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지영아 기자】
“직접 일군 텃밭 가꾸면서 하루해가 짧아요”
충남 홍성군 홍동면 산자락에 위치한 신토불이 실버타운 ‘은퇴농장’. 1995년 8월 문을 연 이곳에선 벌써 10년 째 도시에서 은퇴한 노인들이 전원생활과 노동의 즐거움을 느끼면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40여 년 동안의 교직 생활을 마치고 9년 전부터 은퇴농장에서 생활하는 김경우 옹(80세) 역시 낮에는 농사일과 취미생활, 저녁에는 다른 노인들과의 친목도모로 지루할 새가 없다.
손수 일군 텃밭에서 수확하는 즐거움으로 심신이 점점 더 건강해지고 있다는 그의 행복한 노년생활 이야기를 들어본다.
활발한 사회활동으로 국민훈장도 받아
법대를 다니면서 판사의 꿈을 키웠던 김경우 옹은 사법시험 준비중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고향인 전남을 떠나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어려운 시절에 대학까지 다닐만큼 여유롭게 살았지만 전쟁으로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그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의 역할을 맡게 된다. 결국 법조인의 길을 포기하고 평소 좋아하던 책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교사 생활에 발을 들여놓는다.
“일제시대 때 중학교를 다니면서 꼭 법조인이 돼서 우리나라 국민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런 6.25 전쟁으로 인해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교사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 사회선생님을 하게 됐죠. 그렇게 시작한 교사생활은 아이들과 책을 좋아해서인지 제 인생의 반평생 이상을 하게 됐습니다.”
교직 생활을 하면서도 활동적이었던 김경우 옹은 여러 가지 사회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했다. 특히 초창기 보이스카우트가 한국에 잘 자리잡을 수 있도록 그는 보이스카우트 연수, 훈련에 모두 참가하면서 한국대표로 세계잼보리대회에도 여러 번 나갔다. 캐나다, 미국, 일본, 대만 등 세계 20여 개국에 보이스카우트 한국대표로 활동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나라로부터 인정받아 국민훈장 중 동백장도 받았다.
“보이스카우트 한국대표로 안 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습니다. 그 당시는 세계에 우리나라의 인지도가 낮아서 더욱 더 열심히 활동했죠. 그런 활동을 나라에서도 인정받아 정년 퇴직할 때 즈음 국민훈장인 동백장도 받았습니다.”
손수 일꾼 텃밭에서 수확할 때 성취감 느껴
고등학교 선생님을 거쳐 교장선생님까지 40여 년 동안 교육계에 있던 김경우 옹은 94년도에 65세의 나이로 정년퇴직을 한다. 대부분 퇴직 후 조용한 생활을 하는 것과 달리 왕성했던 사회생활로 인해 그의 집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손님들이 찾아오기 일쑤였다.
“퇴직 후에는 편안히 취미생활을 하면서 보내고 싶었는데 친한 선ㆍ후배들의 연락 때문에 집에 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간만에 한가한 시간이 나서 대학교 시절부터 해왔던 붓글씨를 쓰려해도 수시로 울리는 전화 때문에 먹을 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죠.”
또한 자신의 손님 시중뿐만 아니라 몸이 아픈 아내를 돌보는 며느리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김경우 옹은 편안히 노후생활을 보낼 수 있는 곳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가까운 지인을 통해 공기도 맑고 직접 농산물도 가꿀 수 있는 은퇴농장에 대해 듣고 남은 여생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97년에 농장에 온 이후 지금까지 9년 동안 농장생활에 만족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
은퇴농장에는 현재 10명 정도의 노인들이 TV, 전화기, 욕실, 싱크대가 갖춰진 7∼10평형 원룸식 독채에서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 다른 실버타운과 달리 이곳 노인들은 7,000평 밭에서 생산되는 마늘, 깻잎, 두릅 등 유기농산물을 하루 두세 시간씩 직접 재배·가공해 유기농 전문매장에 판매한다. 판매 수익의 30%가 이들 몫인데 개인이 일한 만큼 매달 평균 10∼40만원 정도씩을 받으며 그 돈으로 노인들은 은퇴농장 생활비 34만원을 내고 나머지는 용돈으로 쓴다.
“평소 농사일을 해 본적은 없지만 이곳에 내려오면서부터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키우고 싶은 농작물이 있으면 농장에서 밭을 빌려 자신이 직접 기를 수도 있죠. 손수 일군 텃밭에서 자라는 농작물을 보는 재미가 어찌나 좋은지 아마 농사를 지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겁니다.”
김경우 옹은 농장에서 빌린 20평 정도의 텃밭에서 호박, 오이, 토마토, 고구마 등을 키우고 있다. 밭을 빌린다고 하면 농장의 주인 부부가 씨만 뿌리면 될 정도로 밭을 갈아주므로 농사일에 초보인 노인들도 힘들지 않게 자신만의 텃밭을 가꿀 수 있다.
“봄, 여름에 황토를 맨발로 걸으면서 농사일을 하다보면 건강도 지키고 자신이 일한 만큼 돈도 벌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접 키운 농작물을 텃밭에서 수확할 때의 성취감과 더불어 수확한 농작물을 서울에 있는 자녀들에게 보냈을 때 맛있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농장일과 취미생활로 새로운 인생찾아
하루 3∼4시간 정도의 농장일을 마치고 나면 김경우 옹은 젊었을 때부터 죽 해오 던 붓글씨, 테니스, 국궁 등의 취미생활을 한다. 특히 대학교 때부터 해오던 붓글씨는 전라남도 대표로 도전에서 입선할 정도로 수준급이다.
“붓글씨는 정신을 집중하지 않고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평소 정년퇴임하고 느긋하게 붓글씨를 쓰고 싶었는데 이 곳은 조용하고 아늑해서 작품 활동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라서 아주 만족입니다.”
공기가 맑고 소일거리가 있어도 농장 안에만 있으면 답답할 수 있으므로 매주 금요일마다 농장의 차를 타고 노인들 모두 덕산온천에 가서 온천욕을 즐긴다. 또한 사고싶은 물건이 있으면 농장에서 8㎞ 정도 떨어져 있는 광천의 5일장에서 쇼핑을 즐기기도 한다.
농사일과 취미생활로 아플 새도 없이 하루해가 후딱 가버린다는 김경우 옹은 무엇보다도 “직접 일해서 뭔가를 얻을 수 있는 농장의 생활과 취미생활을 마음껏 자유롭게 즐길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앞으로 남은 여생도 농장에서 황토를 맨발로 밟고 직접 가꾼 텃밭을 일구면서 자유롭게 지내고 싶다는 김경우 옹. 그의 모습에서는 자신감이 사라진 은퇴한 노인들에게서 느껴지는 외로움과 무력감의 그림자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찾아볼 수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