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정유경?기자】
【도움말 | 나우미가정문화연구원 김숙기 원장】
국제정치학에 ‘치킨게임(chicken game)’이라는 게임이론이 있다. 게임 방법은 간단하다. 도로 양쪽에서 두 명의 경쟁자가 서로를 향해 차를 모는 것이다. 부딪히기 직전에 핸들을 꺾는 사람이 치킨 즉, 겁쟁이며 명예롭지 못한 사람이 된다. 어느 쪽도 핸들을 꺾지 않으면 둘 다 게임에서 승자가 되지만 결국 충돌해 스스로를 파괴한다.
부부 사이의 의심은 이 치킨게임을 닮았다. 의심받는 사람은 의심하는 사람이 정신병이 있다고 몰아세우지 않으면 자신이 바람피우는 사람이 된다. 의심하는 사람은 자신이 정신병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서 배우자는 반드시 바람피우는 사람이어야 하고, 그 증거 찾기에 집중한다. 이렇게 치킨게임 링에 올라간 부부는 상대방을,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며 산다. 사는 것을 지옥으로 만드는 의심, 안 하고 안 받는 방법을 알아본다.
CASE 1. 그 남자의 억울한 이야기
직장 동료와 저녁 먹으러 가는 길. 차일중(가명, 47세) 씨는 서둘러 휴대폰을 끈다. 퇴근 시간이 넘으면 아내의 전화가 빗발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차 씨에게 이제 아내는 여자가 아니라 ‘의부증 환자’일 뿐이다.
의심의 발단은 2년 전 한 문자 메시지 때문이었다. 친구들과 술 마시러 간 바(bar) 사장에게 명함을 준 적이 있는데, 그 사장이 보낸 문자 메시지를 우연히 아내가 본 것이다. ‘요즘 많이 바쁘세요? 얼굴 좀 보여주세요.’ 이런 내용이었다. 누가 봐도 단체로 보내는 고객 관리용 문자였다. 아내가 누구냐고 묻길래 바에 간 걸 말하면 싫어할 것 같아 그냥 스팸문자라고 둘러댔다.
그 후로도 비슷한 호객 문자가 자꾸 와서 의심받기 싫어 휴대폰을 잠갔다. 얼마 후 휴대폰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한 아내는 대뜸 화를 냈다. 차 씨도 지지 않고 사생활 침해는 몰상식한 행동이라고 쏘아붙였다. 아내의 의심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퇴근이 늦으면 어디서 뭘 했냐고 다그쳤고, 누구를 만나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느 날은 친구와 술을 마신다고 했는데 급기야 전화로 친구를 바꿔달라고 했다. 친구가 이 사실을 알까 봐 걱정돼 화를 내고 끊었다. 그날 밤 아내가 지갑 속 영수증을 뒤지는 것을 보고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아내에게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바람피우고 싶어도 바람피울 시간도, 돈도 없다.’ ‘나 같은 놈에게 아무도 관심 없다.’고 했다.
친구와 술 마시는 횟수도 줄이고, 휴대폰 잠금도 풀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조금만 늦으면 전화를 하고 전화를 받지 않으면 회사에도 전화를 한다. 직장동료들이 아내를 의부증 환자로 볼까 봐 이제 회식할 때면 휴대폰을 끈다. 비록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찍히더라도….
CASA 2. 그 남자의 비참한 이야기
홍태준(가명, 36세) 씨의 ‘의심스러운 하루’가 시작됐다. 홍태준 씨는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확신한다.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하고 어린 홍 씨를 데리고 낯선 남자를 만났다. 결국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게 됐고, 어머니와 이혼했다.
연애 시절 아내는 어머니와 전혀 달랐다. 낯을 많이 가렸고, 연애도 처음이라고 했다. 뭐든지 홍 씨가 하자는 대로 따라줬다. 그래서 결혼했고,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부엌에서 아내가 ‘사랑해~ 고마워~’라고 말하며 전화를 끊는 것을 들었다. 누구냐고 다그치자 장모님이라고 했다. 아이 옷을 몇 벌 보냈다기에 고마워서 그랬다고 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내는 평소 장모님에게 살가운 딸이 아니다. 아내는 배 나온 아줌마를 의심하는 거냐며 웃어넘겼다. 그렇게 의심받고도 태연한 아내의 모습이 더 의심스러웠다. 이제 친구 모임도, 회사 회식도 대부분 빠지고 집에 일찍 들어간다. 아내가 회식을 하는 날이면 아이를 차에 태우고 회식장소 근처로 가서 무작정 아내를 기다린다. 요즘 따라 아내가 옷과 화장품을 사오는 일이 잦아지자 확신이 들었다. ‘어떤 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멋을 내느냐!’는 말이 혀끝까지 나오지만 참는다. 확실한 증거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휴가인데 아내에게는 지방 출장이 잡혀서 늦을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아내의 회사 앞에서 진을 칠 생각이다. 그 순간을 위해서.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못 믿는 이유
의심받는 사람도, 의심하는 사람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진짜 결백하다면 속을 뒤집어 보여줄 수도 없고 답답하기 짝이 없다.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배우자를 믿지 못하고 상대방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의심하게 될까?
나우미가정문화연구원 김숙기 원장은 “의심을 하는 배우자는 대부분 자신감이 떨어져 있는 불안한 상태”라고 설명한다. 상대방이 자신을 떠날지 몰라서 불안해서 집착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이다.
배우자가 불안해진 배경은 여러 가지다. 그중 흔한 이유는 과거 배우자가 실제로 바람을 피웠거나 바람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해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람을 피웠다면 진심 어린 사과, 용서 등 치유 과정이 필요하다. 어떤 이유든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마음의 병은 깊어진다. 이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수도 없다.
만약 바람을 피우지 않았더라도 배우자가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 벌어졌다면 오해를 풀고 넘어가야 한다. 나만 결백하면 된다는 생각은 배우자에게 의심병만을 던져줄 뿐이다.
김숙기 원장은 “성장 과정에서 부모 중 한 명이 바람피워서 고통 받았던 상처가 있었다면 남보다 배우자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클 수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남자는 절대 믿을 수 없다.’ ‘어머니처럼 당하고만은 살지 않겠다.’와 같은 생각이 부부생활을 지배하면 작은 일도 의심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싸우지 않기 위해, 악의 없이 귀찮아서 하는 거짓말도 문제다. 하나둘씩 거짓말의 진실이 드러나다 보면 진실도 믿지 못하는 상황이 된다. 빨리 들어오라고 재촉한다고 예정된 도착시간보다 더 빨리 들어가겠다고 말을 하거나, 친구와 놀고 있는데 야근한다고 둘러대지는 말자. 편해지고자 했던 작은 거짓말들이 모여 의심이라는 눈덩이로 바뀔 수 있다.
의심을 키우는 지름길
의심 때문에 부부 사이가 극심하게 멀어진 부부들은 대부분 같은 행동 양상을 보인다. 배우자가 처음으로 의심을 했을 때 그것이 의심이나 집착이 아닌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얼마나 사랑하길래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줄까 봐 마음이 쓰이는지 고맙고도 안쓰럽다. 그래서 의심하는 배우자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 부부관계든, 태도든 배우자가 의심하지 않도록 애쓴다. 쓸데없이 의심받는 게 싫어서 현재 상황을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거나 전화도 자주 해서 안심시킨다.
김숙기 원장은 “부부 사이에서 정조를 의심받는 배우자는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며 “정조를 의심하면 할수록 상대방을 손에 쥐고 흔들기 쉬워진다.”고 설명한다.
의심의 강도가 점점 심해지면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합당한 이유를 대도 배우자가 믿지 않는다. 이미 머릿속으로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내와 남편이 아니라 추격자와 도망자나 다름없다. 이대로 살다가는 의심을 하는 사람도 의심을 받는 사람도 병들어 가게 된다.
의심제로! 사랑 충만! 부부 되는 법 5가지
1. 의심할 만한 행동을 하지 말자!
하얀 거짓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지 마라.’는 속담처럼 의심의 여지는 미리 없애자. 부부 사이는 솔직하고 투명한 것이 좋다. 악의 없는 거짓말도 자주 하면 믿음이 깨지고 의심만 남는다.
2. 부부는 ‘의심 해명 의무’가 있다!
이러저러 해서 의심이 생기면 의심만 할 것이 아니라 해명을 요구해야 한다. 부부는 상대방의 의심을 풀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 만약 오해일지라도 합당한 이유를 대서 오해를 풀어줘야 한다. 아무리 결백하다고 외쳐도 증거를 대지 못하면 누구나 믿기 어렵다.
한편, 억울하다고 증거가 들어 있는 휴대폰을 파손하거나 먼저 이혼을 들먹인다면 상대방의 의심은 더 커질 수밖에 없음을 명심한다.
김숙기 원장은 “의처증, 의부증 상담을 해보면 의심할 만한 상황을 불투명하게 대처해서 배우자의 의심을 키운 사례가 많다.”고 설명한다.
3. 밑도 끝도 없는 의심이 잘못 됐다고 인정하자!
사실 의심하는 사람도 배우자를 못 믿고 의심하는 자신이 비참하다. 누구의 배우자가 아닌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한다. 모든 에너지를 배우자와의 관계에 쏟아서는 안 된다.
또한 자꾸 의심하는 원인을 자신에게서도 찾아야 한다. 김숙기 원장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도 부정적으로 보는 것, 어린 시절 기억을 지금 배우자와 동일시하는 것 등을 인정하고 고쳐나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4. 금지어를 쓰지 말자!
‘의처증 환자’ ‘의부증 환자’ ‘너는 병원에 가야 해!’ 등은 의심부부에게 금지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앞서 이야기한 대로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다. 자신이 환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떻게든 상대방이 바람을 피우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의심받는 배우자는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상대가 의처증 또는 의부증 환자라는 것을 밝혀내야 한다. 악순환이다. 헐뜯으며 증거를 찾을 시간에 부부 상담이나 병원 상담을 받아보는 것을 권한다. 이때 상담은 의심하는 배우자가 아니라 부부가 함께 가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5. 집착과 사랑을 구별하자!
의심 초기에는 집착과 소유욕을 깊은 사랑이라고 오해하는 일이 많다. 이때 안일하게 대처하는 것은 의심에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다. 사랑과 집착을 구분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연애할 때나 결혼 초기에 자꾸 자신을 통제하려고 하는 사람이 나중에 의심까지 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도록 설득하자. 또한 상대의 불안감을 없애주려고 노력하자. 충분한 애정표현으로 사랑을 확인하고, 많은 대화를 통해 생각을 공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