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이은혜 기자】
‘어떻게 살아냈을까?’ 말간 눈빛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문득 든 생각이다.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세월…. 한 인간에게 가혹하리만큼 처절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시련의 뒤끝에서 오늘 환하게 웃는 이종숙 씨(46세). 그 웃음 뒤에 켜켜이 쌓여있는 지난 삶의 무게를 살짝 들춰보았다.
어릴 적부터 건강은 발목을 잡고
엄마 뱃속에서 12달을 넘기고 태어난 때문이었을까??어릴 적부터 건강하지 못한 몸은 언제나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였다. 그런 탓에 그녀의 어린 시절은 잔병치레로 얼룩져 있다. 늘 골골하는 아이였고, 병을 달고 사는 아이였다. 그렇게 성장해가면서 삶의 많은 부분도 포기해야 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지금의 남편이 청혼을 했을 때 거절부터 했으니까요. 아내가 아픈 집, 엄마가 아픈 집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 걱정 말라고, 아픈 것 다 고쳐주겠다고 매달리는 남자를 뿌리칠 여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래서 결혼이라는 걸 했다. 얼마동안은 참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그 행복은 결코 길지 않았다. 첫 아이를 낳고 100일이 채 안 되었을 때 느닷없이 나타난 몸의 변화 앞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자고 일어난 어느 날 아침, 온몸이 퉁퉁 부어 있었다. 곧바로 병원에 갔다. 정밀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다. 부랴부랴 신장조직 검사에 들어갔고, 얼마 되지 않아 병명이 나왔다. 사구체신염이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어요. 어떤 병인지 잘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곧 알게 되었다. 얼마나 지독한 병인지. 붓는 것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심할 때는 다리를 못 옮길 정도였고, 목이 뒤로 젖혀지지 않을 만큼 목이 붓기도 했다. 허벅지 살은 툭툭 터졌고, 안구를 보호하고 있는 하얀 막이 구겨져 있을 때도 있었다.
“정말 무서운 병이었어요. 그동안 숱한 잔병치레를 했었지만 이런 병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까요.”
이때부터 이종숙 씨는 부신피질호르몬제를 달고 살았다. 그러면서 늘 단백뇨를 체크했다. 그러나 하루하루 변해가는 모습 앞에서 그녀는 절망했다. 46kg이던 호리호리한 몸매가 70kg을 육박하는 뚱보가 되어갔고 피부는 퍼석퍼석 붓고 팥알 만한 여드름도 돋아났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얼굴이 동글동글해지면서 마치 괴물처럼 변해간다는 사실이었다. 의학용어로 문페이스라 불리는 증상이었다. 이 모두가 부신피질호르몬의 부작용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약을 끊을 수도 없는 일! 좋아졌다, 나빠졌다를 반복하는 고통스런 나날 속에서 하루하루 지쳐갈 무렵, 그것은 불행 중 축복이었을까? 둘째 아이의 임신을 알게 됐다.
하지만 기쁜 마음도 일순간! 의사는 말했다. 아이를 갖는 건 무리라고. 정상인도 임신을 하게 되면 신장에 무리가 오는데 이 상태로 아이를 낳는 건 위험하다고. 하지만 이종숙 씨는 의사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아마도 모든 엄마가 그럴 거예요. 설사 제가 어떻게 된다 하더라도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 대신 열심히 기도했어요.”
그랬던 덕분이었을까? 둘째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남편을 꼭 닮은 아들이었다. 사구체신염은 여전히 관리 대상이었고, 설상가상 갑상선 항진증까지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런 엄마의 몸을 빌려 건강하게 태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마도 늘 골골하던 제가 남편에게 준 최고의 기쁨이 아닌가 싶어요.”
더 큰 불행 앞에서 할 말을 잃다!
둘째 아이를 낳은 뒤에도 사구체신염과 갑상선 항진증은 여전히 그녀 삶에 그늘을 드리웠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렇게도 되고 싶지 않았던 아픈 아내, 아픈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했다. 삶에 대한 희망도 점점 엷어져 갔다.
“희망이 없는 삶, 그것만큼 뿌리 깊은 절망도 드물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엄마야!’ 하는 말을 되뇌었어요. 이 말은 제게 마술에 걸리게 하는 말과도 같았어요. 이 마술에 걸려 식사준비도 하고 청소도 했으니까요. 제가 살아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렇게 마음을 추슬러 가며 근근이 하루하루를 이어가던 어느 날, 어릴 적 단짝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알고 보니 친구는 위암에 걸려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 친구를 위해 기도라도 해줄 생각으로 함께 병원에 간 이종숙 씨.
친구는 수술하러 들어가고 병원 복도에서 서성이던 그녀는 불현듯 ‘병원에 온 김에 나도 검사나 한 번 받아볼까?’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병원이라면 간판조차 보기 싫어했던 그녀가 왜 그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모를 일이라고 말한다.
“집에 돌아와 그 이야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내일 당장 검사를 해보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날 저녁 금식을 하고 동네의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를 해보았습니다.”
검사 결과는 곧 나왔다. 그런데 의사의 말이 조금 미심쩍었다. 위궤양이 있다면서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한 번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곧바로 종합병원에 갔다. 조직검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당장 병원으로 오란다. 그런 그녀에게 의사가 한 말은 ‘위암 판정’이었다.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했는지, 또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그날 하루 동안의 기억은 제게 없습니다. 하얀 백지상태예요. 다만 당시 무역업을 하고 있던 남편이 일본 출장에서 돌아오기까지 3일 동안은 혼자서 참 많은 생각을 한 시간이었어요.”
많이 울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기도하고…. 그렇게 3일 정도가 지나니까? 감정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만약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담담히 받아들이자는 거였다. 믿음이 있었기에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3일 뒤 출장 갔던 남편이 돌아왔다. 그녀의 말을 전해들은 남편의 절망은 또 다른 것이었다. 남편의 성화에 곧바로 입원을 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했고,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러나 암은 수술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항암치료가 남아있었다.
항암치료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사구체신염으로 신장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항암치료를 하는 것은 더 큰 위험이 될 수 있었다. 항암치료는 포기했다. 그 대신 철저한 관리는 목숨 걸고 해야 했다. 그 방법을 묻는 질문에 병원에서 해준 말은 ‘잘 먹어야 한다.’는 말뿐이었다.
암환자는 못 먹어서 죽는다?
위를 60~70% 정도 잘라낸 위암 수술 환자가 잘 먹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많이 먹을 수도 없거니와 조금 많이 먹었다 싶으면 곧바로 부작용이 뒤따랐다.
이종숙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금 먹으면 토하고 설사하고…. 제대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 남편은 남편대로 암 관련 서적을 한아름 사와 어떤 음식이 좋은지 하나하나 찾아내고, 친정 엄마는 친정엄마대로 항암음식을 만들며 지극 정성을 다했지만 먹지를 못하니 허사였다.
“그렇게 3개월 정도가 흐르니까 온몸에서 이상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하더군요. 치아를 밀면 치아가 밀릴 정도로 사이가 뜨고 풍치도 심했습니다. 안구건조증도 심해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충혈이 되고 피부는 퍼석퍼석, 머리숱은 술술 빠지고…. 모든 게 영양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였어요.”
마음이 급해졌다. 이 상태로 가다간 위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적극적으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맸다. 남편은 열일 제쳐두고 매달렸다. 그런 정성이 통한 걸까?
무역업을 하고 있던 남편이 일본 거래처 사장으로부터 얻어온 것이 있었다. 그녀의 사정을 전해 듣고 한 번 먹어보라며 준 것이었다.
“그것은 보리새싹과 일본의 고급녹차인 말차의 영양성분을 분말로 만든 청록소라는 녹즙이었어요. 이걸 먹으면 영양 흡수도 빠르고 영양도 풍부해서 영양부족이 심한 암환자들이 많이 먹는다고 하더군요.”
먹기도 쉬웠다. 찬물에 분말가루를 넣고 흔들어서 먹으면 되었다. 일단 술술 잘 넘어가니 살 것 같았다. 그래서 물처럼 마셨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문득 몸이 참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럴까? 그렇게 아프던 눈도 안 아팠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밀면 밀리던 치아도 제 자리를 찾은 듯 단단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제서야 설마?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바로 보리새싹의 영양가치부터 살펴보았습니다.”
놀라웠다. 단백질, 식이섬유, 베타카로틴, 비타민 C, 비타민 E, 칼슘, 마그네슘, 철, 엽록소, 카테킨, 데아닌 등 참으로 다양한 영양소가 빼곡히 들어있었다. 그야말로 천혜의 영양풀이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고급 녹차로 알려진 말차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항산화제인 비타민 C, E, 칼슘, 카테킨, 그리고 콜라겐까지 놀라운 영양 비밀이 숨어 있었다.
그런 때문일까? 일본에서는 이미 항암효과 큰 기능성 슈퍼푸드로 자자한 명성을 얻고 있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 열심히, 온가족이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5년이 흘렀다. 지금 이종숙 씨는 어떻게 됐을까?
“몇 달 전에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본 결과 암세포는 발견되지 않아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사구체신염은 언제부턴가 그 증상이 없어졌고, 지금은 모든 것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이 모두가 청록소 덕분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이종숙 씨.
이제 그녀의 모습에서 늘 누워 지내던 아픈 모습은 상상되지 않는다. 피부도 반짝반짝 윤이 난다. 누구보다 건강한 모습이어서 보기 좋다. 그런 그녀가 건강을 되찾자마자 온 정성을 다하고 있는 일이 있다. 그녀에게 구세주가 되어주었던 청록소를 국내에 들여와 보급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녀는 믿고 있다. 보리새싹의 항암효과와 말차의 항산화효과가 분명 많은 암환자들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그래서 이 일은 그녀에게 주어진 하나의 사명으로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