 뜨면 산에 가고, 자전거 타고…. 근 4년 동안 그런 생활을 했더니 90% 정도는 예전 몸놀림을 할 수 있게 됐어요. 하루아침에 병이 생기지 않았듯이 한 번 생긴 병을 회복하는 데도 그만큼의 긴 세월이 필요하더군요.”
그래도 하루하루 좋아지는 몸 앞에서 불행 중 다행이라며 안도했다는 우영훈 씨. 하지만 그 안도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또 다른 시련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위에, 폐에, 신장에 암세포
우영훈 씨는 하나하나 체험을 통해 터득한 투병일지를 쓰며 희망의 산 증인이 되고 있다.
2011년 5월경이었다. 우영훈 씨는 감기 기운이 있어 동네 약국에서 감기약 3일치를 사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약을 먹어도 감기는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찾아간 곳은 동네 개인병원이었다. 검사를 해본 의사는 기관지 염증 같다며 처방전을 써주었다. 하지만 그 약을 먹어도 증상은 호전되지 않았다.
“생각다 못해 개인병원에 가서 검사를 좀 해보자고 했어요. 그러자 의사가 x-ray를 찍더니 바로 영상의학과에 가서 CT를 찍어오라고 하더군요.”
영문을 몰랐지만 CT를 찍었고, 결과는 바로 나왔다. 의사는 “폐 위에 야구공만 한 것이 앉아 있는데 진단명은 폐종격동 종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빨리 큰 병원으로 가보세요.”였다.
그 후의 일은 마치 꿈속 같다. 부랴부랴 부천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서 또다시 CT를 찍었고, 일주일 뒤 나온 결과는 폐 문제보다 위도 이상한 것 같으니 PET를 찍어보자는 거였다고 한다. 그리고 일주일 뒤 그에게 전해진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위에도 암세포가 있는 것 같고, 폐에도 암세포가 있는 것 같고, 신장에도 암세포가 있는 것 같으니 조직을 떼어서 검사를 해보자고 하더군요.”
이럴 수도 있나 싶었다. 하루아침에 암이라니…. 그것도 한꺼번에 3가지 암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오진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조직검사 결과 앞에서 실날 같은 희망은 사라졌다.
2011년 7월15일 그는 위암, 폐암, 신장암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위에서 암이 발생해 폐, 신장으로 전이가 됐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수술은 불가하다고 했다.
“이때 병원에서 권한 것은 항암치료였어요. 수술도 불가하니 그 방법밖에 없기도 했고요.”
그로부터 3일 후 우영훈 씨는 이삿짐을 쌌다.
“항암치료를 받을까 말까를 놓고 3일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그리고 내린 결론은 이삿짐을 싸자는 거였어요.”
항암치료는 받고 싶지 않았다. 폐암 4기 진단을 받고 힘든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죽음에 이르렀던 동생 생각도 났고, 폐암 1기였지만 수술하고 죽은 친구도 생각났다. 하물며 그는 암이 세 군데나 있는 말기암 환자인 것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하루를 살더라도 활보하며 살자고. 설사 죽더라도 병실에서 고통스럽게 죽지 말자고. 그날로 이삿짐을 쌌고, 경기도 이천으로 향했다.
자연에서 얻은 쾌유의 기쁨
항암치료 대신 경기도 이천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우영훈 씨. 이때부터 그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결심한 것이 있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자연의 순리대로 살고, 자연의 먹을거리를 먹으며, 자연의 마음으로 살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아침에 눈만 뜨면 배낭에 호미, 낫, 톱을 넣고 도시락을 싸서 산으로 향했어요. 산길을 걸으면서 운동도 하고, 또 그 길에서 제가 아는 풀이 보이면 뜯어서 우적우적 씹고 다녔어요.”
특히 논두렁, 밭두렁, 산기슭에 널려 있는 새똥풀, 질경이, 민들레, 씀바귀 등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먹을거리였다고 한다.
“뜯어서 나물을 무쳐 먹기도 하고 생즙을 내어 먹기도 했어요. 그래도 남은 것은 그늘에 말릴 것은 그늘에 말리고 햇볕에 말릴 것은 햇볕에 말린 뒤 달임물로 만들어 먹었어요. 그렇게 하니까 먹을거리의 대부분을 산에서 얻을 수가 있더군요.”
무엇보다 산을 타면 암의 통증을 잊을 수 있어 좋았다고 한다. 하루 24시간 지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짧게는 1~2시간 오기도 하고, 예고 없이 불쑥불쑥 기분 나쁜 통증이 찾아오는데 나무 숲속을 헤치고 풀뿌리를 뽑고 하면 거기에 신경이 집중되면서 통증을 잊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산을 찾았고, 그 결과는 지금 그의 몸에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날이 좋아지는 몸으로 바꿔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하루하루가 축복처럼 느껴진다는 우영훈 씨. 비록 잠깐잠깐 스쳐지나가는 암의 통증은 있지만 그럴 때마다 ‘어, 이 자식이 또 찾아왔네. 내가 살아야 너도 사니까 가만히 좀 있으라.’ 다독이며 산을 찾는다. 그러면서 그동안 하나하나 체험을 통해 터득한 투병 밑그림도 목숨 걸고 실천한다.
우영훈 씨가 체험으로 만들어낸 투병 밑그림
1. 눈 뜨면서 자기 전까지 몸 움직이기
움직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눈 뜨자마자 침대에서 40~50분 정도 운동부터 한다. 기지개 켜는 것부터 금붕어운동, 요가, 발목펌프운동 등을 주로 한다. 생활 속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꿈도 못꿀 일이지만 청소기도 돌리고 채소도 다듬고, 녹즙도 짜고…. 자신의 일은 하나부터 열까지 손수 하면서 늘 몸을 움직인다.
2. 식사는 최대한 내추럴하게~
현미잡곡밥 한 덩이에 소금기 뺀 다시마 2~3장, 식초에 담근 마늘 몇 쪽, 식초에 담근 식초콩 몇 알, 브로콜리 날 것, 양배추 채 썬 것을 하나의 접시에 담고, 청국장가루 2숟가락과 함께 먹는다. 절대 포식하지는 않는다. 많이 먹어서 남은 칼로리는 암세포의 힘만 강하게 할 뿐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3. 하루 생즙 600~800cc 마시기
산에서 캐온 민들레, 질경이, 쑥과 밀순, 양배추, 신선초, 셀러리, 비트, 무 등을 생즙으로 짜서 하루 600~800cc는 꼭 마신다.
4. 달임물을 음용수처럼 마시기
산을 오가면서 채취해온 도라지, 더덕, 대추, 버섯, 개똥쑥, 비단풀 등을 말려두었다가 물을 붓고 푹 달여 마시면 훌륭한 음용수가 된다고 한다. 손질하고 말리고…많은 정성을 들여야 하지만 하나하나 직접 만들어먹는 것도 솔솔한 재미가 있다고.
후회 없는 삶, 만족하는 삶
무작정 시골로 삶의 터전을 옮기고 아무런 정보 없이 하나하나 체험을 통해 자신만의 투병 일지를 써온 우영훈 씨.
지금의 그는 2년 전과는 사뭇 다르다. 180도 바뀐 생활만큼이나 그의 몸도 많이 달라졌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절망을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의 방식에 확신도 생겼다.
“처음에는 정리가 안 된 상태여서 반신반의했었는데 2년이 지난 지금은 제가 해온 방법에 자신감도 갖게 됐어요. 이제는 어떻게 하면 암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어렴풋하게나마 얻은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도 목숨 걸고 산을 오르고 녹즙을 마시고, 자연식을 한다. 오늘 그가 건재할 수 있게 해준 비밀병기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큰 돈 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단다.
특히 투병 과정에서 혈압약을 끊게 된 것은 덤으로 얻은 기쁨이라고 말한다.
“뇌경색 발병 후 관에 들어갈 때까지 혈압약을 먹어야 한다는 처방을 받고 늘 먹었는데 혈압약을 먹으면 지독한 변비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러웠어요. 변비 좀 없애달라고 담당의사께 통사정을 했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섬유질을 많이 먹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그 스트레스가 암 발병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그래서 삶의 터전을 옮기고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투병을 시작한 지 5개월 정도 됐을 때 혈압약을 끊어보자 결심했다.
“무조건 혈압약을 끊고 나니 3~4일 지나자 뒷골이 당기고 어지럽기도 했어요.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참아보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으면 혈압약을 먹었어요. 그리고 좀 괜찮아지면 또 며칠씩 약을 끊어보고…이런 식으로 4~5개월 진행하니까 10일 이상 약을 먹지 않고도 버틸 수 있게 되더군요.”
이렇게 해서 혈압약과는 멀어졌다. 그 대신 날마다 하루 두 번 혈압은 꼭꼭 체크한다. 2013년 2월 25일 현재 그의 혈압 수치는 128/74다.
혈압약을 먹지 않게 된 것만 해도 다시없는 축복이라고 말하는 우영훈 씨.
그런 탓에 지금의 그에게는 모든 것이 다 좋다. 후회도 없다. 두 발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체력이 있어 다시없는 행복이고, 모든 걸 내려놓은 자리에 새로 올려놓은 단순한 삶, 비우는 삶이 주는 가벼움도 다시없는 기쁨이다.
그런 그에게 다들 한 번씩은 꼭 물어본다. “병원에 가서 검사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냐?”고.
그런 사람들에게 그는 “호전됐다고 하면 뭐할 거며, 또 나빠졌다고 하면 어쩌겠어요. 어차피 암은 평생 관리해야 하고, 저는 지금의 제 방식이 좋아요.”
그래서 죽는 날까지 귀찮아도 운동하고 즐겁게 자연식하면서 암과 더불어 즐겁게 살기를 소망한다. 다행히 자신의 방법이 많은 말기암 환자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봉사하는 삶을 살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