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이정희 기자】
【도움말 |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모자보건센터 박은영 모유은행장】
“모유가 좋다는 걸 몰라서 안 먹이나요? 젖이 나와야 먹이죠. 마음 같아선 심청이 아빠처럼 젖동냥이라도 하고 싶다니까요.”
모유가 잘 나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분유를 먹인다는 주부 김상희 씨(33세). 그녀는 모유 먹는 아기가 더 똑똑하고 건강하게 자란다는 뉴스를 볼 때면 기운이 빠진다. “선진국에는 정부 차원에서 운영하는 모유은행이 있다는데 우린 없나요?”
모유은행이 뭐예요?
엄마의 건강상태가 안 좋거나 산모 사망ㆍ입양아 등 모유를 먹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아기에게 다른 사람의 모유를 기증받아 전해주는 곳이 있다. 일명 ‘모유은행’이다. 건강한 수유 여성만이 기증할 수 있고, 저온 살균 처리하기 때문에 안전하다. 특히 미숙아나 조산아는 바이러스에 취약할 수밖에 없어 면역 기능이 우수한 모유가 절실히 필요하다. 물론 미숙아를 위한 특수 분유가 있긴 하지만 모유에 비할 수 있을까?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모자보건센터 박은영 모유은행장은 “모유는 잘 나오면 먹이고, 안 나오면 분유를 먹이면 되는 간단한 대체식품이 아니다.”며 “모유의 대체식품도 역시 모유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이런저런 속사정으로 모유 수유를 못한다. 박은영 은행장은 “모유가 좋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인데, ‘수유율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를 고민하다 모유은행을 만들게 됐다.”고 말한다.
이것이 모유은행의 설립 배경이란다. 또 있다. 암환자나 당뇨병 환자 등 면역력이 극히 낮아진 성인에게도 공급한다.
박은영 은행장은 “어떤 아기는 극소 체중 미숙아(600g)로 태어난 데다 엄마 젖도 잘 나오지 않아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은행에서 모유를 받아먹고 건강하게 자라 백일잔치까지 하고 퇴원해 정말 뿌듯했다.”며 좋아한다.
이미 세계 각국에서는 국가나 지역사회 차원에서 모유은행을 운영하고 있다. 유럽 135개소, 북미엔 모유은행협회가 있는데 미국과 캐나다는 기증받은 모유를 서로 교환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브라질엔 150개소가 있는데, 한 해 약 21만 5000리터를 저장해 매년 30만 명에게 모유를 공급하고 있다. 이 나라들은 해당 지역뿐 아니라 아프리카 기아 돕기에 보내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2007년 대학병원으로는 최초로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에서 만들었고, 현재 이를 포함해 전국 네 곳에서 운영 중이다.
기증에서 수혜까지
기증자의 조건은 출산 후 1년 미만인 수유 여성으로, 비흡연자ㆍ약물을 복용하지 않은 건강한 사람이어야 한다. 기증하려면 먼저 전화로 상담한다. 건강 상태나 라이프스타일 등을 확인한 후 이메일로 신청서를 보낸다. 이때 6개월 내 발급된 혈액검사증명서 사본을 함께 보내야 한다. 대부분 출산 전 병원에서 혈액검사를 하기 때문에 이 증명서를 갖고 있다. 접수 후 소아과, 산부인과 등 전문가들이 최종 적합 여부를 꼼꼼히 따져 심사한다. 조건에 맞아 합격하면 모유를 저장하기 위한 팩을 제공한다. 팩에 모유를 채우고 연락하면 방문 혹은 택배(착불)로 수거해간다.
기증받은 모유는 -20°C로 보관한다. 미생물 검사에서 이상이 없을 경우 62.5°C에서 30분간 저온 살균한다. 이후 다시 한 번 미생물 검사를 한다. 모든 과정에서 아무런 이상이 없으면 마지막으로 고유번호를 발급해 수혜자에게 전달한다. 박은영 은행장은 “안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며 오히려 “사설 사이트에서 개인적으로 모유를 거래하거나 아는 처지에 젖동냥을 하다간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수혜자는 한 병(180㎖)에 3천 원 정도를 부담한다. 아니, 공짜로 기증하는데 왜 돈을 받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박은영 은행장은 “사실 검사비, 인건비, 보관비, 운송비 등을 합치면 한 병당 3만 원이 넘게 드는 적자 운영이지만 현재 병원 재단 지원금을 받으며 최소한도로 책정한 금액”이라고 설명한다.
더불어 “보건복지부나 여성부 등 국가 차원에서 건강한 육아를 위해 사업을 추진한다면, 정이 많은 우리 정서상 모유를 선뜻 나누어 먹는 고귀한 사랑의 문화가 활성화되고 빠른 시일 안에 정착될 것으로 믿는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를 호소했다.
기증자와 수혜자가 말하는 남는 모유, 버리지 마세요!
▶ 모유기증자 이춘경(32세) 씨는 “유난히 젖이 많이 나왔어요. 보통 우유나 분유는 안 버리는데 그것보다 더 좋은 모유를 버리긴 너무 아까워서 기증했지요. 특별히 훌륭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모유를 못 먹는 아기가 제 기증으로 더 건강해질 것을 생각하니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요.”라며 쑥스럽게 웃는다.
그녀는 지인들에게도 “젖이 많이 나오는 건 큰 축복”이라며 아기 먹이고 남으면 일단 모아 놓고 꼭 기증하라고 권한단다. 앞으로 둘째를 가질 계획도 있는데 또 젖이 많이 나온다면 기증할 예정이다. 그런 그녀가 당부하는 말, “사실 아기를 낳은 엄마들은 정신없이 바쁘고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도 많지만 만약 모유가 남으면 버리지 말고 꼭 모유은행으로 보내서 작은 사랑을 실천해줄 것”을 당부했다.
▶ 모유수혜자 이은경(35세) 씨는 원래 모유은행 자원봉사자였다. 제왕절개를 하고 모유가 잘 안 돌아 분유를 먹여 키워야 하는 상황에서 기증받은 모유를 먹였고, 이제는 제법 본인의 모유량이 늘어 혼합해서 먹이고 있다는 그녀는 “제가 받을 줄은 몰랐어요.
모유는 분유와 비교할 가치가 없을 만큼 많이 차이가 나잖아요.”하고 고마움을 표한다. 아기가 분유를 먹을 때는 딱딱한 변을 보았는데 모유를 먹이니 더 잘 먹는 것은 물론 변도 부드러워져 효과가 확실히 다르다고 말한다. 그녀는 “모유은행이 많이 생기고 기증과 수혜 연결도 활발해져서 모든 아기가 모유를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