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허미숙 기자】
처음에는 거절했다. 햇빛 좋은 날에는 운동을 해야 해서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끈질지게 매달리자 “그럼 비오는 날 오라.”고 했다. 비오는 날은 운동 스케줄을 잡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2018년 3월 8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 덕에 겨우겨우 만날 수 있었던 사람! 세종특별자치시에 사는 김병우 씨(75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직장암을 이겨내고 10년째 장기 생존하고 있는 그는 암 환우들 사이에서 희망의 아이콘이 되고 있는 사람이다. 비결이 뭘까? 궁금하여 만나봤다.
2008년 12월에 느닷없이…
아무런 조짐도 없었다. 2008년 12월, 2년마다 하는 건강검진에서 “직장암 같다.”면서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설마’ 했다.”고 한다.
결과는 참담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직장암 진단을 받았다. 10년 이상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동안 왜 발견하지 못했는지 의사도 안타까워했다.
그 후의 일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곧바로 수술 일정이 잡히고, 담당의사는 말했다. 장루를 달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 당시의 심경을 묻자 김병우 씨는 “거대한 절벽 앞에 선 기분이 들더라.”고 말한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은 장루를 달지 않아도 됐다는 점이다. 하지만 수술 후 담당의사로부터 들은 말은 충격이었다. “조직검사 결과 직장암 3기 b였고, 림프절로 전이가 된 상태”라고 했던 것이다.
장장 9개월 동안 초주검이 되면서까지 항암치료를 받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항암치료가 끝나자마자 거동조차 힘든 몸으로 캠핑카에 텐트를 싣고 집을 나선 것도 그 때문이었다. 캠핑카가 처음 선보였을 때 덜컥 구입했던 것이 그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 몰랐었다.
김병우 씨는 “암 수술을 하고, 독한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내내 든 생각은 유난히 술과 스테이크를 좋아했던 생활이 직장암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후회였다.”며 “암을 만든 기존의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캠핑카를 끌고 길을 나섰다.”고 말한다.
겨울에는 남쪽으로~ 여름에는 북쪽으로~
항암치료 후 거동조차 힘든 몸으로 캠핑카를 몰고 훌훌 떠난 길!
아내와 함께였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눈에 밟혔지만 모질게 마음먹었다고 한다. 김병우 씨는 “내가 살려면 기존의 삶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야 재발을 막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다. 행선지도 정해놓지 않고 길을 나섰다. 발길 닿는 대로였다. 길을 가다가 경치가 좋으면 그곳에 텐트를 치고 1박도 하고 2박도 했다. 강원도 오대산에서 통영의 사량도까지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속초 야영장, 고성 야영장, 고창 선운사 야영장, 운곡 저수지 등 전국 방방곡곡 안 가본 데가 없다. 추울 때는 남쪽으로 향했고, 더울 때는 북쪽으로 길을 잡았다고 한다.
먹거리는 어떻게 해결했을까? 이 물음에 김병우 씨는 “볶은 곡식을 먹으면서 산과 들에서 나는 야생초를 반찬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볶은 곡식은 그가 암 진단을 받기 훨씬 이전에 캠핑카를 끌고 전국을 다닐 때 우연히 알게 된 건강법이었다. 볶은 곡식을 먹고 야외에서 잠을 자는 ‘야박’을 하면서 암을 이겨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김병우 씨는 “캠핑카에 텐트를 싣고 떠나면서 챙긴 것은 볶은 곡식과 소금뿐이었다.”며 “아내 덕분에 산과 들에서 나는 야생초와 산야초로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날마다 산과 들에서 씀바귀를 캐고 냉이를 캐고 쑥을 뜯었던 아내였다. 도라지도 캐고 고사리도 꺾고 뚱딴지도 캐서 먹었다. 겨울 바닷가에서는 파래를 뜯었다. 대부분의 먹을거리를 자연에서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겨울에도 문제없었다. 따뜻한 남쪽지방에서는 겨울에도 씀바귀며, 냉이며, 곰보배추를 채취할 수 있었다.
그런 생활을 한 지 3년 정도 흘렀을 때였다. 1년마다 하는 정기 체크를 위해 병원을 찾았던 김병우 씨는 담당의사로부터 뜻밖의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수술할 당시 살 확률이 10%밖에 안 됐는데 이제는 좀 안심단계로 들어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림프절 전이는 됐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야생생활을 했는지도 모른다. 전국을 유랑하듯 다녔다고 한다. 자연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살았다고 한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집을 떠난 지 5년 만에 김병우 씨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5년 암 생존자로 분류되면서였다.
김병우 씨는 “이 모두가 아내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 힘든 야생생활을 불평 한 마디 없이 헌신적으로 같이 해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 고마움은 죽을 때까지 뼈를 갈아서 갚아도 다 못 갚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그의 아내 이순선 씨(68세)는 “독한 항암치료로 강철 같았던 사람이 초주검이 되었을 때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며 “다시금 건강해진 것만으로도 최고의 선물이 됐다.”고 말한다.
2018년 3월 현재 김병우 씨는…
5년 암 생존자가 되면서 5년간의 야생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김병우 씨!
그로부터 또 5년이 지난 2018년 3월, 비오는 날 세종특별시에서 만난 그는 길게 자란 하얀 머리를 뒤로 넘겨 묶었고, 길게 자란 하얀 눈썹도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그런 그에게 물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이 물음에 김병우 씨는 “조금 해이해졌지만 또 다시 병원에 가서 드러눕지 않기 위해 날마다 운동을 하고 먹거리도 신경을 쓰는 편”이라고 말한다.
1. 세끼 식사는 균형식으로 먹기
먹거리의 중요성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먹느냐에 따라 암이 생기기도 하고 암이 낫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끼 식사는 일정한 규칙을 정해놓고 먹는다. 아침은 고구마, 감자, 마, 토란 등 뿌리채소 위주로 먹되 토마토, 견과류, 전복 하나를 곁들이는 식이다.
점심 한 끼는 잡곡밥과 다양한 잎채소를 먹고, 저녁은 팥죽이나 샐러드로 간단하게 먹는다.
이 같은 식생활 지침은 전적으로 그의 아내 덕분이다. 김병우 씨는 “지금도 여전히 아내는 항암식품이라는 말만 들어도 꼭 식탁에 올린다.”며 “10년째 장기 생존하고 있는 것도 전적으로 아내 덕분”이라고 말한다.
2. 날마다 자전거 타고 전국 구석구석 누비기
김병우 씨 집에는 자전거방이 있다. 자전거 3대가 방 한 칸을 차지하고 있다. 그 언저리에는 메달도 여러 개 진열돼 있다. 행정안전부에서 주는 그랜드슬램도 3개나 있다. 자전거로 국토종주를 3번이나 완주해 받은 메달이라고 한다. 자전거로 4대강을 종주해서 받은 메달도 여러 개다.
야생생활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타기 시작한 자전거는 지금 김병우 씨에게 둘도 없는 친구다. 아침을 먹고 나면 날마다 나가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 아내와 함께 달린다. 자전거를 탈 줄 몰랐던 그의 아내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팔도 부러져가면서 자전거를 배워 지금은 전문가가 됐다.
아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세종시 구석구석을 돌기도 하고 부여로 조치원으로 청주로 군산으로 원정길에 오르기도 한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운동기구가 보이면 운동도 하고 사진도 찍는다. 눈비 오는 날만 아니면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린다고 말하는 김병우 씨는 “자전거를 즐겨 타면서 하체의 근육도 튼튼해졌고, 잡념도 생기지 않아 좋다.”고 말한다.
살려면 바깥으로 나가라!
김병우 씨가 암 환우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거동조차 힘들어도 밖으로 나가서 엉금엉금 기어야 하고 걸어야 한다고 권한다.
생존율 10%에서 10년째 장기 생존하고 있는 비결은 누가 뭐래도 모든 걸 버리고 훌훌 떠나 전국을 유랑하면서 끊임없이 몸을 움직인 덕분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때문일까? 그의 사연을 소개하고 싶다며 방송국의 요청이 쇄도하지만 모조리 사양한다. 운동 스케줄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이다. 올봄에도 자전거를 타고 국토종주를 계획하고 있다던 그는 지난 3월 말 섬진강을 거쳐 통영으로 가는 길이라며 남녘의 이른 꽃소식을 메시지로 보내오기도 했다.
아내와 함께 남녘의 봄바람을 맞으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인터뷰 말미에 그의 아내 이순선 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환자와 보호자와 의사가 삼위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말이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