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박길자 기자】
【도움말 |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채정호 교수】
S그룹 해외지사에 근무하는 진희정 씨(37)는 10월부터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 3개월 간 밤잠을 설쳐가며 준비한 계약이 무산돼 회사에 수백억 원의 손실을 입힌 것이다. 상사는 “계약 직전에 깨지는 일도 흔하니 마음을 추슬러라.”고 했지만, 진 씨는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불안장애가 심해지자 회사에선 진 씨를 귀국 조치했다.
직장인 10명 중 7명 ‘회사 우울증’
‘직무 스트레스’로 우울증을 앓게 된 직장인의 사례다. 글로벌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고용불안과 업무량 과다로 스트레스를 겪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최근 직장인 62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74.4%(466명)가 ‘회사 우울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 응답자의 78.5%가 ‘회사 우울증’을 호소해 남성(71.3%)보다 높았다. 연령별로는 40대(78.7%)가 가장 많았다. 원인은 ‘불확실한 회사의 비전’(47.4%)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45.7%) ‘과도한 업무량’(34.1%) ‘상사와의 관계’(26.6%) 순이었다.
회사 우울증이란 일본의 스트레스 연구가인 와세다대 고스기 쇼타로 교수가 만들어낸 용어다. 회사 밖에선 활기차지만 출근만 하면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는 증상을 말한다.
한국산업안전공단 의뢰를 받아 ‘한국인의 직무 스트레스 고위험군’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인 연세대 원주의과대학 고상백 교수(예방의학교실)는 “스튜어디스 등 감정노동자, 버스·택시·화물차 운전 등 운송업 종사자 등이 스트레스 지수가 높다.”며 “대인관계가 좋지 않거나 인간관계 폭이 좁은 직장인도 대응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 채정호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직장인 스트레스가 높은 것은 복지가 보장돼 있지 않고 노동유연성이 떨어지는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우리나라엔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가 많지 않다. 직장의 양극화가 심각한 편이다. 경제위기로 고용이 늘지 않는 데다 선진국처럼 한두 달 쉬다 예전 일터와 수준이 비슷한 직장으로 옮기는 것도 쉽지 않다.
또 사회 안전망도 튼튼하지 못하다. 채 교수는 “직장을 그만두면 의료보험을 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며 “직장이 사회안전망 역할을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선진국과 달리 학연과 지연, 인맥이 중시되는 것도 원인이다. 회사 우울증은 특히 40~50대 직장인에게 심각하다. 갈 곳이 마땅찮아 퇴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인관계 힘들어…” 직장인 사춘기 증후군 심각
최근에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직장을 구하고도 스트레스로 인해 퇴사하는 직장 초년병이 늘고 있다. 이른바 ‘직장인 사춘기 증후군’이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1년 미만 신입 직장인 69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선 구직 스트레스보다 직장 스트레스가 더 높다고 답한 응답자가 46.7%를 차지했다. 스트레스 원인 1위는 대인관계였다.
커리어가 직장인 147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또 다른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59.3%가 직무보다 대인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더 크다고 답했다. 스트레스를 주는 대상(복수응답)으로는 65.9%가 상사를 꼽았다. 이어 동료(38.1%), 사장(21.0%), 부하직원(14.9%) 순이었다. 대인관계 스트레스의 주된 원인(복수응답)은 불합리한 업무 지시가 54.1%로 1위였다. 잘못에 대한 책임 회피(42.3%), 모멸감을 주는 언행(30.1%), 남에게 묻어가려는 안일주의(28.8%) 등도 지목됐다.
회사 우울증은 남성의 전유물은 아니다. 대인관계 갈등은 여성이 많은 직장에서 흔하다. 여성이 한두 명뿐인 직장은 성차별은 있지만, 인간관계 스트레스는 적은 편이다. 여성은 나이가 들수록 압박감을 느낀다. 유리천장을 뚫고 진급하기도 힘들다.
새내기들은 왜 직장을 그만두고 싶을까?
채 교수의 분석은 “475세대나 386세대는 대학 때 인생을 어떻게 살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지만 요즘은 사춘기엔 대입에 열을 올리고, 대학 시절엔 취업 스펙을 쌓느라 바쁘다 보니 10년 늦게 정체성 고민을 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사춘기 고민을 해결할 비법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리고 주문한다. “사춘기는 지나갑니다. 이때 가출해서 거리로 나서면 인생 트랙이 달라집니다. 직장이 힘들다고 그만두는 게 능사일까요? 버티는 것이 최선입니다. 2, 3년 후에도 ‘영 아니다’ 싶으면 그때 그만두면 됩니다.”
우울증이 극도로 심각해져서 정신병을 앓는 직장인도 있다. “회사 통신망에 내 욕설이 올려져 있다.”, “모든 직원이 나를 감시한다.”, “도청장치가 숨겨져 있다.”면서 피해의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회사 우울증으로 돌연사하거나 자살하는 직장인들도 적지 않다.
이야기 상대와 ‘회사 뒷담화’ 필요
회사 우울증은 어떤 성격이 많이 걸릴까? 채 교수는 “완벽 지향적이고 책임의식이 높은 사람, 꼼꼼하고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이 걸리기 쉽다.”고 설명한다.
회사 우울증이 생기면 부정적인 인식이 커진다. “이 회사는 비전도, 미래도 없어”, “난 쓸모없는 인간이야” 우울증이란 선글라스를 끼고 바라보면 과거, 현재, 미래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해법은 과연 뭘까?
▶회사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자
재테크 공부만 눈에 불을 켜서 하면 안 된다. 부동산, 주식은 값이 떨어질까봐 전전긍긍하면서 긍정성을 키우는 공부는 왜 하지 않는가? 영성서나 긍정 심리학 류의 책을 읽으면서 낙관적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 한국EAP협회나 병원 클리닉에서 열리는 워크숍에 참여하는 것도 좋다. 긍정적인 인간을 ‘역할모델’로 삼는 것도 방법이다.
“우리 사장은 글러먹었어.”, “인사팀장은 정말 안 돼.” 비난이나 한탄만 할 것이 아니다. 후배들이 “김 부장님 덕분에 회사 오는 게 즐겁다.”는 말이 나오도록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 “내가 있으니까 우리 회사는 괜찮은 회사야.”, “나부터 우리 회사를 멋지게 만들어야지.” 이런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채 교수는 “‘멘탈 피트니스(정신 훈련)’는 운동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닭가슴살을 열심히 챙겨 먹고 일주일에 3회 이상 운동해야 효과가 있는 것처럼 매일 꾸준히 해야 좋아진다.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워라
회사는 실체가 아니다. 사람이 실체다. 회사 우울증은 사람 간의 문제로 빚어질 때가 많다. 내 안의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지고, 회복되고 치유되면 대인관계는 좋아진다.
때론 ‘아부의 기술’을 활용하자. 퇴근하기 두 시간 전 부장이 일을 던져줬다고 치자. A는 거세게 항변한다. “왜 나만 시키는 거예요?” B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한다. “부장님, 급한 일이 밀려서 그러는데요. 언제까지 시간 여유가 있나요? 이거 마무리한 후에 바로 해서 내일 아침 드려도 될까요?”
A와 B 중 누가 상사와 매끄러운 관계를 유지할까? 처세술을 꼼수로만 볼 것이 아니다. 말단직원은 ‘아, 이렇게까지 아부하면서 회사 다녀야 하나? 그지 같은 XX.’라고 생각하며 자괴감에 빠진다. 하지만 상사는 처세술인지, 진심으로 나를 대하는지 알지 못한다. 아니 그걸 가려낼 관심도, 능력도 없다. 모든 인간은 자신에게 잘 대해주길 원한다. 그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부장도 불쌍한 인간이지. 성질 더러워서 그러는데, 내가 이해해줘야지.’ 이런 생각으로 상사를 보면 직장이 편해진다.
▶이야기 상대를 찾아 ‘뒷담화’를 하라
채 교수는 “군대문화를 거친 남성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는 것을 창피해 한다.”고 지적한다. “마음이 약한 사람이네.”, “회사에서 같이 있기 어려운 사람.”이란 평을 듣기 싫어서다.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나서야 “여보, 나 너무 힘들어.”라고 말하는 게 남성이다. 힘들다고 털어놓지 못하고 괜한 말꼬리만 잡고 늘어진다. “집구석에서 청소도 안 하고 뭐하는 거야?”
당연히 아내 역시 “회사에서 왜 만날 늦게 들어와. 술이나 처먹고!”라고 반격한다. 부부갈등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워킹맘은 콤플렉스가 있어 회사에서 겪는 어려운 점을 털어놓지 않는다. 남편이 “야, 뭐 하러 나가! 그만둬!”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부장 욕을 아내한테만 해도 스트레스는 줄어든다. 남편이 죽고 싶을 만큼 힘들다는데, 가만히 있을 아내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 내가 짐을 덜어줄게.” 이렇게 나올 공산이 크다.
채 교수는 “회사를 그만둬도 존재하는 것이 인간”이라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면 일하는 기계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일의 의미를 잘 파악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소진되지 않는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