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한국환경건강연구소 전상일 소장】
나중에 알고 보니…
필자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생들 사이에서 각성제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각성제 알약을 먹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잠도 안 오고, 그래서 공부가 잘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필자도 호기심에 한 번 먹어 봤는데 다음날 시험을 망쳤다. 밤중에 졸리지가 않아 공부를 더 할 수 있었지만 새벽까지도 잠이 안 와 두세 시간만 자고 일어난 탓에 피곤한 상태에서 시험을 봤기 때문이다.
뇌의 기억장소에 정보가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수면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뇌가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정보가 제대로 저장되는데, 잠을 줄이는 방식으로 뇌를 피곤하게 하면 정보가 저장되지 않고 휘발유처럼 날아가 버린다.
그때 시험을 망치고 난 후 그 알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알약이 카페인 성분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 비슷한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 요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시험 기간에 고카페인 음료를 유행처럼 마시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래서 유행이 돌고 돈다고 하던가?
고카페인 음료의 숨은 함정
최근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카페인이 다량 함유된 음료가 유행하고 있다. 카페인 농도가 워낙 높다 보니 ‘잠깨는 약’, ‘공부 잘되는 음료’, ‘에너지 음료’, ‘붕붕 음료’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문제는 아이들이 이렇게 높은 농도의 카페인에 자주 노출되면 건강에 해로울 수 있다는 점이다.
고카페인 음료를 ‘에너지 음료’로 부르는 것은 상술이다. 당장 잠이 안 오게 하고 각성시키는 효과를 에너지가 넘쳐서 그런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정작 몸은 상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몇몇 나라에서는 ‘에너지 음료’라는 말을 아예 못 쓰도록 하고 있다.
국내에서 팔리는 고카페인 음료들의 카페인 함유량을 알면 깜짝 놀라게 된다. 국내 한 소비자 단체가 2012년 조사한 바에 의하면 고카페인 음료에 들어 있는 카페인 함량은 커피 전문점에서 파는 아메리카노 한 잔에 함유된 카페인 함량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물론 어떤 제품은 이보다 두 배 많은 카페인이 들어 있는 것도 있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커피를 마시지 않더라도 고카페인 음료 한 캔을 마시면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셨을 때와 같은 양의 카페인을 섭취하게 된다. 이는 카페인 음료의 대명사로 불리는 콜라 한 캔에 들어 있는 양보다 무려 2~6배나 많은 양이다.
문제는 커피와 달리 고카페인 음료는 ‘음료’라는 인식이 강하고, 일반 슈퍼마켓에서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고카페인 음료가 ‘탄산음료’로 분류되고 있다. 그야말로 아이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사먹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닌가.
카페인의 두 얼굴
카페인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적당한 양을 먹으면 정신을 맑게 해 주고, 집중력이 향상되고, 두통을 완화시켜 주기도 한다. 성인의 경우 하루에 커피 3~4잔까지는 건강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이 카페인을 섭취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2012년 <소아과학> 학술지에는 고카페인 음료가 어린이와 청소년의 성장에 방해되고, 행동장애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논문이 실렸다. 성장기에 있는 어린이와 청소년이 카페인 섭취로 잠을 설친다면 제대로 성장할 수 없고, 성인에 비해 카페인 배출 속도도 느려 중독 위험이 더 높다.
카페인을 과다 섭취하면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심계항진, 간질 발작을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고 알려졌다. 위산이 과다 분비되어 위 점막이 손상될 수도 있고, 불안과 메스꺼움, 두근거림 등의 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다. 임신부가 하루에 300mg 이상 카페인을 섭취하면 태아의 성장이 부진해질 수 있고, 저체중아를 낳을 위험도 높아진다.
미국에서는 고카페인 음료를 과도하게 마신 후 돌연사한 사건도 보고된 바 있다.
미래의 주역인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카페인에 길들여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이대로 두면 위장병과 심장병, 그리고 행동장애를 가진 어린이와 청소년이 양산될 수 있다. 카페인이 마약은 아니지만 중독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마약과 비슷한 점이 있다.
고카페인 음료는 에너지 음료가 아니다. 영국 작가 셸리가 쓴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괴물의 이름을 따서 차라리 ‘프랑켄 음료’라 부르는 게 더 적합할 것 같다. 아이들에게 고카페인 음료를 프랑켄 음료로 확실하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전상일 소장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미국 하버드대 Harvard Center for Risk Analysis(위해평가연구소)에서 3년간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위해소통(RISK COMMUNICATION)과 보건학의 접목에 힘썼다. 귀국 후 환경보건학 지식을 다양한 방법으로 대중과 소통하고자 <한국환경건강연구소>를 설립하였고, 서울대 등 여러 대학과 다수 방송·언론 매체에서 강의와 칼럼 기고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또한, <둘다북스>를 설립하여 지난 10여 년간 운영해온 <한국환경건강연구소>의 콘텐츠를 풀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세계일보> ‘전상일의 건강해’ 칼럼을 연재하며 환경보건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