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피옥희 기자】
【도움말 | 고대 구로병원 정신과 정인과 교수】
남편들의 정년이 짧아짐과 동시에 아내들의 뒤치다꺼리 기간은 더더욱 늘어났다. 명퇴와 은퇴로 불거진 가장들의 실직은 남편뿐 아니라 아내에게도 고통을 전가해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최근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는 ‘은퇴남편증후군’ 때문에 늘그막에 부부관계가 금이 가는 경우도 종종 생기곤 한다. 은퇴남편증후군을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는 부부해법에 대해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정신과 정인과 교수의 도움말로 알아본다.
은퇴가 웬말?
“여보, 밥!”
“내가 밥 차려 주는 사람이에요? 배고프면 알아서 차려먹던가. 허구 헌 날 집에 쳐 박혀서 밥만 축내고. 아휴, 속 터져.”
냉기서린 아내의 목소리에 잔뜩 풀이 죽어 있는 남편. 드라마 속에 종종 등장하는 ‘일 없는 가장’의 모습은 실제 우리 현실 속에서 비일비재하다. 남편은 남편대로 잔뜩 위축되고, 아내는 아내대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등 부부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지는 증상. 이것이 바로 시대가 변하면서 생겨난 ‘은퇴남편증후군’이다.
은퇴남편증후군이란 ‘실직한 남편 때문에 아내가 스트레스를 받아 신체적, 정신적 이상을 겪는 증상’을 말한다. 특히 은퇴를 앞둔 황혼의 부부뿐 아니라 명퇴, 권고사직, 구조조정 등 고용불황과 맞물려 30~40대 부부사이에서도 빈번히 발생한다.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정신과 정인과 교수는 “은퇴 후 남편의 적응뿐 아니라 그 남편에 대한 부인의 적응도 문제가 됩니다. 특히 불안하고, 가슴이 뛰고, 답답하고, 짜증이 나는 등 신체적, 정신적인 증상이 함께 맞물려서 나타나는 것이 특징입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은퇴한 것을 감사해하거나, 평생 일을 했으니 이제 좀 쉬엄쉬엄 살자며 겸허히 받아들이거나, 혹은 아직 젊으니 새로운 일을 찾자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매우 건강한 사람들에 속합니다. 하지만 남 탓으로 돌리거나 자책을 하는 사람들은 자꾸 그 문제를 부인하다보니 은퇴남편증후군이 생기는 것이죠. 그에 따라 아내도 함께 고통을 받고 더욱 힘들어하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부연한다.
말과 행동, 조심 또 조심!
은퇴남편증후군을 이겨내려면 아내와 남편 모두 말과 행동을 더 조심해야 한다. 사실 은퇴한 남편이 돈을 못 벌어온다고 해서 아내가 하루 아침에 박대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쌓이고 쌓여왔던 불만들이 경제적 위기감과 함께 한꺼번에 표출된 것일 수도 있다.
남편 역시 가장으로서의 위신과 자존심에 상처가 생겨 평상시에는 별말이 아닌 말 한 마디에도 굉장히 과민반응을 하거나 자격지심에 빠지기도 한다. 평생을 돈 버느라 고생했는데 이제 와서 일자리가 없다고 괄시하나 싶어, 아내와 등을 돌린 채 생활하는 남편들도 수두룩하다.
따라서 은퇴한 남편을 둔 아내라면 항상 남편을 존중하고 가장으로서의 존재감을 인식시켜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만 남편이 자신감을 갖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제 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반대로 은퇴한 남편이라면 아내의 말에 귀 기울여주고, 작은 일에도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보라. 먼저 배려하고 손을 내밀어야만 부부간의 대화가 원활해질 수 있고 더 돈독한 사이를 유지할 수 있다.
정인과 교수에게 물어봐!
Q1 은퇴한 남편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증상은 무엇인가요?
첫째, 우울증이 많이 나타납니다. 은퇴라는 것은 ‘상실’입니다. 지위는 물론 경제적, 신체적으로 약해져서 이 때문에 우울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 은퇴한 남편 중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건강염려증이 많이 생깁니다. 셋째, 살아가면서 여러 상황을 봐왔기 때문에 자녀문제 등 다양한 부분에 대해 불안신경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Q2 은퇴남편증후군으로 서로 각방을 쓰는 부부들도 많다고 하던데요?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정확한 통계가 없지만 일본의 통계를 보면 10%만이 같은 방을 쓰고 90%는 각방을 쓴다고 합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이죠.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기본적으로 각방 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서로 멀어지게 되면 감정에 무관심해지게 마련입니다. 감정이 있으면 시간을 두면서 천천히 얘기를 나눌 수도 있고, 서로 대화를 통해 관계를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면 여러 가지 신체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자면서 서로의 건강이상을 감지할 수도 있죠. 그러니 같은 방을 쓰는 것이 여러모로 좋겠습니다.
Q3 그렇다면 부부간에 필요한 대화의 기술은 무엇인가요?
문제는 감정표출입니다. 화가 났다고 그 순간 화를 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화가 나는 그 순간을 잠시 참고 30분 후, 혹은 1시간쯤 후 얘기하면 서로 감정이 격하지 않은 상태로 화를 풀 수 있습니다. 화를 즉각적으로 표출하며 감정을 폭발시키면 사실상 감당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Q4 은퇴남편증후군을 이겨내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남편이 은퇴 후에 무얼 하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는 게 아니라, 4~5년 혹은 10년 전부터 일찌감치 은퇴를 준비하고 이에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부인도 그에 맞춰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는 것이 필요하겠죠.
또 은퇴남편증후군을 이겨내려면 부부가 함께 운동이나 취미생활을 공유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사실 저는 환자들에게 ‘운동’을 제일 강조합니다. 은퇴남편증후군은 남편과 아내 모두 스트레스가 많기 때문에 그것을 푸는 데 가장 좋은 것이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