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조아름 기자】
이제껏 ‘건강다이제스트’에서 몸담고 있으면서 채식을 하는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났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이는 재작년 초여름에 만난 ‘베지닥터’에서 채식을 실천하는 의사였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채식해야지. 몸에도 좋고, 환경도 보호하고, 가축살해 장면도 끔찍하니까.’라는 생각을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공표했다. “저 앞으로 채식할 거예요.”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날의 ‘다짐’은 다음날 저녁 맛있게 구워진 삼겹살과 함께 쌈 싸먹고 말았다…(털썩)이런 의지박약 조 기자~
그 뒤로 “채식이 몸에 좋지요~”라는 말은 해도 정작 “채식하세요~”라는 말은 못했다. 나도 못하는데 무슨… 아직 팔팔한(?) 30대 초반의 나에게 고기 없는 삶이란 행복을 빼앗긴 삶과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어느새 ‘채식’이 트렌드화되고 채식 연예인이 속속 등장하면서 주변인들조차도 ‘채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 “조 기자, 이참에 채식 체험 기사 하나 써 봐. 조 기자가 딱이야.”라는 편집장의 이유도 없는 꼬임에 넘어가 (내가 왜 ‘딱’이지???) 자의 반 타의 반 다시 한 번 채식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래~ 난 오늘부터 채식인이야!”
열흘간 채식인이 될 테야! 진, 진짜?
어디서 주워들은 건 많아서 처음 나의 포부는 야심찼다. “좋아, 난 완벽한 채식을 해야지. 비건부터 시작하자.” 채식도 여러 유형이 있다. 이 중 비건은 제일 높은 단계다. 말 그대로 풀 뜯는 단계인 셈.
세미(조류채식: 가축류만 안 먹는 경우)> 페스코(생선채식: 가금류(조류)까지 안 먹는 경우)> 락토오보(유란채식: 생선, 해물은 안 먹지만 달걀(알류), 꿀, 우유류는 먹는 경우)> 락토(우유채식: 모든 동물성은 섭취하지 않지만 우유 같은 유제품만 허용하는 경우)> 비건(순수채식: 유제품도 안 먹고 순식물성만 섭취하는 경우)
하지만 앞서 이런 저런 걱정이 많았다. ‘난 고기도 좋아하고, 생선도 좋아하고, 유제품도 좋아하는데… (잉? 싫어하는 게 없네?) 내가 할 수 있을까? 나 정말 풀만 뜯고 살아야 하나?’
하지만 막상 채식식단을 짜면서 든 생각은 ‘채식인들이 나보다 더 잘 차려 먹네….’였다. 외식이 잦고 어디서든 뚝딱 한 끼를 해결하는 나에게는 다소 비현실적인 식단처럼 보였다. ‘아니, 언제 나물을 무치고 무침을 하고 있어?’
그래도 채식은 해야 했기에, 대안이 필요했다. 출근준비로 정신없어도 먹을 수 있는 것들, 채소와 과일, 그리고 곡류가 딱이었다. 여기에 견과류까지. 아침은 이걸 기본으로 하고 점심과 저녁은 가능한 채식식단에 충실히 따르기로 했다. 그래도 할 땐 제대로 해야지, 쩝….
쉬운 점심, 정답은 도시락!
점심은 예상외로 수월했다. 회사 동료들과 도시락을 싸와 먹다보니 오히려 골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건강을 생각하는 여기자들이 많다보니 본의 아니게 점심 밥상은 70~80%가 채소와 곡류였다. “저 채식해요오~” 말하기도 편했다. 이런~ 건강쟁이들 같으니라구!
하지만 간이 안 된 밍밍한 채소반찬과 까끌까끌한 현미밥을 먹고 있자니 기름진 고기반찬이 절로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배는 부른데, 뭔가 허전하기도 하고… 구차하게 직장동료에게 ‘나 소시지 한 조각만~’이라고 요청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 고기 반찬이여.
외근할 때는 주로 비빔밥류였다. 산채비빔밥, 돌솥비빔밥, 그냥 비빔밥…. 물론 고기고명과 계란프라이는 빼고 말이다.
고민스러운 저녁, 니 눈엔 내가 신기하니?
문제는 저녁이었다. 퇴근해서 집에서 밥해 먹으면 안 되냐고? 그랬다면 별 문제 없을 거였다. 하지만 이삼일에 한 번 꼴로 생기는 ‘지인들과의 약속’이라는 장애물은 매번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특히 친구들은 “너 미쳤니? 갑자기 왜 그래?” “우리 연을 끊겠단 거냐?”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맛난 저녁을 먹기 위해 한참 들뜬 친구들에게 “나 채식해.”라는 말은 뒤통수 제대로 때리는 말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나름 나를 배려한다고 샐러드 뷔페나 뭔가 풀 느낌이 나는 곳을 가더라도 의외로 동물성 재료들이 알게 모르게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국물류’. 처음부터 무리하게 ‘비건’을 목표로 한 탓에 멸치육수마저도 꿈을 못 꾸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유명 국수집에 가서 고기고명 빠진 비빔밥 먹는 그 기분이란… 아~ 슬펐다….
한 친구는 분식집에서 이런저런 메뉴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순대를 가리키면서)이건 돼?” “당연히 안 되지.” “(오뎅을 가리키면서)이건?” “그것도 안 돼.” “(떡볶이를 가리키면서)그럼 이것도?” “그건 돼.” “아니, 떡볶이는 왜 되는 거야?” “그건 떡이잖아. 그런 건 먹어도 돼….” “채식하면 풀만 먹어야 되는 거 아니야?” 친구야~ 나보고 초식동물이 되란 거니? 아직도 주변에는 이렇듯 ‘채식=풀만 뜯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많았다.
주말, 간식과 야식의 공포
원래 주말은 한 주간의 피로를 씻고 저마다의 여가를 즐기는 시간이다. 마음껏 방바닥을 훑으며 TV를 볼 수도 있고, 아침 늦잠도 꿀맛이다. 하지만 먹는 즐거움이 빠지니 허전했다. 간식으로 즐겨먹는 쿠키나 아이스크림에는 달걀과 우유가 여지없이 들어가 있고 그토록 좋아하는 빵에도 달걀은 들어가 있었다. (그놈의 달걀!달걀!달걀!) 시중에 나와 있는 가공식품들이 대부분 그랬다.
친구들을 만나 커피 한 잔을 하더라도 시크한 척 아메리카노만 마실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휘핑크림 잔뜩 올린 모카라떼 주세요~”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건 우유가 들어갔잖아아아….
하지만 산 넘어 산이었으니, 최대 복병은 바로 한밤중 야식이었다. 야심한 밤 배는 출출하고, 으레 그래왔듯 가족들은 야식의 대표주자 ‘치맥’(치킨과 맥주의 줄임말-)을 주문했다. 안 먹겠다는 나에게 가족들은 코앞에 치킨을 갖다 대며 “괜찮아. 이거 한입만 먹고, 채식해.” “모른 척 해줄게, 먹어.”라며 나를 회유했다. 고소한 치킨 향기를 맡는데, 왜 내 심장이 벌렁거리던지… 그래도 일주일간 지켜온 게 아까워서라도 치킨을 먹을 수 없었다. 부산물로 딸려온 감자튀김마저 외면하고는 잠자리에 누웠는데, 이유 없이 서러웠다. 댁들이나 많이 드세요~ 흑… 그리고 주말 내내 끼고 먹은 간식은 찐 고구마였다.
채식인으로 산다는 건 축복이자 저주
어찌 어찌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채식 시작 전에는 ‘채식 끝나면 꼭 고기뷔페 가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그런 생각이 간절하진 않았다. 채식 도전 열흘이 지나고 처음 먹은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맛나긴 했지만, 고기는 슬쩍 거슬리기까지 했다.
채식의 세계는 예상외로 풍성했다. 보글보글 끓인 된장찌개와 조물조물 무친 나물반찬, 도토리묵과 두부조림, 버섯볶음과 쌈밥, 단팥죽 등. 특히 한식의 경우 반찬 선택의 폭은 훨씬 넓었다. 새삼 우리나라 식문화의 중심은 채소반찬과 곡류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과일이나 채소 등 자연의 것을 주로 먹다보니, 입맛이 예민해지고 피부는 맑아지고 몸은 가벼워지는 듯했다. 물론 채식을 하면서 약간의 체중 감소를 기대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기가 빠진 허함을 고구마나 밥, 감자 등의 탄수화물로 달래다보니 이렇다 할 체중의 변화는 없었다. 요게 참 아쉬운 부분~
다만 열흘간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자리에서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삼겹살이나 소갈비를 먹고, 고기가 들어간 무언가를 먹는 대부분의 사람들 곁에서 나는 ‘유별난 애’ ‘까탈스러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주는 것도 사양하고, 식당에서 재료를 묻고, 음식을 가려먹는 사람인 것이다.
열흘간의 시한부 채식 체험으로 채식이 좋았다, 나빴다 평가할 순 없다. 물론 채식을 함으로써 몸이 가벼워지고 맑아지는 것은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포기할 순 없는 건,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이라는 조금은 궁색한 변명을 해 본다.
P.S 진짜 채식인이 되겠다면- 세미 단계부터 단계를 밟아가며 서서히 동물성 섭취를 줄이면 성공 확률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