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양미경 기자】
“죽음을 망각하니 암도 사라지더군요”
삶에 대한 경건함…. 한 번 죽음을 예약 받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生)의 의미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심광명 씨는 대장암 말기 선고를 받고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망각하고 지냈다. 남들은 ‘기적’이라 부르지만 “삶과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그를 만나보았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불치병’을 털고 일어난 사람들에게 ‘기적’이라는 말로 경탄을 보내기도 한다. 한 번쯤 ‘인생의 기적’을 겪어 보고픈 만인의 바람을 이룬 심광명 씨(56). 한 때는 사람들의 “복 받았다”는 인사말에 어깨가 들썩하기도 했다는 그의 말투에는 신바람이 묻어난다.
밝은 마음에는 죽음이 깃들지 않는다
십 수년 동안 외항선을 탔다는 심광명 씨. 사람들은 외항선원 하면 고독하고 힘든 직업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망망대해를 굽어보며 넓은 세계를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아십니까?”
그의 몸 속에는 천성적으로 어둠의 인자는 없는 듯 보였다. 힘들었던 기억을 반추할 때도 언제나 그때의 즐거운 추억들만 끄집어내는 참 좋은 선택적 기억회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3개월 내리 설사만 했습니다. 그때가 배를 탈 때였는데 음식을 잘못 먹어서 배탈이 난 모양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증세가 회복될 줄 모르자 그제서야 심광명 씨는 배가 정착할 때마다 병원에 들러 검사를 받아 보았다. 그러나 호주, 미국, 영국, 일본… 들르는 나라마다 십이지장염이라는 판정을 내리며 같은 약을 주었다고 한다.
“아무리 약을 열심히 복용해도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한국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검사를 받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대장암 말기라고 하더군요.”
잠시의 짧은 호흡도 없이 그는 말기 암을 이야기했다. 벌써 14년 전의 일이라 때론 그때가 혹 꿈이 아니었을까 여겨지기도 한다는 그는 죽음을 심각하게 말하지 않았다.
디스코 왕, 산으로 들어가다
외항선원의 고달픈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심광명 씨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배를 타고 이 나라 저 나라를 유랑하던 때의 재미난 이야기들과 일본에서 디스코 경연대회 1등을 차지했던 무용담을 늘어놓는 편이 그에게는 훨씬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의 아름다운 기억 속에는 장 유착으로 18일 동안 물만 먹으며 고통을 견뎌야 했던 아픔도 포함되어 있다.
“1차 수술 후 장 유착으로 가스가 방출되지 않았습니다. 어찌나 고통스럽던지 그 자리에서 차라리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3주 가까이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하다 보니 70kg대의 몸무게가 48kg까지 빠졌습니다.”
지금도 여릿여릿 마른 몸을 가지고 있는 부인 김춘선 씨 역시 남편의 통증을 함께 느끼던 당시 30kg대까지 살이 빠졌다. 둘이 함께 견뎌낸 고통의 터널에 조금 밝은 빛이 비칠 무렵 의사는 다시 2차 수술을 받을 것을 권했다.
“항문을 옆구리에 뚫어준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제 병원에서 나갈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땐 제 집사람도, 저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남은 여생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요양이나 하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저 세상으로 떠날 결심을 했습니다.”
앞으로 몇 개월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말을 뒤로 하고 심광명 씨는 그렇게 산으로 올라갔다.
죽음을 망각하다
“병원을 나올 무렵 종종 찾아드는 말기 암의 고통으로 혼자서 산에 들어갈 생각을 했습니다. 집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저와 함께 머물길 원했지만 차라리 혼자 아픔을 견디면 견뎠지 이미 많이 몸이 허약해져 있는 집사람과 그 고통을 나눌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산에 들어간 심광명 씨는 그때부터 철저한 식이요법을 시작했다. 육식은 일체 금하고 나물밥으로 세끼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대부분의 간은 된장으로 맞추었으며 직접 유기농법으로 농사를 지어 식생활을 해결했다.
“녹즙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민들레, 미나리, 돗나물, 신선초를 구했는데 그 당시에는 녹즙기가 없어서 그냥 질근질근 씹어먹었습니다. 그리고 효모와 버섯의 균사체에서 추출한 다당체를 꾸준히 섭취했습니다.”
음식이라고 만들어진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뭐든 먹을 정도로 워낙 식성이 좋았던 심광명 씨는 몸에는 좋지만 쓰거나, 씹기가 불편해 남들이 피하는 것들도 타박하지 않고 끈기있게 복용했다.
“웬만한 약초나 나물도 그냥 씹어 삼키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저였지만 딱 한 가지 못 먹겠다는 생각이 든 음식이 있었습니다. 바로 케일입니다. 그때 케일이 몸에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곡밥에 케일을 쌈해 먹었는데 어찌나 줄기가 억세고 향이 강한지 먹다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습니다.”
단군신화에 웅녀가 마늘과 쑥만 먹고 100일을 견딘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심광명 씨의 산 속 생활은 그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거의 2년 4개월을 산에서 생활했습니다. 사실 병원에서는 길어야 3개월 정도로 봤는데 그에 비하면 참 오랫동안 견뎌낸 셈이지요. 하지만 전 죽음을 망각하고 지냈습니다. 날짜도 세지 않고 달력도 보지 않았어요. 그저 하루하루에 충실하며 자연과 더불어 농사를 짓고 나물을 캐며 산을 벗삼아 살았습니다.”
잊었다고는 하지만 죽음은 시시때때로 그를 괴롭혔다. 아침 햇살이 밝게 비치고 만물이 그 빛에 반짝일 때는 견딜 만 했지만 가을이 오고 낙엽이 떨어지면 산 속에서 밤을 구워먹다가 때론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그럴 때는 배에다 주먹질을 하며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며 호기어린 협박도 해주었다고 한다.
산 속 생활이 1년 정도 되었을 때 심광명 씨는 부인 김춘선 씨와 함께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여행을 떠났다. 1년만에 다시 장 유착이 찾아들었기 때문에 둘은 이미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시점이었다. 고통과 함께 설악산으로 여행을 떠난 심광명 씨와 김춘선 씨는 그 여행을 참 좋은 추억으로 기억한다.
“장 유착이 일어나 2박 3일의 여행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날 복통과 함께 변을 보았습니다. 까맣게 탄 변을 한 무더기 쏟아낸 후에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참 신기하게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허기를 참지 못해 김밥 3인분을 혼자서 다 먹어치웠습니다.”
그렇게 여행을 끝내고 다시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후 그는 아무런 증상을 느끼지 못했다. 기적처럼 고통은 사라지고 또 그렇게 죽음을 망각하고 지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나니 사실 병원은 다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불확실한 희망이었지만 암이 사라졌다고 믿고 싶을 따름이었습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래도 제 뱃속에 암 덩어리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는 이야기로 죽음을 확인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부인 김춘선 씨는 그런 남편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재검사를 설득했다. 산으로 들어가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받은 검사. 그는 더 이상 암 환자가 아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의사들도 혀를 내둘렀지만 분명한 건 그의 뱃속에 퍼져있던 종양세포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그렇게 죽음을 순리처럼 받아들이며 지냈던 것이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자포자기했더라면 장성한 아들의 자랑스런 모습도 보지 못했을 테니까요.”
지금은 대청댐 옆에 있는 옥천의 산 속에 노후를 보낼 집을 지으며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이 행했던 식이요법과 식품들을 전해주는 일을 하고 있는 심광명 씨. 그는 죽음을 망각했고, 그에게서 망각된 죽음은 그를 떠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