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허미숙 기자】
“환자 보며, 소설 쓰며 기사회생했어요”
통영의 수재로 꼽혔던 사람! 가톨릭의대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꿈도 있었고 야망도 컸다. 그런데 누가 시샘이라도 한 걸까? 그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쓰라진 좌절부터 맛봐야 했다. 건강 때문이었다. 건강이 발목을 잡으면서부터였다.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시절, B형 간염 보균자로 밝혀졌다. 군의관 시절, 간경변으로 진행됐다는 결과를 통보받고 의병제대를 해야 했다. 너무도 젊은 나이 20대 끝자락에서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려던 한 젊은이는 꿈을 접어야 했다. 야망도 버려야 했다. 고향으로 낙향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 또다시 생사의 갈림길에 서야 했다. 이번에는 암이었다. 이름도 생소한 편도선암이었다. 그래서 너무도 가혹한 운명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사람! 경남 통영에서 성모의원을 하고 있는 유문두 원장(56세)이 바로 그다.
그런 그가 지금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시련도 거뜬히 이겨내고 그 와중에 장장 12권의 방대한 장편소설 <귀향>까지 써내는 괴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명 ‘소설 쓰는 의사’로 불리며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데 그 저력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걸까?
하루하루 죽음을 생각했던 사람
너무도 젊은 나이에 B형 간염 보균자!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왜 하필 내게?’ 원망도 많았다. 설상가상 이미 간경변까지 진행된 몸!
두려웠다. 30대 초반에 이런 병에 걸렸다는 게 너무도 억울했다. 희망은 꺾였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초침 소리에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배가 불러올 것이고, 복수가 찰 것이고, 식도정맥류가 터져 결국 생사의 갈림길에 서야 한다는 걸.
그래서 모든 걸 포기하고 고향인 경남 통영의 작은 섬 한산도로 숨어들었던 유문두 원장.
”하지만 그렇게 죽을 운명은 아니었나 봐요. 한동안 마음을 못 잡고 방황하다가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자며 관리를 하자 서서히 몸이 좋아지기 시작했으니까요.”
먹는 것부터 가려먹기 시작했다. 운동도 시작했고, 술, 담배도 끊었다. 간에 무리를 주는 생활은 철저히 차단했다. 그가 알고 있는 의학지식은 총동원됐고, 철두철미하게 실천했다.
가려야 할 것 많고 제약도 많은 생활! 스트레스도 많았다. 사는 재미도 없었다. 그래도 죽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어느덧 건강한 생활습관은 그의 일상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건 건강이었다. 몸이 좋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통영 시내에 조그마한 의원도 개원했다. 1991년 성모의원을 개원하고 감기부터 관절염까지 1차 의료기관을 담당하면서 새로운 행보를 시작했다. 그가 원래 꿈꾸었던 삶…의료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2007년 4월, 또다시 닥친 시련
비록 간경변이라는 덫에 갇혀 살긴 했지만 의료인으로 사는 하루하루는 유문두 원장에게 기쁨이었다. 보람도 컸고, 재미도 있었다.
그렇게 십수 년이 흐르는 사이 다행히 그의 간경변도 더 이상 태클을 걸지 않았다. 그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감도 생겼다. 하루하루 관리만 잘하자 생각했다.
하지만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가 보다. 때로는 가혹하리만치 모질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가 보다.
2007년 4월, 유문두 원장은 깜짝 놀랐다. 음식을 삼키는 데 이물감이 느껴졌다. ‘왜일까?’ 입안을 거울에 비쳐보았다. 그런데 오른쪽 편도에 혹 같은 것이 보였다.
그래서 찾게 된 이비인후과에서는 양성혹 같다면서 레이저로 제거를 해주었다. 그렇게 편도에 생긴 혹은 아주 쉽게 일단락됐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그로부터 두 달 뒤, 거울을 보던 유문두 원장은 아연실색했다. 오른쪽 목에 혹이 불룩 나와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혹이었다.
“아차 싶었어요. 임파선이 부은 거였어요. 만지면 아프지는 않았지만 느낌이 아주 안 좋았어요.”
부랴부랴 서울 대학병원에 있는 친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빨리 오라.”는 말뿐이었다. 그 후의 일은 마치 꿈속 같다.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조직검사를 하고 편도 악성종양이라는 판정이 나오고….
하루아침에 믿을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양성혹이라고 제거했던 편도선의 혹이 사실은 악성종양이었던 것이다. 2개월 만에 암세포는 인두를 통해 후두까지 자라나 있었고, 그 크기는 소시지만 했다. 그래서 목에 혹이 생겼던 거였다.
유문두 원장은 절망했다. 간경변에 암까지…한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치고는 너무 가혹하다 싶었다. 자꾸만 발목을 잡는 건강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원망, 분노, 두려움까지 온갖 감정의 뒤엉킴 속에서 그나마 위로가 됐던 것은 빨리 발견돼 수술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아내의 지극 정성, 8년의 기적 만들다
장장 10시간에 걸친 수술! 오른쪽 림프절과 편도를 제거하는 수술을 단행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수술 후 조직검사 결과 림프절에서만 암세포가 발견됐고, 다른 데는 전이가 되지 않은 걸로 밝혀졌다. 그래서 방사선 25회만 처방 받았다.
그래서일까? 암 수술 후 3개월 만에 유문두 원장은 다시금 의사의 본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비록 목은 퉁퉁 부은 채였고, 방사선 치료 후유증으로 얼굴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진료에 나섰다. 아파서 찾아온 환자들이 오히려 “괜찮냐?”며 걱정할 정도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쩌면 살아갈 날이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간경변에 편도선암까지…비록 수술로 암세포를 제거하긴 했지만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는 것이 암이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시한부 삶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앞으로 5년 정도만 살 수 있었으면 했어요.”
그랬던 유문두 원장은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이제는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유명인사도 됐다. 그 노하우는 과연 뭐였을까?
1 철저한 항암식이요법 실천하기
암 수술 후 5년 생존을 넘어 8년 생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아내 덕분이라고 말문을 여는 유문두 원장! 그를 살린 8할은 아내의 지극정성 때문이었다고 믿고 있다.
오로지 남편 건강을 위해 하루 25시를 살아낸 아내였다. 지난 8년간 그래왔고,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런 아내가 그를 위해 정성을 다해 만들어준 항암식이요법은 다음과 같다.
● 야채스프 3회 먹기 : 뿌리채소인 우엉, 당근, 무청, 표고버섯, 무 달인 물을 하루 3번 식간에 마셨다.
● 현미차 3회 먹기 : 현미를 볶아서 물을 붓고 만든 현미차도 하루 3번 마셨다.
● 아침에는 고구마죽 쑤어서 먹기 : 고구마에는 식이섬유도 많고 알칼리성 식품이어서 암 환자에게는 좋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고구마에 현미를 갈아서 넣고 죽으로 끓여 고구마가 익으면 여기에 양송이버섯+브로콜리+당근+양파를 잘게 썰어 넣어서 먹었다.
● 늘 과일과 견과류 적당량 먹기
●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마다 대추 생강 달인 물 먹기 : 대추+생강+수세미+배를 함께 넣고 달인 물을 하루 3번 먹었다. 면역력을 높여줘 감기에 강한 몸으로 만들어주고 몸도 따뜻하게 해주는 효과가 크다. 특히 독소 배출에도 도움이 돼 환절기마다 아내가 꼭 만들어주는 것이다.
● 점심은 아내표 정성 도시락으로~ : 현미밥과 제철 식재료로 만든 도시락, 화학조미료 대신 천연양념으로 맛을 낸 도시락, 간이 세지 않아 몸이 절로 가벼워지는 아내표 정성 도시락을 먹으며 건강을 챙겼다.
● 붉은살 육류는 피하고 닭가슴살이나 콩으로 단백질 섭취하기 : 검정콩을 삶아서 먹고, 노란콩은 두유로 만들어 즐겨 먹었다. 메주콩을 삶아서 믹서기로 갈아서 먹으면 그것이 바로 두유다. 청국장도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었다.
● 마늘 구워 먹기 : 항암효과가 큰 마늘도 즐겨 먹었다. 뚝배기 같은 그릇에 넣고 약한 불에서 15분 정도 구워서 먹었다. 껍질째 한통을 구워서 하루 3통씩 먹었다. 굽게 되면 매운 성분이 없어져서 속이 쓰리지 않아서 좋았다. 특히 마늘은 항암효과뿐 아니라 몸의 독소 배출에도 도움이 되고 덜 피곤하고 혈액이 좋아지고 피로회복에도 큰 도움이 됐다.
● 마른 명태 활용하기 : 3시간 정도 푹 고아서 그 국물을 마셨다. 해독작용이 뛰어나서 몸속 독소배출에 도움이 됐다.
이렇게 일일이 열거해놓고 보니 혀를 내두를 정도다.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는 질문에 옆에 있던 그의 아내는 “꼭 나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큰 반찬으로 삼아 즐겁게 했고 사랑으로 했다.”고 말한다.
2 텃밭 가꾸며 일하고, 수시로 운동하기
밤 10시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잠자리에 들고 새벽 4시에는 어김없이 일어난다는 유문두 원장. 그런 생활이 벌써 8년째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서 하는 일도 재미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라디오 프로그램 <세월따라 노래따라>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를 한 시간 동안 따라 부른다. 30분 정도 영어공부도 한다. 그런 다음 상추, 오이, 고추, 배추 등 취미 삼아 가꾸는 텃밭에서 땅도 일구고 잡초도 뽑고…농사일을 한다. 1~2시간 정도 한다. 닭도 10마리 방사해서 키운다. 그렇게 매일 아침 운동을 하고 나면 밥맛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고 한다.
주말이나 일요일에는 등산을 하거나 바닷가로 놀러가는 등 조금은 색다른 운동을 하되 절대 힘들지 않게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3 환자 보는 틈틈이 소설 쓰기
편도선암 수술을 한 직후부터였다. 앞으로 살날을 5년 정도로 잡았다. 그런데 이대로 죽을 순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살았던 성장기를 글로 써보자.’
그래서 두서없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도 일어났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잡념이 생기지 않아 좋았다. 여전히 목은 퉁퉁 부어있고, 얼굴은 새까맣고…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거짓말처럼 그런 잡념들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썼다. 일요일도 나와서 썼다.
그러다 문득 자서전보다는 좀 더 재미있게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허구를 섞어서 소설형식으로 쓰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 너무 커져버렸다. 장장 8년에 걸쳐, 원고지 2만 장에 이르는 12권짜리 대하소설을 써냈던 것이다. 1943년도부터 2009년까지 굵직굵직한 시대적 사건이 총망라돼 있는 자전적 소설을 써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 <귀향>이라는 제목으로 출판이 돼 있다.
2014년 11월 현재,?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나날들
오늘도 여전히 환자 보는 틈틈이 소설을 쓰는 유문두 원장! ‘소설은 나를 살린 구세주’라 믿고 있기에 소설에 대한 그의 열정은 뜨겁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신문을 정독하며 새로운 작품도 구상한다. 최근에는 새로운 신작 <임신夫>라는 소설까지 발표했다. 엄마가 되고 싶은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의학소설인데, 겁 없는 신인작가의 저력이 무섭게 느껴질 정도다.
건강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태다. 수술하고 난 뒤 편도선은 아무런 말썽을 일으키지 않고 있고, 간경변도 예전의 상태 그대로여서 6개월마다 체크만 한다.
그래서 유문두 원장에게 암은 전화위복의 변곡점이다. 새 삶을 살게 된 계기가 됐다. 오늘을 더 열심히 살게 했고, 하루하루를 더 즐겁게 살게 했다.
그래서 유문두 원장은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싶다. 이미 시작한 일도 있다. 소설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모아 북한어린이들에게 B형 간염 예방접종을 해줄 생각이다.
그 꿈을 위해 유문두 원장은 오늘도 더 열심히 소설을 쓰고, 더 열심히 환자를 보며 하루하루 생애 최고의 시간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