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김진경 기자】
“늘 부지런히 움직이세요! 누우면 죽습니다”
고통을 이겨낸 이들의 얼굴을 자세히 본 적이 있는가? 고통을 알아버렸기에 삶의 소중함을 아는 그네들은 어떤 누구보다도 더없이 평온하고 빛나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낯선 길을 물어 물어 찾아가 만난 오문수 씨도 그러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직장암이라는 고통을 이겨낸 오문수 씨(68세)와 남편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는 부인 배봉임 씨(57세), 이들 부부의 투병담을 들어본다.
올해 68세인 오문수 씨는 남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서예를 잘하는 단아한 부인과 이제는 다 커서 울타리가 되어주는 아들, 곱디고운 며느리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손자 손녀는 그의 보물이자 자랑이다.
방벽에 온통 부인의 서예 작품과 손자 손녀의 사진을 붙여 놓고는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며 슬며시 자랑 아닌 자랑을 하는 그의 얼굴에서 어디 하나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가슴 저편에 쪼개졌다 이어진 작은 상처가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병마는 찾아오고…
1998년 12월. 처가인 전라도 해남에서 1998년의 마지막을 즐기고 있던 오문수 씨는 몸에 이상을 느꼈다. “갑자기 화장실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관장약도 해보고 여러 가지 처치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시골이라서 병원에 갈 수도 없었지요. 결국은 서울에 올라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문수 씨는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병원부터 찾았다. 그러나 의사는 아무런 설명없이 큰 병원에 가보라는 말밖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의사의 말에 부인과 함께 큰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에게 직장암 3기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직장암이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3기….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렇지만 마냥 그렇게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남편을 살려야 했으니까요.”라고 부인 배봉임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녀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그런 감정을 느끼고 보듬어 줄 여유가 당시의 그녀에게는 없었다고 한다.
부인 배봉임 씨는 서둘러 남편의 수술 날짜를 잡았고 오문수 씨는 다음해인 99년 1월 직장의 3/2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수술 6일만에 퇴원을 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퇴원을 하고 집에 돌아온 오문수 씨는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게다가 직장의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자꾸만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그러나 몸은 마음처럼 쉬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화장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갔다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몸이 얼마나 힘든지 나중에는 아예 화장실 앞에 자리를 깔고 눕게 됐지요.”
수술 후 항암제 치료도 방사선 치료도 받지 않은 상태였는 데도 불구하고 오문수 씨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체력이 급격하게 약화된 그의 체력 보강을 위해 부인 배봉임 씨에게 고기와 같은 고단백 음식을 많이 먹이라고 권장했다고 한다.
“음식이라고는 맑은 장국밖에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병원에서는 고단백 음식을 먹이라고 하더군요. 게다가 남편 병문안을 온 사람들은 저마다 이게 좋다, 저게 좋다 하면서 이것저것 처방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부인은 암에 대해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서점에 가서 암에 관련된 책이란 책은 다 훑어보고, TV에서 암과 관련된 방송이 나오면 녹화를 해놓고 봤다. “책과 방송뿐 아니라 암을 이겨냈다는 사람은 다 쫓아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한방병원에서 면역력을 강화시켜 암을 스스로 없애는 치료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 병원에서 가르쳐 주는 식이요법을 하게 되었지요.”
건강요법의 시작, 그리고 희망
부인 배봉임 씨는 그날로 바로 식용유를 올리브 기름으로 바꾸고 소금도 구운 소금으로 바꿨다고 한다. 젓갈류와 된장, 고추장도 이전에 담가먹던 방식을 버리고 암환자에게 좋다는 방법으로 다시 만들었다.
“소금은 바다의 불순물을 빨아들인 데다가 생산할 때 염산처리도 하기 때문에 구운 소금을 먹어야 한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젓갈류와 된장, 고추장도 전부 구운 소금과 유기농 콩, 고추를 이용해 다시 담갔습니다.”
밥도 흰쌀은 안 들어가는 밥을 해서 먹었다고 한다. 현미, 수수, 팥, 검정콩, 흰콩, 완두콩, 율무 등 각종 잡곡만으로 된 밥을 매끼 지어서 상에 올렸다. 계란도 유기농법으로 생산해낸 유정란을 먹였고, 각종 채소도 유기농법 농장에 가서 구해서 먹였다. 김치도 유기농 배추와 고추, 집에서 담근 젓갈을 이용해 만들었다.
“지금이야 텃밭에서 우리가 각종 채소를 기르고 있어서 문제가 없지만, 당시에는 유기농 채소를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가서 일도 해주고 그러면서 조금씩 얻어오곤 했었지요.”
병원에서 지어준 약을 먹는 동시에 식이요법을 시작하면서 오문수 씨는 건강이 차츰 회복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회복에 도움을 준 것은 비단 식이요뿐만은 아니었다.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산에 올라갑니다. 집에서 산에 갈 때는 자전거를 타고 가지요. 자전거로 한 30분이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리에 산이 있습니다. 집에 있을 때에도 항상 달리기 운동을 합니다.”
틈틈이 텃밭도 가꾸고 있다는 그는 “부지런히 움직여라, 누우면 죽는다”고 강조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
원래 오문수 씨는 자로 똑바로 잰 듯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꼼꼼한 성격에 담배도 많이 피고, 고기도 좋아하고, 과자와 패스트푸드를 즐겼다. 이러한 그의 성격 때문에 부인 배봉임 씨는 남편의 암을 치질이라고 속였다고 한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다 알고 있었지요. 충격적이었지만 살겠다는 의지를 갖고 마음을 편안히 다스리고자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식을 위해서라도 제명대로 살다가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이러한 그의 마음에 부인의 살려야겠다는 의지와 가족들의 정성과 관심이 더해져 지금의 행복을 만들 수 있었다.
오문수 씨는 고통을 이겨낸 자만이 지을 수 있는 빛나는 미소를 담뿍 머금은 채 “마음을 다스리며 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철저하게 생활습관과 의식을 변화시킨다면 누구든지 살게 되어 있습니다. 잠시 잠깐의 안일한 태도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갈라놓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