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조아름 기자】
우리나라 의료계의 불편한 진실을 날선 시각으로 그려낸 영화 <하얀정글>.
미국 영화 <식코>(미국의 의료보험제도를 꼬집은 영화)와 비교되며, 우리 사회에 또 하나의 화두를 던지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영화를 만든 주인공이 예사롭지 않다. 현직 의사다. 의사가 영화를 만들어?
모두의 궁금증일 것이다. 어찌 보면 자신의 치부일 수 있는 문제를 신랄하게 고발하고 나선 용기도 새삼 부럽다. “이제 돈이 아니라 환자를 치료하고 싶습니다.”라는 다소 자아성찰적인 문구의 영화 포스터 앞에서 수줍게 미소 짓는 송윤희 감독. 그녀의 영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얼마 전까지 한미 FTA와 함께 의료 민영화에 대한 괴담이 떠돌았다. 그 괴담의 대표격은 “맹장수술 900만 원”이야기다. “의료 민영화가 된다고 해서 무슨 맹장 수술이 900만 원이나 해?”라며 코웃음 치고 넘길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괴담이 떠돈다는 것은 의료 민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걱정과 불안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의료 민영화로 수면 밑으로 가라앉은 의료산업의 자본 추구 논리가 그나마 지켜온 의료의 공공성마저 뿌리째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생명과 직결되는 ‘의료행위’가 돈으로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건강권이 침해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당신은 얼마짜리 환자입니까?
아직도 단돈 몇 푼에 치료를 주저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아프면 죄다.”라는 우스갯소리는 그저 웃어넘겨 버릴 수 없다. 송윤희 감독은 산업의학과 현직의사로 그러한 현실을 몸소 느꼈다.
“돈 몇 만 원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환자들을 같은 의사인 남편을 통해 만났어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데, 현실은 점점 자본주의 논리로 나아 가는 것은 분명 문제라고 생각해서 이런 영화를 만들게 되었어요. 우리나라 의료수준은 선진국 수준인데, 아직도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많아요. 이것은 분명 문제라고 생각해요.”
의료는 아무래도 전문 분야이다 보니 일반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 속을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다. 영화 <하얀정글>은 송윤희 감독이기에 가능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의대 시절부터 영화 만드는 작업에 관심을 가지고 배웠어요. 휴학을 하고 독립영화 워크숍에 참여하기도 했죠. 당시 짧은 단편영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장편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죠.”
돈 없는데 아프면 죄지!
송윤희 감독의 영화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척추관협착증으로 굽은 허리를 평생 안고 살아가는 이 모 할머니와 뇌질환을 앓고 있는 그 아들, 돈이 없어 치료를 거부당한 기억은 할머니의 눈시울을 적신다.
당뇨를 앓고 있지만 돈 몇 만 원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 모 할아버지. 3차 의료병원은 그를 거부했다.
또 백혈병 골수이식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가족들을 위해 수술을 포기한 박 모 씨. 다행히 항암치료만으로 병이 나았지만, 부당 청구된 치료비를 병원측에 따지자 “앞으로 이 병원에 오지 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르포(고발성) 다큐의 특성상 실제 사람들이 나와 증언을 하기 때문에 섭외 과정이나 인터뷰 등이 참 힘들었어요. 영화의 취지를 말씀 드리고 공감하는 분들이 참여를 해 주셨지만, 더러 자신이 이용만 당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분들도 있었거든요.”
그렇다면 이런 의료 문제는 왜 생기게 된 것일까? 송윤희 감독은 정부의 공공의료보험체계를 꼬집는다.
“물론 건강보험이라는 공공의 재정이 있지만, 우리 사회에 공급되는 의료 서비스의 90% 정도는 민간이에요. 이 정도로까지 민간 의료에 의존하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어요. OECD 국가들은 평균 70% 정도를 공공으로 지출하고 있어요. 공공의료가 무너진 미국도 70%만이 민간이에요. 공공의료체계가 약하다 보니 이러한 문제점들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죠. 그런데 여기에 민영화 추진까지, 의료만큼은 시장원리를 배제시켜야 해요.”
병원은 약육강식이 존재하는 하나의 정글
병원 역시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경쟁한다. 그리고 살아남거나 혹은 도태된다. 그래서 병원은 정글 자체다.
“길거리에서 병원 광고를 보는 것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잖아요. 언제부턴가 즐비해진 병원 광고들, 점점 몸집을 불려나가는 대형 병원들, 경쟁적으로 들여놓는 수십 억 원의 최첨단 장비들, 그리고 30초 진료. 의사들끼리의 경쟁을 부추기고, 환자를 점점 돈으로 보게끔 내모는 시스템.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의사들도 국민들도 생각해 봐야죠.”
그래서 만들게 된 것이 <하얀정글>이었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의료계의 현실을 수위 높게 고발하고 있다.
그런데 조금 걱정스럽다. 송윤희 감독 역시 현직 의사 아닌가?
같은 의사 동료들로부터 적잖은 비난, 혹은 시달림을 받았음직도 한데, 돌아오는 대답은 다소 의외다.
“유유상종이라더니, 제 주변에는 저랑 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만 있나 봐요. 이런 문제의식이 필요하다고 공감해 주는 분들이 많았어요. 오히려 이런 이야기를 끄집어내 고맙다는 개원가 의사를 만난 적도 있어요. 하지만 분명 이러한 시각을 불편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영화 초반에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는 손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손이 천장을 뚫어 물이 콸콸 나오게 한다. 의료가 하나의 산업이 되어가는 현실에서 그저 미비한 의료 혜택을 바라기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의료권을 추구하자는 송윤희 감독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외로운 외침
송윤희 감독은 의료 민영화를 반대한다. 그리고 그런 송윤희 감독의 마음이 <하얀 정글>이라는 영화 한 편에 오롯이 담겼다. 투박하지만, 진정성이 돋보인다.
“지금의 의료 시장은 너무 치열해요. 돈을 쫓고 있기 때문이죠. 여기에서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돈 없는 서민들이에요. 이 영화 한 편이 세상을 크게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의 의료 현실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고, 의료 분야가 자본주의 논리를 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생각해볼 여지는 던져줬다고 생각해요. 누구나 아플 수 있잖아요. 그건 당신도 나도 예외가 아니에요.”
비록 작은 체구에서 나온 작은 목소리였지만 송윤희 감독의 마지막 말은 오래오래 긴 여운을 남기며 귓전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