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이은혜 기자】
무덥던 지난 8월 어느 날, 수원에서 만난 홍경숙 씨(64세)는 얼굴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프리카 우간다로 봉사활동을 다녀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했다. 예순이 넘은 나이, 게다가 유방암 수술을 했다고 들었는데 아프리카 오지까지 봉사활동? 놀라워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그 정도는 아직 끄떡없어요.” 좀체 헤어나기 힘든 암의 굴레에서 거뜬히 벗어나 누구보다 의욕적인 삶을 살고 있는 홍경숙 씨의 지난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업부도, 그리고 암
1997년 터진 IMF 파고는 홍경숙 씨 삶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수원에서 포목점을 운영했던 그녀는 IMF로 모든 것을 잃었다. 사업부도라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상황에서 불현 듯 신학 공부를 시작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운명처럼 느껴진다.
한때 전도사가 되고 싶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멀어진 꿈이었다. 홍경숙 씨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닥치자 하나님의 종으로 살지 못한 것이 너무도 후회스러웠다.”며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롭게 신학교에 진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그랬던 선택은 홍경숙 씨 인생을 새롭게 변모시켜 놓기에 충분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거듭났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로 본격적인 행보도 시작했다.
그런데 호사다마였을까? 전도사로 의욕적인 행보를 내딛기 시작한 2005년 6월 어느 날, 샤워를 하던 중 깜짝 놀랐다. 가슴에서 만져지는 몽우리!
“설마? 하면서 건강검진을 했는데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더군요.”
그 후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신의 축복처럼 여겨진다. 조직검사 결과 유방암이라고 했다. 2기 유방암이라고 했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막막했다. 사업부도로 모든 것을 잃은 상태였다. 수술비 마련은 꿈도 못 꿀 형편이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2005년 6월 유방암 진단을 받고, 8월에 유방암 수술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병문안 와서 하나둘 주고 간 봉투에서 수술비가 나왔고, 몇 달을 기다려야 한다던 수술 일정도 곧바로 잡혔던 것이다.
홍경숙 씨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결과였다.”고 말한다. “유방암도 하나님이 뜻한 바가 있어서 주어진 시련이라고 여기니 전혀 두렵지 않았다.”고 말한다.
찬양율동 하면서 항암, 방사선도 수월하게~
2005년 8월 27일, 수술에서 막 깨어났을 때 홍경숙 씨는 의사로부터 “암세포 크기는 3.75cm 였고, 다행히 전이는 안 됐으며, 부분절제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녀는 찬양율동부터 했다고 한다. 마취에서 덜 풀려 팔조차 들기 힘들었지만 누운 채 팔을 들어 올려 율동을 하며 감사기도를 올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찬양율동은 항암 6회, 방사선 33회도 거뜬히 이겨내는 비밀병기가 되어주었다고 말한다. 무슨 뜻일까?
“아무리 센 척해도 항암 6회, 방사선 33회를 받는 동안 초주검이 되는 것은 저 또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먹으면 토하고 기력 없고, 입안이 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정해진 기간에 모든 치료를 끝마칠 수 있었다. 홍경숙 씨는 그 비결을 “찬양율동을 날마다 꾸준히 한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조금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는 찬양율동은 춤과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말한다.
홍경숙 씨는 “매일 감사 기도를 하면서 찬양율동을 했더니 물리치료가 필요 없었다.”고 말한다. 유방암 수술을 하면 팔조차 제대로 올릴 수 없어 방사선 치료를 받으려면 반드시 물리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찬양율동 덕분에 수월하게 방사선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노인선교, 세계선교는 나의 임무
다들 암 수술을 받으면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산다. 기침만 나와도 혹시 재발한 건 아닐까? 머리가 아파도 혹시 잘못된 건 아닐까? 노심초사한다. 홍경숙 씨도 그랬을까?
“항암과 방사선 치료가 끝나고 병원에서 이제 안심해도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계시처럼 영감을 준 단어가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노인선교, 세계선교라는 단어였어요.”
재발의 두려움 같은 건 느낄 겨를도 없었다. 곧바로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선교활동에 나섰고,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전도활동도 매진했다.
그렇게 봉사하는 삶을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로 여겼다고 한다. 그 일을 보다 더 잘하기 위해 웃음치료 자격증도 땄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율동과 웃음치료로 가는 곳마다 열렬한 호응을 받으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암 수술 후 5년이 지났다는 통보도 들었다. 2010년, 5년 암 생존자에 그녀의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그 여세를 몰아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는 기염까지 토했던 홍경숙 씨! 작은 교회에서 사랑으로 이웃을 돌보고, 봉사하는 목사로 살고 싶어 했던 그녀는 2017년 3월 목사 안수를 받기도 했다.
아직도 홍삼진액 만들어주는 남편 ‘고마워’
암 수술 후 목사 임직식까지… 숨가쁘게 달려온 홍경숙 씨는 지금 이 시간에도 그녀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두 팔 걷어붙이고 열심이다. 노인대학도 가고 요양원에도 간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 각지를 다니며 선교 활동에 매진 중이다. 일본도 가고 캄보디아도 가고 우간다도 갔다 왔다. 어디든 그녀를 부르는 곳이 있으면 한걸음에 달려가 찬양율동을 하면서 봉사활동을 펼친다. 나이도 아랑곳없이. 건강은 괜찮을까?
“오히려 암 수술 후 더 건강해진 느낌이에요. 봉사활동을 하고 찬양율동을 하면서 항상 기쁨이 넘치고 즐겁게 살기 때문입니다.”
특히 남편에게는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한다. 암 수술 후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결같이 그녀 건강을 위해 손수 챙겨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홍삼원액입니다. 항암치료가 끝난 뒤부터 만들어 주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도 손수 만들어 줍니다.”
그 정성은 말로 다 못한다. 홍삼이 좋다는 말을 듣고 강화도로 직접 가서 수삼을 사다가 쪄서 말려서 홍삼원액으로 만들어주기 시작한 것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말린 홍삼에다 오가피, 감초, 대추, 헛개나무 등을 넣고 3일간 달여서 홍삼원액으로 만들어 팩에 넣어서 줍니다.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해주는 남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요.”
요즘도 하루 두 팩씩 남편의 정성을 생각하며 빠뜨리지 않고 먹으려고 노력한다는 홍경숙 씨!
무뚝뚝한 남편이 운동하라며 백화점에 가서 등산복 세트를 사준 것도 잊지 못하고 있는 그녀는 암으로 인해 오히려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됐다고 좋아한다. 남편도 변했고 신앙심도 깊어지고…그래서 암은 그녀에게 축복이 됐다고 말한다.
그런 그녀가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전한 메시지는 하나다. 살아있는 오늘 최대한 열심히 살고 기쁘게 살자는 당부다. 어차피 유한한 삶, 최선을 다해 살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신앙인으로서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찬양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