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최명기(청담하버드심리센터 연구소장)】
조선시대 거상 임상옥을 다룬 소설 <상도>를 읽다 보면 계영배(戒盈杯)라는 잔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계영배는 밑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이나 술을 부어도 처음에는 전혀 밑으로 물이나 술이 새지 않는다. 그러다 잔의 7할 이상이 채워지면 물이건 술이건 모두 밑으로 흘러내린다. 계영배에는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라는 속뜻이 있다. 탐욕을 부리지 말라는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꽉 막힌 도로에서…
1970년대부터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을 하면서 우리 삶의 가장 주된 목표는 성공에 있었다. 부자가 되건, 지위에 오르건, 명예를 차지하건 성공이 삶의 목표였다. 고도성장 시대에는 쓰러지지만 않으면 결국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기회 자체가 여기저기 많았기에 굳은 의지로 끝까지 매달리면 다들 어느 정도 자기 나름의 성공을 할 수 있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가 삶의 모토가 될 수 있는 시대였다.?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성공하기 쉽지 않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시련을 견디다가 더 크게 실패할 수 있다.”를 받아들여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고도성장 사회는 비유를 들자면 모든 차들이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와 같다. 차가 고장이 나서 멈추더라도 수리를 한 후 더 빨리 달려서 앞선 차들을 추월하면 되었다. 탁월한 운전 실력과 위험을 감당할 배짱이 두둑하다면 질주하는 삶이 가능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정체가 되어서 꽉 막힌 도로와 같다. 길이 막혀서 전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데 내비게이션에서는 시속 100km 이상 과속단속구간이라는 멘트가 심심찮게 나온다. 속도를 내려야 낼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멘트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짜증이 더 심해진다.
이처럼 정체가 되어서 차들로 꽉 막힌 도로에서는 나 혼자 빨리 달리고 싶어도 빨리 달릴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속도를 내면 쿵쿵 부닥쳐서 차가 박살이 나고말 것이다. 영영 달릴 수 없게 된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오르는 것이 달성 불가능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 막막하다.
무소유보다는 ‘반소유’
그렇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은 무소유가 과연 정답일까? 현자들은 소유욕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들 한다.?하지만 대부분 평범한 이들에게 있어서 무소유라는 것이 가능한가? 과연 무소유의 삶은 완벽하고 행복할 것인가?
무소유의 진리를 설파하는 분 중에는 종교인들이 많다. 그런데 종교인들의 경우 무소유라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가난하지만 죽고 난 후 미래는 다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괴롭고 힘든 상황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면서 위로받는다. 최소한도의 살아갈 공간도 있다.
무소유로 인해서 행복한 이들 역시 소유가 아닌 다른 형태의 보상이 있기에 행복이 가능한 것이다.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무소유는 기쁨이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소유를 선택했을 때 행복할 수 있다.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어쩔 수 없이 소유를 박탈당해 무소유 상태가 빠지면 지옥과 같이 괴롭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무소유 역시 정답이 아니다.
그래서 무소유와 소유 사이 반소유를 추구하는 삶이 필요하다. 반소유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1. 세상에 맞서지 말고 2. 모순을 견뎌내고 3. 필요 이상 소유하지 말고 4.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지 말아야 한다.
반소유로 사는 4계명
1 세상에 맞서지 말자
남들과 반대로 행동해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한다. 역발상 투자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 움직이는 것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인 이들의 대부분은 실패한다.
망한 회사를 다시 살려내거나, 무너진 조직을 재건한 이들을 영웅이라고 칭한다. 하지만 망한 회사에 집착하거나 무너진 조직에 남은 이들은 더 참담한 실패를 맞이한다.
대세를 거스르고 운명을 거부해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능력이 탁월해야 한다. 그리고 행운이 따라야 한다. 그런 이들에게 발생한 극히 예외적인 일이 마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매스컴에서는 떠들어댄다. 그들과 비교하면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러지 말자. 위험에 맞서는 대신 달아나는 것은 비겁한 것이 아니다. 현명한 것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일이 안 풀릴 때도 있고 일이 잘 풀릴 때도 있다. 일이 잘 풀릴 때 더 열심히 하고 일이 안 풀릴 때는 몸을 사려야 한다. 세상과 맞서지 말자. 운명의 결에 맞춰 열심히 살자.
2 모순을 견뎌내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때 우리는 확 내려놓고 싶다. 포기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결정을 하지 못하고 미적대는 내가 비겁한 것 같다. 그런데 뭐가 되었건 결정을 하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우유부단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며 술자리에게 멋지게 충고하는 선배나 동료도 막상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우유부단하다. 두려움 앞에서 내 자리를 지키는 것 그 자체로도 얼마나 큰 용기인가!
늪에 빠지면 허우적댈수록 더 깊이 빠진다. 그럴 때는 일단 지금 이대로 버티고 보자. 살다가 보면 진퇴양난의 덫에 빠진 것 같은 느낌에 절망할 때가 있다. 하지만 물러나지 않고 버티다 보면 불행도 제풀에 지쳐서 나가떨어지게 마련이다.
3 필요 이상 소유하지 말자
어느 날 갑자기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무소유의 삶을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 물질적 불편함을 떠나서 심리적 공허함 역시 상당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앞으로 필요 이상 소유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조금씩 버리면서 산다면 더욱 바람직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뭔가 하나를 살 때 뭔가 다른 하나를 버리는 습관이 필요하다.
반소유의 원칙은 물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도 너무 많이 만나면 피곤하다. 흔히 인간관계가 좋다고 하면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만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면 언젠가는 나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과 관계하게 된다. 좋은 사람 백 사람을 만나서 얻는 기쁨보다 나쁜 사람 한 사람으로 인한 괴로움이 더 크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래서 몇 년에 한 번은 전화번호를 바꾸는 것도 필요하다. 꼭 필요한 사람만 남겨두고 전화번호도 지워버리자. 스케줄 역시 마찬가지다.
4 안 되는 것을 억지로 하지 말자
죽어라고 공부한다고 해서 누구나 1등이 되거나 A학점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공부 안 하고 논다고 해서 꼭 꼴찌가 되거나 F학점이 되는 것도 아니다. 노력만 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지척에 깔린 것이 세상이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 하기 보다는 어느 정도 적당한 선에서 포기하고 그 노력과 시간을 되는 일에 쏟아야 한다. 때로는 그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를 바꾸기 위해서 나를 스스로 몰아세우고 나를 학대하기보다는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나쁜 건 줄이고 좋은 건 늘리기 위해서 노력하자.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보면 그만 짊어지고 내려놓고 싶다. 그런데 한번 내려놓으면 다시는 짊어질 수 없는 것이 삶의 무게다. 온몸으로 짊어지고 있을 때는 관성으로 버티지만 일단 내려놓으면 다시 짊어질 엄두가 나지 않는다.?힘들다고 무작정 삶의 무게를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다만 덜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반소유의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