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박현아 기자】
【도움말 | 한국의료분쟁조정 중재원 추호경 원장】
‘마왕’ 신해철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낳은 사회적 파장이 크다. 건강하게 방송 출연과 음악 작업을 하던 사람이 장협착 수술 후 생사를 넘나들다 30대 부인, 두 자녀와 허망한 이별을 했기 때문이다. 고인이 죽음에 이른 과정은 믿기지 않을 만큼 석연찮았다. 더욱이 수술을 진행한 S병원과 의료 사고로 분쟁 중인 이들의 증언이 속속 공개되면서 여론은 K원장에 대해 완전히 등을 돌렸다. 신해철의 유족은 S병원을 경찰에 고소했고 현재 수사가 한창이다.
‘마왕’ 신해철의 죽음이 남긴 것
가수 신해철의 의료 분쟁이 특이한 경우라고 입을 모으는 사람들도 많다. 그가 유명 연예인이라 억울한 사연을 세상에 드러내 공론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동료 연예인들이 힘을 보태주면서 여론을 등에 업을 수 있었지, 평범한 사람들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일이라는 한탄이다. 이런 말이 가슴에 와닿는 것은 의료 사고를 겪어도 스스로 덮거나 묻히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의료 사고가 났을 때 속앓이만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의료 소송을 하면 무조건 환자가 진다는 생각은 고정관념이라는 것이다. 요즘은 인터넷 덕분에 의료 지식이 보편화됐고 의료 전문 변호사들도 상당수 있기 때문에 의료진의 잘못을 은폐할 수만은 없다. 종전에 비해 의사 측의 과실을 인정하는 판결도 늘고 있다.
의료 사고를 당했을 때 환자와 가족들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앞이 캄캄하다. 의료 분쟁 시 전문가 집단인 의사들과 싸워 내 억울함을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 추호경 원장은 “의료 사고가 의사 쪽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면 맨 먼저 병원으로 달려가야 한다.”며 “우선 진료기록부·간호기록부와 각종 검사 기록지·방사선 필름 등을 확보해야 한다. 이들 자료는 환자 측에서 요구하면 의료기관은 반드시 교부하게 돼 있다.”고 조언했다.
무엇보다 환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반드시 부검을 의뢰해 사인을 정확히 밝혀야 한다. 신해철의 유족 역시 당초 화장을 진행하다 사인 규명을 원하는 동료 연예인들의 요청으로 부검을 시행했다.
병원 달려가 진료기록부부터 확보하라
억울한 환자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상대방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물어 민사소송으로 손해배상청구를 하거나 형사고소를 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민사소송은 피해자 입장에서 선뜻 나서기 쉽지 않다. 변호사 비용, 감정비, 송달료 등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도 적지 않게 걸리기 때문이다. 1심만도 평균 26.3개월이 걸린다.
형사고소도 만능은 아니다. 서로 감정만 악화되고 엄격한 증거법이 적용돼 오히려 환자 쪽에 불리하다는 지적도 있다.
의무기록지 발행은 의료사고 피해자나 유족에게 법적으로 보장돼 있어 신속한 확보가 가능하나 CCTV나 수술영상 등은 법원에 증거보전신청을 하지 않는 이상 확보할 수 없다. 문제는 법원의 증거보전절차를 거치면 신속하게 증거자료를 확보할 수 없고 그 사이 병원은 불리한 증거 자료를 폐기하거나 위조, 변조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경찰이 병원에 대한 압수수색을 신속히 시행해 주요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해철의 경우는 이례적이다. 부인 윤원희 씨가 S병원을 형사고소한 다음날 오전에 송파경찰서가 S병원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경찰이 의료사고와 관련해 병원을 압수수색한 건 매우 드문 일이다. 유명 연예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사회문제로 비화했고, 이를 S병원의 의료 과실로 보는 국민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형사고소 경험이 있는 대다수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경찰이 대한의사협회에 감정 촉탁해 받은 결과에 불만을 토로한다. 의사협회 감정 결과는 검사의 기소 여부나 판사의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상당수가 의료인에게 유리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의료사고 피해자가 경찰에 형사고소를 하면 수사관은 고소인과 피의자인 의료인을 차례로 불러 진술을 듣는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대한의사협회에 감정 촉탁해 받은 결과로 대부분 무혐의 불기소 처분을 하는 것이 공식화된 관행”이라고 비판했다.
왜 그럴까? 형사사건 감정 결과는 민사소송과 달리 동료 의료인에 대한 형사처벌로 이어질 수 있고 감정하는 의료인에 대한 외부 감시 기능이 전혀 없다. 그래서 “가재는 게편”이듯 의료인이 동료 의료인에게 불리한 감정을 하기 힘들다. 이런 이유로 의료 사고 형사사건은 검사의 기소율이 매우 낮다.
신해철과 S병원의 의료 분쟁 이후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존재가 일반에 널리 알려졌다. 경찰이 의료사고 감정 촉탁을 대한의사협회뿐 아니라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도 하도록 강력히 요구하라고 환자단체들이 신해철의 유족에게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다.
안기종 대표는 “제대로 진상 규명을 하려면 무엇보다 의료감정 결과가 중요하다. 경찰이 감정촉탁을 의사들로만 구성된 대한의사협회뿐만 아니라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의료분쟁조정중재원 도움 받아라
의료 사고가 나면 일단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상담을 받는 게 좋다. 의료분쟁조정법에 따라 정확한 감정과 공정한 조정으로 의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2012년 4월 출범한 보건복지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전문상담사로부터 상담을 받고 법적 구제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자료를 갖춰 조정 신청을 하면 된다. 조정 신청을 하려면 소액의 수수료만 내면 된다. 별도의 감정비나 송달료는 받지 않는다.
이후 의료인, 법조인, 소비자권익위원 등 5인으로 구성된 감정부에서 감정을 하고 이를 기초로 조정부에 조정을 해준다. 조정부도 의료인, 법조인, 소비자권익위원, 대학교수 등 5인으로 짜여 있다. 기간은 90일(1회 연장 시 120일)밖에 걸리지 않는다.
의료인의 과실 유무가 밝혀져도 손해배상액은 환자와 의료인의 의견이 다르다. 합의가 끝내 안 되면 과실의 정도, 환자의 체질적 소인, 상실된 소득액, 향후 치료비 등을 종합해 합리적 액수를 산출한다. 다만 환자가 과거에 경험한 질병이나 체질적 소인 등을 고려하기 때문에 환자 쪽에서 생각하는 손해액을 모두 배상받기는 어렵다.
2012년 4월 출범 후부터 2014년 10월 말까지 합의되거나 조정 결정된 사건 955건 중 500만 원 미만으로 조정된 사건은 609건으로 63.7%에 이른다. 이 가운데는 배상액이 0원인데도 환자 측이 이해하고 조정이 된 사건도 있고, 의사의 과실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감정 결과가 나왔지만 환자에게 위로금을 주고 합의한 경우도 있다.
추호경 원장은 “조정 절차가 진행된 사건은 10건 중 9건이 조정 성립으로 마무리된다. 감정 절차에 비의료인이 다수 참여해 공정성이 담보되고 조정 절차도 빠르게 진행돼 비용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며 “민사소송이나 형사고소보다 우선 조정 신청을 하는 것이 편리하고 경제적”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법적인 한계는 분명 있다. 우선 피신청인인 의료기관이 조정 절차에 참여하겠다고 동의를 해야만 조정 절차가 진행되고, 조정 결정을 하더라도 신청인·피신청인 어느 한 쪽이라도 동의하지 않으면 집행력이 생기지 않는다. 그래서 합의나 조정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바로 법원으로 가고, 의료인에 대한 형사 처벌을 원할 경우 형사고소를 진행한다. 소비자 피해 구제를 해주는 한국소비자원을 찾는 이들도 많다. 한국소비자원 역시 의료 분쟁 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이다.
추호경 원장은 서울지검 형사1부장검사, 대전지검 천안지청장,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입법심의관, 법률사무소 바로 대표변호사, 보건복지부 건강보험분쟁조정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현재 대한의료법학회 고문. 대통령표창,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