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송화정 기자】
“마음을 비우고나니 희망이 보였어요”
따뜻한 봄햇살이 가득한 오전의 햇살 속에서 쑥쓰러운 듯 가볍게 인사를 건네는 이복만씨(64)를 만났다. 농사를 짓는 분답게 조금은 검게 그을려진 피부와 함께 섞여나오는 강원도 사투리가 친근하기만 하다. 그 어디에서도 병색을 찾아볼 수 없는 그에게서 폐암과의 전쟁을 치르던 때의 이야기를?들어본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소에게 여물을 주고 농작물을 살피며 그날의 할 일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차가운 아침바람을 맞아서인가. 가슴이 답답하고 목에 무언가가 걸린 듯 하더니 기침과 함께 가래가 올라왔다. 별 생각없이 그것을 뱉어내던 그는 문득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에 붉은 피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지난 98년 8월의 일이었다. 아마도 결핵인 듯했다. 요즘들어 기침을 자주 하는 듯하더니…. 그는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병원을 가 봐야지란 생각만을 했을 뿐 미루고 미루다 마을 보건소를 찾은 것은 그해 11월에 이르러서였다.
병을 숨기는 의사의 태도에 치료 포기
보건소에서 검사를 마친 후 갸우뚱하던 의사선생님은 결핵은 아닌 듯 하다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을 대신 전했다.
바로 강릉병원을 찾은 그는 정밀 검사 끝에 폐암이라는 판정을 받게 되었다.
“검사결과가 나왔을텐데 일주일이 넘도록 의사가 병명을 가르쳐주지 않더군요. 보호자만 데려오라는 겁니다. 처음엔 황당했죠. 병을 치료하자고 병원에 왔는데 병명도 안 가르쳐 준다니. 제가 워낙에 성격이 불같은 데가 있다보니 바로 의사선생한테 언성을 높여 버렸죠. 무슨 병인지 알아야 대비를 할 게 아니냐고. 그랬더니 그때서야 폐암이라고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6개월밖에 못산다나요. 충격을 받을까봐 말을 피했던 모양인데 오히려 그것에 더욱 화가 났었습니다.”
예상도 못했던 암이라는 선고에 어리벙벙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어 잠시 바람을 쏘이기 위해 병원 주위를 돌아다니다 병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자신의 침상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간호사 말로는 자신이 오늘 퇴원하는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이에 간신히 가라앉았던 화가 다시 끓어올랐다. 어차피 치료를 하나 안하나 6개월밖에 못산다는 말을 떠올리며 ‘그냥 집에서 편히 살다가 죽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 폐에 자리잡은 암세포
치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그를 처남이 막아섰다.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처음에야 암이란 것을 알고 놀라긴 했지만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죽겠지라는 생각에 죽는다는 것에 그리 큰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 자식들 얼굴이 아른거리더군요. 그래서 치료라도 받아보자 싶었지요. 그 길로 하루 한 갑 이상 피우던 담배도 바로 끊어버렸습니다.”
그 다음날 바로 서울 원자력병원으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좀더 자세히 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왼쪽 폐에서 생겨난 암이 임파선으로 이어지며 오른쪽에도 전이가 되어있는 상태라 수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를 담당했던 이재철 과장은 그에게 굉장히 힘들겠지만 방사선 치료와 약물치료를 함께 받아보는 것을 권했다. 죽음이란 것을 각오한 상태에서 그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었기에 그러자고 약속을 하고 바로 치료에 들어갔다.
무엇이든 해보고 죽자
그때부터 강원도와 서울을 오가며 암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약물치료는 생각 이상으로 힘이 들었다. 빠지는 머리카락과 울렁거리는 속을 타고 올라오는 약 냄새는 끔찍하리 만큼 그를 힘들게 했다.
그때 동생의 처남이 췌장암으로 세상을 뜨는 일이 발생했다. 사돈이었던 그는 돈을 쓰고 힘들게 몸을 고생시키며 치료를 받다가 죽기 싫다며 치료를 거부한 채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차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거라면 치료라도 한 번 제대로 받아보다 죽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든 안해보는 것보다 해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런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약물치료를 버틴지 3개월이란 시간이 흘렀다. 꾸준한 항암치료와 약물치료가 효과를 보이며 암세포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네 번으로 예정되어 있던 약물치료를 세 번만에 끝낼 수 있었다.
“의사선생님이 기적이라고 하시면서 저보다 더 좋아하시더군요. 이제 곧 죽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비우며 지내고 있었는데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두 달 후 암세포는 더욱 작아져 엄지손톱 반만한 크기로 줄더니 3개월 후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그는 “암세포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상추대와 개영지를 달여마셔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다른 민간요법을 하질 않았습니다. 의사선생님 말씀이 어떤 암치료제든 암을 치료한다면 굉장히 독한 것이라 안그래도 항암치료로 힘든 몸에 독한 약을 더 들이붓는 격이 라더군요. 그래서 민간요법은 미루고 미루다 항암치료를 어느 정도 끝낸 상태에서 시작했습니다.”
암에 좋다는 것은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 많이 먹기 시작했지만 그 와중에 가장 효과가 좋은 것은 상추대를 삶아 물 대신 음용하는 것이었다. 조선 상추를 오래 기르며 그 잎을 따 먹다 보면 점점 대가 길어지고 결국 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이때 그 대를 꽃과 함께 뿌리째 물로 끓여 마시는 방법이다. 그는 집앞 텃밭에 씨를 뿌려 상추를 직접 재배해서 먹었다. 이와 더불어 참빛나무와 개영지를 함께 삶은 물을 주기적으로 마셨다.
“참빛나무와 자두나무에서 자란 영지버섯과 함께 삶아 먹으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집 뒤에 있던 살구나무에서 개영지가 자라더군요. 원래 그런 버섯은 죽은 나무에서나 자라는데 신기하게도 살아있는 나무에서 자라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살려고 그랬나봅니다. 자두나무나 살구나무나 비슷한 것들이었으니 운이 좋았던 셈이었죠.”
또한 식사 때에는 항상 쌀에 보리나 조, 수수, 감자 등의 다른 잡곡을 섞어 넣어 먹었으며 해산물도 자주 섭취 했다.
또 한 번의 위기, 결핵 그리고…
작년 1월, 정기검진을 위해 병원을 찾은 날. 담당의사가 폐에 이상이 생겼다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얼마 전부터 미열에 기침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그저 감기려니 하며 약만 먹으며 지냈는데 영 이 기침이 잦아들지가 않는 것이었습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정기검진을 위해 병원을 찾은 후 의사선생님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죠.”
폐렴같다고 하기에 약을 받아들고 2주간 먹었으나 차도가 없었다. 다시 병원을 찾아 검사를 받아보니 결핵이었다. 항암치료로 폐가 많이 약해진 탓이었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병원에서 지어준 약을 6개월간 꼬박꼬박 복용했다.
현재 그는 그 어떤 약도, 그 어떤 병도 없이 예전의 건강한 몸을 되찾아 여전히 아침부터 농사일로 분주하다.
“살고 죽는 게 다 하늘에 계신 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라 때가 되면 언제든 가겠지라고 생각하며 마음 편히 지냈는데 그런 마음이 많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마음만으론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네요.”
마음의 부자라는 것이 그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유로운 웃음에 덩달아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