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박길자 기자】
【도움말 | 국제정신분석가 이무석】
이홍선 씨(53세 가명)는 대학 졸업 후 25년 간 은행에서 근무하며 지점장까지 지냈지만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퇴직금으로 주식투자에 나섰다가 실패한 후 부부싸움이 깊어졌다. 젊었을 때 아내 귀한 줄 몰라 몇 번 바람피운 게 화살이 돼 날아왔다. 이 씨 부부는 심한 다툼 끝에 이혼했다. 설상가상 위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 수술 날짜를 기다리며 누운 그는 “신이 원망스럽다”며 눈물을 훔쳤다.
성공한 사람들은 역경지수가 높다
불행이 떼 지어 몰려올 때가 있다. 역경 앞에 선 인간은 나약하다. 악운이 사라지길 고대하며 점집을 들락거리다 “삼재(三災)가 끼었다.”는 역술인의 말에 고액을 주고 부적을 사기도 한다.
그러나 역경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개 역경지수(Adversity Quotient)가 높다. 역경지수(AQ)는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폴 스톨츠가 1997년 발표한 개념으로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해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스톨츠는 AQ가 높은 사람이 IQ(지성지수)나 EQ(감성지수)가 높은 사람보다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주장했다.
스톨츠는 역경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포기자(quitter)형’ ‘안주자(camper)형’ ‘정복자(clibmer)형’으로 분류해 설명했다. 쿼터(포기자형)는 역경지수가 낮은 불평꾼들이다. 역경에 부딪혔을 때 포기하거나 도망가 버리는 사람이다. 좌절의 원인을 늘 외부 탓으로 돌린다. 끊임없이 투덜대면서도 결코 시도하지 않는다.
캠퍼(안주자형)는 장애물을 이겨내기보다 안주하는 스타일이다. 새로운 대안이나 극복방법을 적극 찾기보다 주저앉은 채 현상 유지에만 급급해 한다. 클라이머(정복자형)는 역경지수가 가장 높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역경이나 장애물을 극복한다. 자신만 역경을 이겨내는 게 아니라 동료들을 격려하고 북돋우면서 함께 정상을 정복한다. 스톨츠는 이런 능력을 역경지수라고 개념화했다.
부도난 사업가, 동료에게 배신당한 사람, 남편의 외도, 입시에 실패한 학생, 아내가 치매에 걸려 고통을 겪는 할아버지…. 같은 역경도 훨씬 더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 우울증을 앓다 급기야 자살까지 시도한다. 반면 역경을 기회로 전환시켜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이들도 있다.
이무석 국제정신분석가(전 한국정신분석학회장)는 “유난히도 역경을 크게 느끼고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 진단했다.
완벽주의자는 만사가 계획대로 흘러가야 한다. 원하는 시간에 일이 일어나야 하고, 있을 자리에 모든 게 있어야 한다. 이 전 회장은 “강박적으로 쫓기듯 인생을 사는 강박성격의 소유자”라며 “융통성이 없고 네모반듯한 틀에 자신을 넣어야 안심이 되는 성격”이라고 덧붙였다. 이를테면 손톱이 자기 생각보다 약간 더 길면 잘라야 된다. 이들에겐 역경은 재앙이다.
갑상샘암을 선고받은 40대 여성 박희선 씨(가명). 갑상샘암은 예후가 좋아 치료만 잘 받으면 금세 호전된다고 의사는 설명했다.
그러나 박 씨에겐 암 선고가 도무지 견디기 어렵다. 내면에선 불안과 좌절, 무기력감이 솟구쳤다. “완벽주의적 성격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 그런데 암 진단을 받았으니 주도권이 의사에게 있다. 손톱은 손톱깎이로 잘라내면 되는데 암은 그럴 수 없다. 혼자 있는 시간이면 공상 속 불안은 더 커진다. 보통 갑상샘암 환자의 불안 수치가 5라면 박 씨는 9나 10이다. 주도권을 가질 수 없어 화가 나고,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다 멀어진다.”(이 전 회장)
완벽주의자는 왜 역경 앞에서 무너지나?
특히 40대 이후 65세까지는 중년기다. 이른바 사추기다. 우울해지기 쉬운 시기다. 이때 실직, 사업 실패, 배우자의 암 선고로 정신적 뿌리마저 흔들리기 쉽다.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같은 정신병, 알코올중독, 도박, 마약에 빠지기도 한다.
역경의 긍정적 효과를 보여주는 실험결과가 있다. 쥐를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에는 일정한 숙제를 통과해야만 음식을 주고, 다른 한 그룹에는 숙제를 주지 않고 원하는 대로 맛있는 것을 먹게 했다. 결과는 행복한 쥐들의 불행으로 끝났다. 놀면서 맛있는 것만 먹고 산 쥐들이 비만과 무기력에 빠져 죽은 것이다. 그러나 먹기 위해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숙제를 풀어야 했던 쥐들은 체중 증가도 없었고 오히려 건강했다.
역경을 겪을 때 인간은 ‘왜 내게 이런 일이?’라는 의문을 갖는다. 평생을 바르게 살아온 자신에게 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는지 납득하지 못해 어리둥절해 한다. 이 전 회장은 “인생은 설명되지 않을 때가 많다.”며 “그러나 시간이 지나 뒤돌아보면 이해될 때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 전 회장의 얘기. “역경이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기회가 됐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많다. 역경은 기회다. 나도 40년 전 의대생 때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건강이 나빠져 폐결핵과 간염으로 사경을 헤맸다. 그러나 꿈을 의지하고 잘 견뎌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그때를 생각하면 힘이 난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의사에겐 꼭 필요한 능력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비난하고 저주한다. 심지어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기를 바란다. 이 전 회장은 “투사를 많이 쓰는 성격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심리가 투사다. 분노를 숨기고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남에게 투사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다시 자기에게 돌아온다. 문제의 심각성이 여기에 있다. 자기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
역경은 누구나 겪을 수 있다
역경이 닥쳤을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그 방법을 배워보자.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부딪칠 수 있는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재수 없는 인간이라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장가를 잘 못 갔기 때문이야.” 자신의 운명을 탓하거나, 주변사람을 원망하는 이들은 역경 앞에서 무너진다. 교통사고로 한 팔을 잃은 남성은 “나 같이 불행한 인간은 없다”며 한탄에 빠진다. 두 팔이 멀쩡한 아내와 자식이 돌봐주지 않는다며 원망한다. 세상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여긴다. 이 전 회장은 “한 팔이 없어 불편한 객관적 현실보다 ‘난 팔 없는 놈’이라는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현실이 자신을 불행하게 한다.”고 말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을 내가 당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한쪽 팔을 잃은 것은 너무 불행하고 불편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인식의 전환이 행복을 가져온다는 얘기다.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이 많을수록 역경을 쉽게 이겨낼 수 있다
외로운 사람은 역경 극복이 어렵다. 완벽주의적 성격 역시 마찬가지다. 지지체계(support system)가 약하기 때문이다. 지지체계는 평소 눈에 띄지 않는다. 역경이라는 태풍이 휘몰아쳤을 때 두드러진다. 혈육이나 직장, 자신이 일궈놓은 업적 등이 시스템이 돼 우리를 지탱해준다.
평소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부부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친구들의 애경사에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 친구가 아프면 병문안을 가 위로하고, 경제적 곤란에 빠지면 돈도 빌려줘야 한다. 출세나 돈 버는 일에만 매달리면 나중에 도와줄 사람이 없다. 주변을 잘 챙기고 베풀며 살아야 한다. 친밀한 인간관계가 역경을 이겨내는 자산이 된다. 외톨이가 되지 말고, 모임에는 빠지지 않아야 한다.
▶자존감이 있어야 역경을 이겨낸다.
자기 가치감과 자신감은 정신적인 힘의 기초다.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야. 남들도 나를 귀하게 여길 거야.” 이것이 자기 가치감이다. 자신감은 “나는 주어진 일을 완벽하겐 못해도 어느 정도는 해낼 수 있다.”는 마음이다.
자존감이 낮으면 역경이나 스트레스가 왔을 때 와르르 무너진다. 역경 때문에 무너지는 게 아니다. 역경이 오기 전 이미 금이 조각조각 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역경에 처하면 자기비난기능이 활발해진다. “내가 못나서, 학벌이 나빠서 사업이 망한 거야.” 자신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목소리가 강해져서 자존감을 무너뜨린다. 실연이나 재시험 때도 자존감이 공격당할 정도다.
특히 죄책감이 자존감을 깨뜨린다.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 무의식에서 자신을 비난한다. 반면 자기위로기능은 약해진다.
자신을 맹렬하게 탓하는 이들은 ‘당시 그런 선택을 안 했으면 불행을 겪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빠져 끊임없이 과거를 헤맨다. 이 전 회장은 “자기 탓은 성격이다. 자기비난기능이 너무 강하면 자기 탓을 많이 한다.”고 설명했다.
“내가 잘못한 거야. 나 때문에 가족까지 못살게 됐어.” “친구들은 다 행복하게 잘도 사는데 내 꼴은 이게 뭘까?” 자기 비난을 잘하는 성격은 아주 어릴 때 형성된다. 엄한 부모 밑에서 자랐거나 사랑받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 매를 많이 맞고 자라난 사람일수록 자기비난의 소리가 크다. 이 전 회장은 “자기비난의 소리가 내면에서 울려 퍼질 때 그 소리가 유년기 부모의 음성과 아주 비슷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 전 회장은 “자존감을 유지해야 길이 열린다.”고 강조했다. ‘너는 무능한 놈이야.’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인생에는 이기는 게임도 있고 지는 게임도 있다. 자기를 추스르고 위로하는 기능을 활용해야 한다.
자기비난의 목소리를 다스리고, 자기위로기능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잖아. 이 고비를 기어이 이겨낼 거야.” “이보다 어려운 일도 해냈잖아. 이번에도 문제없어.” “나는 지구상에 유일무이한 가치 있는 인간이야.” 자존감을 북돋아줘서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피할 수 없는 역경이라면 온몸으로 즐겨야 한다. 오늘 무엇인가를 하면 내일은 더 나아진다.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태도가 역경을 헤쳐나가는 원동력이다. 이 전 회장은 “한 번 부러졌다가 붙은 뼈는 무쇠처럼 단단해져서 여간해선 부러지지 않는다.”며 “적당한 좌절은 인격의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무석 전 회장은 전남의대 정신과 전 교수로 한국정신분석 학술상을 수상했다. 영국과 미국에서 350여 시간의 개인 분석을 받은 국제정신분석가다. <30년 만의 휴식> <자존감>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