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양미경 기자】
“삶과 죽음의 경계를 경험해 본 나는 어쩌면 행복한 사람”
어느 날 삶은 그렇게 여위어 간다. 어떤 예고도, 징후도 없이 삶은 그렇게 정해진 굴레를 따라 흘러서 우리를 당혹케 한다. 20여 년 동안 택시 운전을 하다 간암 선고를 받은 박종수 씨(48), 그는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 같던 그 때를 기억한다. 지금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며 허허롭게 웃기도 하지만 그 아찔했던 순간을 이겨낸 그의 눈 속에는 그 때의 아픔이 엿보이기도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라.”는 의사의 절망적인 선고 후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삶…. 그는 체념하지 않고 일어나 이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같은 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그를 만나보았다.
택시 운전사는 참 고독하고 외로운 직업이다. 정해놓은 목적지도, 종점도 없이 사람들을 태우고 내리고, 또 어떤 때는 알지도 못하는 길을 되짚어 돌아오기도 한다. 막히는 도로 위에서 손님의 짜증 섞인 푸념을 듣기도 하고, 술 취한 손님의 넋두리를 받아주면서 고단한 하루를 마감해야 하는 때도 있다.
박종수 씨는 20여 년간 택시 운전사의 삶을 살았다. 3일에 한 번 쉬는 날이면 그 동안 쌓였던 피로를 풀기 위해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속이 쓰리기도 했지만 일상적인 증상쯤으로 여기고 살았다. 하루종일 앉아 있어야 하는 직업적 특성 때문에 속이 더부룩하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안되긴 했지만 또 그건 누구나 있는 가벼운 소화불량으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 상태가 점점 심해져 잦은 속 쓰림과 위통이 동반되어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처음 병원을 찾을 때까지만 해도 무슨 큰 병에 걸렸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검사를 끝낸 담당의가 ‘간경화’라는 진단을 내렸을 때는 눈앞이 아득하더군요. 그때부터 제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매달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아야 했고 그 생활은 2년 동안이나 계속됐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꾸준히 치료를 받았는 데도 증세는 점점 더 나빠졌고 속 쓰림, 위통, 소화불량은 그 강도가 심화되어 갔습니다.”
간경화가 간암으로
98년부터 간경화로 2년여 동안 고생한 박종수 씨는 좀더 확실한 이유를 알기 위해 X-ray 촬영을 한 후에야 자신의 병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간에 조그만 종기가 났으니 그것만 없어지면 괜찮다고 했습니다. 전, 그저 그 말만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날이 길어질수록 아내나 아이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박종수 씨는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점점 어두워져 가는 가족들의 표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설마, 설마 하면서도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퇴원하는 날, 박종수 씨는 간에 있다던 종기가 바로 암 덩어리였다는 사실과 이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도 없는 상태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의사가 그러더군요. 공기 좋은 곳에 가서 먹고 싶은 음식 마음껏 먹고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하라구요. 마음대로 살라는 말이 그렇게 슬픈 말인 줄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박종수 씨는 이제 살 수 있는 날이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처음에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절망도, 슬픔도, 아픔도 아닌 공허함과 무기력감, 그것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그런 박종수 씨가 다시 살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은 부인의 노력 때문이었다.
“솔직히 전 삶을 그대로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병원에서조차도 가망이 없다는데 더 이상 무엇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아내는 달랐습니다. 간암에 관련된 책을 사보고, 간암에 좋다는 음식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서 저에게 먹이려고 했습니다. 그런 아내를 보고 있자니 나약한 제 자신이 창피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식이요법을 통해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저 받아들이기만 해야 했던 ‘6개월 시한부 선고’에 저항하기 시작했던 것은 그때부터였다.
“병원에서는 식이요법을 시작하려는 저를 말렸습니다. 식이요법으로 암을 치료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안하고 그렇게 가족들을 남겨놓고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녹즙과 효모, 유산균으로 식이요법을 시작했습니다.”
박종수 씨의 간암투병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제가 주로 섭취한 것은 녹즙, 효모, 유산균, 알로에 즙이었습니다. 녹즙을 한 컵 마시고 30분 후 현미잡곡밥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일정한 양 만큼의 효모와 유산균, 알로에 즙을 보충해 장 기능을 좋게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더불어 아침에 일어나면 편안한 마음으로 조깅을 한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산책을 했습니다.”
박종수 씨는 신선초, 케일, 돌미나리, 토마토, 민들레, 쑥 등으로 만든 녹즙을 한 번에 200cc정도를 마시고, 식이요법을 시작한 이후에는 일체의 육류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병원에서 말하던 6개월의 시간이 지났고, 박종수 씨는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병원에 찾아가 다시 검사를 받았다.
“식이요법을 시작하고 얼마 후부터 속이 편해지고 위통, 소화불량 증세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식이요법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저였습니다. 그런데 가망이 없다던 병원에서 검사결과 암세포의 크기가 줄어들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 삶은 다시 제게 손짓을 보내더군요.”
기적은 소박한 삶의 선물
검사 결과에 병원에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말 그대로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다는 반응이었다.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마지막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심정으로 살아왔던 박종수 씨와 가족들은 잊고 지내던 ‘삶’이라는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 예고도 없이 찾아왔던 간암선고가 그렇게 쉽게 사라지리라고 믿기는 어려웠다. 아직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고, 언제 또다시 죽음의 그림자가 부피를 키워낼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암세포의 존재가 미미해지기는 했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삶의 의지는 강해지고 반신반의하던 식이요법에 더욱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잡고 나자 쓰기만 했던 녹즙이 음료수처럼 여겨졌고, 그렇게 잘 마시던 술은 냄새도 맡기가 싫어졌습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 그는 ‘완치’라는 단어를 스스럼없이 말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6개월밖에 시간이 없다.”던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과거의 자신과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그는 현재 암(癌)으로 고통을 받다가 건강을 회복한 사람들의 모임인 ‘국제건강가족 동호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삶의 끝자락에서 희망조차 품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박종수 씨는 마지막으로 당부를 한다.
“저처럼 영문도 모르고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선고’를 받는 사람들에게 ‘기적’이란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찾아온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며 체념하는 자세는 자신과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가장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삶의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십시오. 그러면 ‘기적’은 선물처럼 찾아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