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정유경 기자】
【도움말 | 고려대학교 부부상담센터 정정숙 부소장】
“얼마면 돼? 웃기지 마! 사랑, 돈으로 사겠어.”라는 드라마 대사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2000년에 방영된 드라마 <가을동화>의 한 장면으로 자신을 거부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주인공(원빈 분)의 간절한 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런 주인공의 모습이 멋지고,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맹목적 사랑에 대한 환상 때문에 집착의 또 다른 모습을 사랑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큰 사랑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의 불행을 이끄는 집착, 그 숨겨진 비밀을 들추어 본다.
사랑일까? 집착일까?
결혼 2년 차 신혼 김민규 씨(가명), 박진아 씨(가명) 부부. 그들의 조금 다른 사랑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 남자 이야기
요새는 집에 들어가기가 무섭다. 아기를 갖고 전업주부가 되더니 아내의 간섭이 부쩍 심해졌다. 연애할 때도 자주 시시콜콜 일상생활이며, 회사 이야기를 묻더니 이제는 친한 친구와 회사 동료까지 만나지 말고 집에 빨리 들어오라며 고집을 부린다. 쇼핑할 때도 운동을 할 때도 모두 자신과 함께 해야 한다며 성화다. 어제는 회식 중에 계속 전화를 해서 전원을 꺼놨더니 집에 돌아가 한바탕 싸웠다. 또 전화벨이 울린다. 분명히 아내일 것이다. 임신한 아내에게 화를 낼 수 없고. 정말 살맛 안 난다.
그 여자 이야기
오늘도 온종일 남편이 회사에서 오기만을 기다린다. 난 남편을 정말 사랑해서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할까, 어떤 메뉴로 점심을 먹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가 궁금해 자꾸 전화하고 싶다. 남편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친구들도 못 만나게 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친구들과 만날 때도 나를 데려가면 좋을 텐데…. 그나저나 오늘은 남편이 늦는다. 전화를 걸어본다. 벌써 9통째 받지 않는다.
집착은 상처를 남기고
현재 박진아 씨는 남편 김민규 씨에게 지나치게 몰입되어 있는 이른바 ‘집착’ 증세를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그 사람 이외에는 누구도 자신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고 느낀다. 삶과 인간관계의 통로가 상대방과 연관되어 있어서 완전하게 자신과 하나가 돼야만 안심하는 경우가 많다. 늘 같이 있고 싶고, 모든 것을 알고 싶고, 스킨십을 하고 싶으며, 그 사람 생각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 막 사랑에 빠졌을 때 대부분 겪는 열정이 충만한 사랑의 모습이다. 그러나 사랑이 시작됐을 때는 나의 반쪽을 만났다는 황홀감과 ‘내가 찾던 이 사람이다.’라는 느낌이 들어 콩깍지가 씌더라도 대부분 점차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고려대학교 부부상담센터 정정숙 부소장은 “보통 밀월 기간이 지나면 점차 자기 생활로 돌아와 사랑과 자신의 삶이 균형 있게 공존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며 “그러나 과도한 관계의존이나 강박적인 사랑으로 상대방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상대방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열정적인 사랑을 느낀다.”고 말한다.
집착하는 사람의 행동은 자신뿐 아니라 상대방의 행복한 삶까지도 방해한다. 상대방이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삶을 찾으면 불안해지고,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고만 싶다. 상대방을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제공하거나 필요한 것을 내주지 않기도 한다. 개인 이메일, 휴대전화를 확인해 그의 생각과 인간관계를 파악한다. 주변 사람에 대한 의심, 지나친 질투, 친분 관계를 통제할 수 있고, 심한 경우에는 협박, 폭력, 자해 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아이가 있는 부부라면 아이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부모가 집착에 빠져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하면 그 감정은 아이에게 돌아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아이가 되기 쉽다. 또한 상대방에게 집중하느라 아이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아이도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 존재라는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사랑, 중요하지만 삶 전부는 아냐
정정숙 부소장은 “사랑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은 공허함과 낮은 자존감이 형성돼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에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무엇인가를 통해 그것을 위안 받으려고 하고, 그 대상은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이 되기 쉽다. 자신은 사랑받지 못한 하찮은 존재라고 느끼는 반면에 사랑하는 사람은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에 가지고 싶고, 옆에 두고 싶다는 것이다.
또한 사랑이라는 이름이면 비상식적인 행동도 이해하고 용서하는 사회적 분위기다. 지나친 집착을 남들보다 깊은 사랑일 뿐이라고 가볍게 여기고, 심지어는 집착이 동반된 사랑을 원하고 동경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부부나 연인 사이라면 소유욕, 열정, 불안 등이 조금씩은 있을 수밖에 없고, 사랑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정 부소장은 “사랑은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며 “우리 일상생활도 영양소처럼 여러 가지 가치가 균형을 이룰 때 건강한 삶이 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잠깐 사랑이 삶 대부분이 될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사랑에만 의존하고 집착한다면 문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나친 집착인지 아닌지는 개인, 문화 등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지만 자신의 삶과 상대방의 삶에서 문제가 발견된다면 변화가 필요하다.
삶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
지나친 집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동과 마음가짐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첫 번째다.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자신이 상대방을 어떻게 여겨 왔는지 떠올리며, 지나친 부분에 대해 변화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때는 남과 다른 자신의 사랑을 너무 자책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에게 지난 일을 사과하고 함께 개선점을 고민하는 것도 좋다.
현재 자신에게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 가치를 목표로 삼고 상대방을 떠올리는 시간과 함께 있는 시간을 조금씩 줄여나간다. 그리고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을 해냈다면 자신을 사랑하고 칭찬해주자. 그래도 여전히 중요한 것이 사랑뿐이라면 사랑하는 상대와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 본다. 그동안 사랑에 집중하느라 끊어졌던 관계를 다시 이어서 자신의 자존감을 되찾자.
오랫동안 사랑에 집착해 왔다면 세상을 보는 시야도 좁고 짧아졌을 것이다. 그 사람이 없는 세상은 고개를 돌려서 보기 버거울 정도였다면 좀 더 길게 보고 넓게 보는 여유를 가지자. 세상은 넓고 상대방 이외에도 사랑할 대상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자.
자신의 지나친 집착을 알고 있지만 해결할 수 없다면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는 것이 좋다. 상담은 자신의 현재 상황을 직시하고, 좀 더 쉽게 집착을 줄이고 상실감에서 벗어나는 빠른 방법 중 하나다.
열정이 없어도 사랑이다
지나친 집착이 존재하는 관계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다. 상대방이 아닌 자신이 세상이 중심이 되어야지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열정이 식었다고 해서 사랑이 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뜨거운 열정은 없어도 그 관계 속에서 서로 믿고 편안한 친밀감을 느낀다면 그것도 사랑이자 행복이다. 지나친 집착의 모습이 아니어도 열정은 충분히 되살릴 수 있다. 상대방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방법을 찾고, 노력한다면 열정은 사랑을 불씨 삼아 다시 타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