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허미숙 기자】
“다시금 찾은 행복, 그래서 더 소중합니다”
7년의 고통은 실로 컸다. 한 남자의 인생 지침을 돌려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전립선염 때문이었다. 남자 나이 한창대인 30대 초반, 어느 날 느닷없이 그의 인생 속으로 파고든 전립선염으로 7년이란 세월동안 숨죽여 살았다는 정희석 씨(38세). 그런 그가 오늘은 활짝 웃는다. 7년 고통을 이겨낸 자리에서 고마워한다. 그 이야기를 들어본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했던가? 혹자는 말한다. 그래서 더 살맛 난다고.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불행이 당신 앞에 기다리고 있다면? 그래도 미래는 장밋빛일까?
1997년 당시 모건설회사에 다니고 있던 정희석 씨도 하루하루 사는 것이 즐거웠다. 집이 수원이어서 서울에 있는 직장까지 가려면 늘 서둘러야 했지만 갓 30대에 들어선 정희석 씨에게는 별 것 아니었다. 팽팽한 젊음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날도 변함없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날은 조금 이상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소변이 심하게 마려오기 시작했다.
만원버스 속에서 말도 못하고 생리적 욕구를 참아내기란 예사로 힘든 고통이 아니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중간에서 내렸다. 부랴부랴 화장실을 찾았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소변이 방울방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덜컥 겁이 났다. ‘별일 아닐 거야. 아마 너무도 오랫동안 참아서 그런 거겠지.’
스멀스멀 솟아나는 막연한 불안감을 억누르며 정희석 씨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 화장실 문턱을 넘고
방울방울 나오던 소변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생겼다. 화장실 가는 횟수가 부쩍 늘어났던 것이다. 하루에 많아야 대여섯 번 가던 것이 8~9회로 늘어나더니,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잦아졌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결국에는 출·퇴근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안 되겠다 싶어 비뇨기과를 찾았다. 그러나 진단 결과는 참으로 뜻밖이었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병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빈뇨증상은 여전히 계속됐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화장실 문턱을 들락거려야 했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을 때 정희석 씨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30대 초반의 패기어린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고, 대신 풀기없는 지친 모습에 신경은 바짝 곤두서 있었다.
생활에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IT계열의 벤처회사를 창업한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전립선학회라는 곳에서 홈페이지 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작업을 하기 위해 자료를 읽어보던 그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증상이 그 자료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던 것이었다.
전립선염에 대한 설명이었다. 왜 그런지, 병명도 모른 채 3년 동안 빈뇨로 고통을 받고 있던 그는 비로소 자신의 병명이 전립선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병원에 갔다. 그리고 비세균성 전립선염이라는 확실한 진단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원인을 묻는 질문에 의사는 “특별한 원인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전립선염이라는 진단을 받고
전립선염이라는 확실한 병명이 나오자마자 정희석 씨는 곧바로 치료에 들어갔다고 한다. 약물요법을 중심으로 한 치료는 3개월 동안 계속됐다.
처음에는 반짝 효과가 있었다. 빈뇨증상이 줄어들고, 회음부의 은근한 통증도 참을 만했다. 그러나 몇 개월 지나니 다시금 제자리였다. 또다시 화장실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려야 했고, 회음부 통증은 전보다 더 심해졌다.
“이럴 수가 있나? 싶더군요. 하루가 다르게 의학이 발전하고 있는데, 설마 전립선염 하나 못 고칠까 생각했었거든요.”
이때부터 그의 병원 쇼핑이 시작됐다. 내노라 하는 비뇨기과는 다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한의원도 예외가 아니었다. 건강식품도 달고 살았다. 홍삼, 오미자, 감식초, 복분자 등 전립선염에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것들은 모조리 구해서 먹었다. 심지어 400만원을 주고 산삼까지 사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였어요. 점점 더 회음부가 뻣뻣하게 굳어지면서 쥐어짜는 통증이 엄습했고, 전립선염 증상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어요. 설상가상 허리통증과 근육통, 그리고 우울증까지 겹쳐져 살고 싶지 않더군요.”
소변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고통은 너무도 큰 고통이었다. 때로는 요도폐색으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수차례. 그러나 치료법이라는 게 인위적으로 소변을 뽑아낸 뒤 고작 항생제와 진통제, 신경안정제, 근육이완제 등의 약물을 처방받는 것이 전부였다. 입원도 시켜주지 않았다. 입원을 하나, 안 하나 치료법은 동일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정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병이 이렇게까지 제 인생을 뒤흔들어놓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어요. 아침에 일어나 한 시간 정도를 걸어다녀야 겨우 소변 몇 방울을 볼 수 있는 생활이 계속되면서 하루하루 사는 것이 그야말로 지옥이었어요.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잤어요. 심한 허리통증은 허리주사를 맞아가며 근근히 버텼죠. 그랬더니 몸은 비쩍 말라갔고, 정말 사람 몰골이 아니었어요.”
희망의 끈을 잡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병원 쇼핑으로 전립선염을 잘 고친다는 병원이나 비뇨기과, 심지어 한의원까지 꿰차고 있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전립선염을 고쳤다는 한 체험자의 사례를 접하게 되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수소문 끝에 모 한의원에서 약을 먹고 나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바로 그 한의원에 전화를 걸었어요. 통증이 심해 외출조차 하기 힘들었던 터라 약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았죠. 그랬더니 한 번 방문을 하라고 하더군요. 큰 병 아니라면서 얼마든지 나을 수 있다고 말하는 데 눈물이 다 나더군요.”
결국 정희석 씨는 아내의 부축을 받아가며 한의원을 찾아갔다고 한다. 증상을 살펴본 한의사가 탕약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몇 가지 더 당부하는 말씀이 있었다. 하루 걷기운동을 30분 정도 하고, 자기 전에는 반신욕을 꼭 해야 하며, 청국장은 매일 먹으라고 권해주었다. 또 된장과 양파를 많이 먹으라는 주문도 함께였다.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던 정희석 씨는 마지막 희망이라도 붙잡듯 열심히 탕약을 먹고 하라는 대로 실천했다. 일주일이 흘렀다. 새벽에 화장실에 간 정희석 씨는 눈앞의 상황을 결코 믿을 수가 없었다.
“소변이 시원하게 잘 나오는 것이 아니겠어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상쾌, 유쾌, 통쾌한 그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신새벽에 곧바로 한의사 선생님한테 전화를 드렸어요. 휴대폰 번호를 알고 있었거든요. 살려 주셔서 정말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는 정희석 씨. 그렇게 시작된 치료 때문이었을까?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정희석 씨는 누구보다 건강하다. 전립선염? 물론 증상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초음파, 전립선 마사지 검사 결과 ‘정상’이라는 판정을 받아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변화에 감사한다는 정희석 씨. 혹독한 7년의 시련을 이겨내고 다시금 새로운 인생의 시작점에 서 있는 그는 지금 행복하다.
그리고 또하나! 건강은 열심히 챙긴다. 아침에 일어나 30분 정도는 꼭꼭 걷기운동을 하고 주말에는 등산을 취미처럼 즐긴다. 육식도 되도록 멀리 한다.
많이 변한 그에게 아내는 핀잔을 준다. “일밖에 모르던 사람이 사람됐다고.”
그런 그가 본지 독자들을 위해서 한 가지 당부 말씀을 잊지 않는다.
“전립선염은 우리나라 남성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질환 중 한 가지입니다. 만약 빈뇨나 회음부 통증이 느껴진다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말고 하루빨리 전문의의 진단을 받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전립선염은 무엇보다 초기 치료가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