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허미숙 기자】
5년이 지났다. 요양병원 식구들의 축하를 한 몸에 받으며 암 수술 후 5년 생존자의 주인공이 된 현재흥 씨(74세). 돌이켜보면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느 날 느닷없이 대장암 진단을 받아야 했던 그였다. 그 후의 일은 마치 꿈속 같다. 수술을 하고, 고통스런 항암치료를 받고, 그리고 요양병원에서의 5년이었다. 가족과도 이별해야 했고, 사회와의 단절도 받아들여야 했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했다고 한다. ‘더 이상 암 재발은 없다!’ 이 목표를 위해 생활도 바꾸고, 생각도 모두 바꾼 5년이었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현재흥 씨는 2013년 12월 28일 의학적으로 암 완치 판정을 받았다. 5년 생존율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 비결은 과연 뭐였을까?
스트레스를 술로 푼 사람
1970년대 건설업의 활황기를 이끈 주인공! 경인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까지 굵직굵직한 고속도로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 토목공학도였던 현재흥 씨는 인생의 대부분을 건설현장에 보낸 사람이다. 사나이들의 거친 숨결이 배어있는 건설현장은 평생 그가 몸담아온 삶의 주무대였다.
그런 직업적 특성 때문이었을까? 하루의 고된 일이 끝났을 때 한 잔 술로 피로를 푸는 일은 유일한 취미이다시피 했다. 스트레스가 심할 때도 한 잔, 기분이 좋아도 한 잔…자주 기울이는 술잔 속에서 날로 주량은 늘어났고, 술자리는 2차, 3차로 이어지면서 폭주를 하는 날도 많았다.
“그래도 건강 하나만은 자신 있었어요. 크게 아픈 곳 없이 잘 살았어요. 적어도 2006년까지는 문제 없었어요.”
어느새 육십을 넘어선 나이…아니 정확히는 예순여섯이라는 나이에도 설계일을 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왜였을까? 술을 마시면 숙취가 오래갔다. 그전에는 술을 마셔도 다음날이면 거뜬히 숙취에서 깨어났는데 그렇지가 못했다. 그리고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대변을 시원하게 보지 못했다. 대변을 볼 때마다 항문 부위가 뻐근하고 아팠다. 하지만 ‘별일 아니겠지’ 그냥 넘겼다. 나이 들면 으레 나타나는 증상인 줄 알았다.
그렇게 2년 정도 흘렀을 때 현재흥 씨는 ‘아차’했다. 대변에 피가 섞여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현기증도 심했어요. 변비도 생기고…그제서야 부랴부랴 동네 병원을 찾았죠.”
그런데 검사를 마친 의사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대장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종합병원을 가보라고 했던 것이다.? 그 후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대장내시경 검사를 했고, 담당의사는 말했다. 대장암이라고 했다. 수술할 수 있는 대장암이라면서 복강경 수술을 하자고 했다.
너무도 급작스럽게 받아든 대장암 진단. 수술 날짜는 일주일 뒤로 잡혔고, 현재흥 씨는 조용히 신변 정리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2008년 12월, 현재흥 씨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고비를 맞고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수술과 항암치료, 그리고 요양병원으로~
이틀 동안 신변정리를 하고, 조용히 입원을 했던 현재흥 씨. 수술은 간단하다고 했다. 복강경 수술을 하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 상황은 수술 30분 전에 역전됐다.
“이미 간에도 전이가 된 것 같다면서 복강경 대신 개복수술을 해야 한다더군요. 그때 든 생각은 수술 직전에 이런 결과가 나와서 참 다행이라는 거였어요.”
그런 마음 덕분이었을까? S결장에 있던 암세포와 간으로 전이됐던 암세포는 깨끗이 제거됐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앞으로 7번의 항암치료만 받으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축복으로 여겼다는 현재흥 씨. 통상적인 암 환자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어서 낯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암 진단=사망선고로 여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현재흥 씨 이야기 속에는 그런 절박감이 전혀 없다.
“어쩌면 그럴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암을 만든 것도 내 책임이고, 그래서 고통을 받는 것도 내 탓인데? 누굴 원망하겠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제가 처한 상황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더군요.”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삶과 죽음은 이미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 했다고 한다. 천주교 신자였던 탓에 몸이 아픈 것을 낫게 해달라는 청원기도를 하고 감사기도를 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새롭게 시작한 일도 있었다. 암에 대한 공부였다. 항암치료에 대한 정보도 얻고 영양에 대한 지식도 하나둘 섭렵해나갔다. 그러자 어렴풋이 앞으로의 투병 밑그림도 그려지더라고 말한다.
“암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 항암요법을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많았어요.? 그 당시 제가 내린 결론은 항암요법은 결코 암을 완치시키는 치료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았지만 병원에서 권하는 항암치료는 받았다. 하지만 무작정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하지는 않았다.
“항암요법을 할 때마다 혈액검사 수치를 봐가면서 제 몸 상태를 체크했어요. 5회 받을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6회를 받고나서 혈액검사를 해보니 백혈구 수치가 뚝 떨어져 있더군요.”
이것을 신호로 항암치료를 마무리한 현재흥 씨는 그로부터 일주일 뒤 집을 떠났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5년 세월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한 요양병원은 현재흥 씨 삶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건강의 큰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9년 4월, 6번의 항암치료를 마무리했을 때 현재흥 씨는 결심했다. 암은 결코 완치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걸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암을 만들었던 생활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 그것은 수많은 암 관련 서적을 읽고 내린 결론이었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요양병원행은 현재흥 씨에게 축복 같은 시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5년 동안 요양병원에 있으면서 비로소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참으로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흥 씨는 너무도 잘 안다. 그 깨달음이 오늘 누리는 이 행복을 그에게 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꼭 말하고 싶다. 널리 알리고 싶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목숨 걸고 못할 일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런 그가 5년 생존율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게 했다고 믿고 있는 지난 5년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1. 무슨 일이 있어도 9시 30분에는 잠자리에 들었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던 것은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이른바 전형적인 올빼미형이었다. 하지만 바로 바꿨다. 밤 9시 30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자 아침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개운하고 좋았다.
2.? TV, 신문, 전화와도 이별하다!
철저히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세상의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TV도 끄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TV의 전자파가 건강에 좋을 리 없을 것이며, 전화를 통해 전해지는 위로의 말도 종종 스트레스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2년 동안은 철저히 세상과 등진 삶을 살았다.
3. 완전 채식의 마니아로 살다!
암에 대한 공부를 하면 할수록 무엇을 먹고, 어떻게 먹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 그런 그가 항암 섭생법으로 선택한 방법은 완전 채식이었다. 달걀은 물론 멸치까지도 먹지 않았다. 육식을 끊은 가장 큰 이유는 육식이 활성산소를 많이 만드는 식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5년간의 먹거리는 현미잡곡밥에 육류 대신 5~6가지의 다양한 채소와 과일을 골고루 먹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4. 한 달에 한 번씩 혈액검사로 건강 체크하기
3개월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하는 정기검진과 달리 한 달에 한 번씩 꼭꼭 혈액검사를 해서 몸 상태를 체크했다. 혈액검사는 간단한 검사지만 간, 심장, 백혈구, 적혈구 수치까지 거의 대부분의 몸속 정보가 다 들어있어 건강의 중요한 지표로 삼을 수 있었다.
특히 혈액검사를 통해 각종 수치를 기록해 놓으면 뭐가 좋아졌는지, 혹은 나빠졌는지, 또 어떤 영양소가 부족한지, 혹은 넘치는지 전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5.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 6km 산책하기
많은 암 서적에서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말은 ‘누우면 죽고 걸으면 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몸을 많이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요양병원 주변에 나지막한 산도 있어 하루 산책 코스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왕복 6km를 걸었다. 천천히 걸었다. 무리하지 않고, 욕심 부리지 않고, 컨디션을 봐가면서 오전과 오후 두 차례 꼭꼭 산책을 했다.
6. 신앙심도 큰 힘이 되다!
하루도 빠짐없이 감사기도를 하고, 몸을 건강하게 해달라는 청원기도를 하면서 마음의 큰 위안을 얻었다. 뭐든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은 마음을 편하게 하는 최고의 명약이었다.
7. 사시사철 꽃을 가꾸고 식물 키우기
유난히 꽃을 좋아했던 남자! 그런 탓에 일 년 내내? 꽃치자, 사철나무, 호접란 등 각종 꽃과 식물을 키우고 가꾸는 일은 현재흥 씨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그의 방에는 늘 알싸한 꽃향기가 배어있었고, 식물이 내뿜는 피톤치드와 음이온으로 가득했다. 지극 정성으로 꽃을 가꾸고 식물을 키우면서 마음의 큰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새로운 시작점에서 다시금 ‘파이팅’
2014년 3월 현재, 현재흥 씨는 지난 5년간의 요양병원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시금 세상 속으로 나왔다. 암 완치의 기준이 되는 ‘5년 생존율’의 주인공이 되어서.
그런 그에게서 다들 듣고 싶어 한다. ‘비결이 뭐냐?’고. 그런 사람들에게 그가 해주는 말은? 하나다. “모든 병이 다 그렇듯 암 또한 잘못된 생활습관이 만든 병은 틀림없는 것 같다.”며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은 평소 절도 있는 생활을 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되도록 자연에서 얻은 깨끗한 먹거리를 먹고, 하기 싫어도 운동을 하고, 제때 자고, 제때 일어나는 지극히 평범한 건강 덕목들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지난 5년의 세월이 그에게 준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대장암을 계기로 제2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현재흥 씨. 그래서 앞으로 남은 여생은 조금 뜻깊은 삶을 살고 싶다. 봉사하는 삶, 모든 욕심을 내려놓은 삶, 매사 감사하는 삶, 내 자신도 사랑하고 남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그는 자신을 불러주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위로가 되기를 소망하고, 함께 아픔을 나누는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수많은 암 환자들에게 그의 쓰임새가 분명 있을 것이라 믿으며, 파이팅 넘치는 삶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