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허미숙 기자】
“좋은 것 먹으려 하지 않고 해로운 것 먹지 말자 노력했어요”
나이 40에 느닷없이 닥친 불행! 직장암이었다. 직장암 3기 말이라고 했다.?너무도 황당하여 ‘허허~’ 웃음밖에 안 나왔다.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이때부터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한 죽음의 그림자!?그래서 독하게 결심했다. 철저한 관리에 목숨을 걸었다. 그런 덕분이었을까? 항암치료를 같이 했던 암 병동 동기들이 하나둘 부음을 알렸지만 그는 결국 살아 남았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살고 있는 김동곤 씨(59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직장암 수술 후 19년… 이제는 장기 생존자로 불리며 수많은 암 환자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있는데 그 노하우는 과연 뭐였을까?
설악산을 다녀와서…
김동곤 씨에게 산은 늘 좋았다. 젊어서부터 그랬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전국의 산을 순례했다. 날밤을 새워가며 산행을 즐기곤 했다.
1996년 5월 하루도 친구들과 함께 설악산 산행을 떠났다. 용대리에서 백담사, 오세암, 봉정암, 대청봉을 찍고 다시 내려오는 19시간 코스를 걸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산행을 다녀온 후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변에 피까지 섞여나왔다. ‘치질에 걸렸구나.’ 김동곤 씨 생각이었다. 그런데 피가 멈추지 않았다. 일주일이나 계속됐다. 여전히 피로는 풀리지 않았고, 대변에서는 피까지 섞여나오고….
그래서 가게 된 동네병원. 그 후의 일은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내시경 검사부터 했다. “별일 아니죠?” 김동곤 씨가 물었다.
그러자 담당의사의 대답이 애매했다. “글쎄요? 조직검사를 해봐야 알겠는데요.”
그리고 일주일 후, 다시금 병원을 찾았을 때 담당의사는 전문용어로 많은 말을 했지만 핵심단어는 하나였다. ‘종양’이었다.
참다못한 김동곤 씨가 “딱 잘라 암이라는 거죠?” 물었고 담당의사는 “예”라고 대답했다.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자 내시경 검사를 한 번 더 했지만 바뀐 것은 없었다. 직장암이라고 했다. 3기 말로 진단됐다. 임파선까지 전이가 된 상태이며, 직장에 생긴 암이 커져 대변까지 잘 나올 수 없는 상태라고 했다.
어이가 없었다. 믿을 수 없었다. 나이 40에 직장암? 아픈 데도 없는데 하루아침에 직장암?
“병원문을 나서는 데 허허 헛웃음밖에 안 나왔어요. 그때가 5월이라 병원 뜰에는 벚꽃이 환하게 피어 있었는데 벚꽃마저도 서러움이 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1996년 5월 어느 하루, 김동곤 씨는 40년 그의 생애에서 가장 참담한 절망과 마주해야 했다.
수술, 항암, 방사선까지~ 3개월의 악몽
도무지 믿을 수 없어도, 인정하기 싫어도 꼼짝없이 직장암 3기 환자가 되어버린 김동곤 씨.
“여보 내가 암이래, 참 웃기네.” 비록 아내에게는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암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제 죽는구나.’ 였다. 나이 40에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렇게 건강한데 내가 왜?’
젊어서부터 산행으로 다져진 몸은 군살 하나 없이 탄탄했고, 직장암의 주범으로 알려진 육류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스트레스였어요. 많이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당시 아내 몰래 외도를 했는데 그 관계가 쉽게 정리되지 않아 7~8년 동안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거든요.”
지금도 김동곤 씨는 직장암을 그 벌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직장암 진단을 받았을 때 아내에게 제일 미안했던 그였다.
때늦은 후회를 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린 직장암! 부랴부랴 암 전문병원인 원자력병원에 입원을 했다. 또다시 각종 검사가 이어졌고, 결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최종 진단은 직장암 3기 말이었고, 임파까지 전이는 됐지만 수술은 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수술을 하면 성생활을 못할 수도 있고, 장루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김동곤 씨는 장루라는 말에 펄쩍 뛰었다. “성생활은 못해도 되지만 장루는 차마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장루를 하면 수술이 잘 돼도 자살하겠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한 수술은 다행히 잘 됐다고 했다. 장루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시작된 항암치료 6회, 방사선치료 50회를 받으면서 김동곤 씨는 지옥보다 더한 고통을 맛봐야 했다.
하루에 화장실을 70번이나 가야 하는 현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어디를 가든지 늘 방석을 들고 다녀야 하는 현실! 항문이 헐어서 제대로 앉을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화장실에 메모지와 볼펜을 걸어놓고 갈 때마다 체크를 했어요. 뭘 먹었을 때 화장실에 더 많이 가고, 또 어떤 음식을 먹었을 때 덜 가는지를 체크하면서 고통스런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견뎌냈어요.”
항암과 방사선치료를 받았던 3개월의 시간은 지금도 김동곤 씨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괴로웠던 악몽의 시간으로 남아있다.
목숨을 담보로 모질게 결심하다!
항암과 방사선 치료가 끝났을 때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고 했다. 6개월에 한 번씩 정기검진만 오라고 했다. 하지만 김동곤 씨는 알았다. 앞으로의 삶은 달라져야 한다는 걸.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걸.
그것은 그가 암 진단을 받고 암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암은 결코 완치가 없다는 것! 한 번 생긴 몸에는 언제든 다시 생길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병원문을 나서면서 모질게 결심했다. 그리고 목숨 걸고 실천했다. 그래서일까? 김동곤 씨는 기적의 사나이가 됐다. 암 수술 후 장장 19년의 장기 생존자로 불리며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목숨 걸고 실천했다는 암과 멀어진 생활, 과연 뭐였을까?
1 몸에 해로운 것 먹지 말자
몸에 좋은 것을 먹으려 하기보다는 몸에 해로운 것을 먹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표적인 것은 크게 4가지였다.
첫째, 튀김류는 절대 멀리했다. 기름을 넣고 지글지글 익힌 것은 일체 안 먹었다. 각종 튀김류는 물론 부침개, 달걀프라이까지도 안 먹었다.
둘째, 일체의 간식도 안 했다. 정해진 시간에 먹는 세 끼 식사 위주로만 먹었다.
셋째, 야식도 철저히 금했다. 밤 8시 이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시간을 넘기면 물만 마셨다. 참다 참다 도저히 배고픔을 못 참겠다 싶으면 율무를 쪄서 말리고 기름 없이 살짝 볶아 가루로 만든 것을 뜨거운 물에 한 숟가락 타서 먹었다. 이렇게 하면 율무죽이 되면서 허기를 없애줄 수 있어서 좋았다.
넷째, 과식도 철저히 금했다. 늘 조금 적은 듯이 먹었다. 그래야 몸도 가볍고, 장도 불편하지 않아서 꼭 실천했다.
김동곤 씨는 “먹고 싶은 걸 못 먹는 것처럼 큰 고통도 없더라.”며 “처음 3년간은 정말 힘들었지만 죽음 직전까지 갔다 오니 못할 게 없더라.”고 말한다.
목숨 걸고 철두철미하게 4가지 원칙을 기본으로 하면서 하나하나 먹어봐서 몸에 맞으면 그것을 건강식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것이 바로 강낭콩, 구관모식초, 인산죽염 등이었다. 특히 강낭콩은 해마다 전국의 시골장을 돌며 한 가마니씩 사서 늘 먹었다고 한다. 푹 삶은 뒤 간장으로 간을 해서 먹으면 오래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맛도 좋고 몸에도 좋다며 지금도 즐겨 먹는 건강식이라고 말한다.
2 운동으로 암벽타기를 시작하다
원래부터 좋아했던 산! 암 수술 후에는 날마다 산으로 향했다. 잘 걷지도 못하는 몸이었지만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오늘은 100미터, 내일은 200미터… 점차로 산행거리를 늘려가며 운동을 시작했다. 암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산소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산행은 암벽타기를 시작하면서 정점을 찍게 된다.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마약과도 같았다. 그 스릴에, 그 성취감에 흠뻑 매료돼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암도 두렵지 않았다. 암 환자라는 것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오로지 바위 타는 일에만 열중하다 보면 다른 잡념이 생길 겨를이 없었다.
김동곤 씨는 “암 수술을 하고 장기 생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8할은 암벽타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요즘도 그는 일주일에 세 번은 꼭 암벽타기를 한다. 전국으로 다니며 암벽타기를 즐긴다. 암벽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인사로 통하며 암벽타기 마니아로 살고 있다.
3 욕심을 버리다
암 수술을 하고 김동곤 씨는 아내에게 말했다. “3년 정도는 죽고 없다고 생각하고 생활하라.”고 했다. “돈 달라는 소리도 안 할 테니 직장도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러자 아내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그가 집안일을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살까 걱정도 했지만 크게 욕심을 부리지 않으니 얼마든지 살 수 있었다. 바위 타는 데 별로 돈 들지 않았고, 해로운 음식 먹지 않는데도 큰돈 들지 않았다. 하루하루 스트레스 받지 않는 생활, 홀가분한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비록 지금 생각해보면 이기적인 면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게 산 덕분에 오늘이 있다고 김동곤 씨는 믿고 있다.
2015년 1월 현재 김동곤 씨는…
2015년 1월이면 직장암 수술을 한 지 19년을 맞게 되는 김동곤 씨!
다들 혀를 내두르지만 그는 결코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병원에서는 이미 완치됐다고 말하지만 그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암은 결코 완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전히 암과 멀어지는 항암생활은 현재진행형이다. 하루하루 절제하고 욕심 부리지 않는 삶을 산다.
● 식사시간은 늘 규칙적으로 한다. 아침 8시, 오후 1시, 저녁 6시에는 꼭 밥을 먹는다. 항상 배부르지 않게 먹고 천천히 꼭꼭 씹어먹는다.
● 간식은 안 먹되 과일을 먹고 싶으면 밥 먹을 때 함께 먹는다. 사과 먹고 싶으면 밥 양을 조금 줄이고 사과를 먹는다.
● 저녁 8시 이후에는 절대 먹지 않는다. 장기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해준다.
● 밥은 흰쌀밥에 강낭콩을 넣어서 먹는다. 현미는 소화가 잘 안 돼 포기했다.
● 일주일에 3번은 꼭 산에 가서 암벽타기를 한다. 이틀에 한 번씩 가는 꼴이다. 산에 갔다 오면 그 다음날은 쉰다.
● 장 건강을 위해서 돌찜질을 자주 한다. 돌을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10분 정도 데우면 2시간 정도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다. 이것을 신문지에 싸고 타월로 한 번 더 싼 뒤 배 위에 올려놓으면 소화도 잘 되고 통증도 싹 사라진다.
● 돈 욕심 부리지 않는다. 돈은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쓰면 된다. 앞으로도 돈 버는 일에 욕심 부릴 생각은 없다.
김동곤 씨는 “지금 이대로가 가장 만족스럽다.”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암 수술 후 19년의 장기생존자로서 한 마디 해달라는 부탁에 두 가지를 강조한다. 하나는 “적어도 튀김류만 끊어도 건강이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산은 천연 항암제”라는 것이다.
판단은 독자 여러분에게 맡긴다. 하지만 누구나 암에 걸릴 수 있고, 그것이 내 일이 될 수 있는 현실에서 암과 멀어지는 생활은 늘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