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정유경 기자】
“아프지 않고 살려면 관계의 건강을 지키세요!”
배우 황정민은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은 것 뿐”이라는 겸손한 시상 소감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또 다른 의미로 다 차려진 밥상을 받는 사람이 있다. 한림대학교성심병원 가정의학과 송홍지 교수와 마주 앉은 환자다. 체중 조절이 필요한 환자에게 ‘운동 처방’을 내리고, 간 수치가 높은 환자에게 ‘금주 처방’을 내리는 것이 흔한 진료실의 모습이다.
하지만 송홍지 교수는 다르다. 그런 처방만으로는 환자의 생활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을 숱하게 봐온 탓이다. 말뿐인 처방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방법을 늘 고민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송홍지 교수가 야심 차게 준비한 ‘성의 가득한 처방전’이다. 환자는 그 성의에다가 숟가락만 얹으면 된다. 건강해지는 행동 밥상 차려주는 의사, 송홍지 교수를 만나봤다.
한 귀로 흘리던 환자 행동파 되다!
흔히 “네.”라고 대답하지만 속으로는 ‘어떻게?’라고 반문하는 의사의 말이 있다. “운동하세요!”, “술을 끊으세요!”,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가 대표적이다. 그 말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비만, 당뇨병, 고혈압 환자를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비만, 당뇨병, 고혈압, 고지혈증 등은 심해지고 합병증이 생기기 전까지는 딱히 아픈 데가 없다. 게다가 먹고 살기도 팍팍한데 운동할 곳을 알아보고 스트레스 받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기란 어지간한 의지가 아니고서야 힘든 일이다.
그래서 송홍지 교수는 ‘정공법’이 아닌 ‘친절법’으로 바꿨다. 운동하라는 말에서 끝나지 않고 가까운 지역의 공공운동시설을 알려주고,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식사 조절이 안 된다면 가까운 전문상담시설을 알려주는 것이다.
“보통 새로운 병이 생기거나 원래 있던 병이 조절이 안 될 때는 그렇게 만든 생활습관의 변화가 있어요. 안 좋아졌으니까 약만 올려서 될 일이 아니고 생활습관을 나빠지게 만든 원인을 찾아서 해결해야 해요. 예를 들어 폭음의 원인이 된 스트레스를 혼자서 해결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되면 조심스럽게 상담을 권해드려요. 대부분 절실함이 있어서 상담이 필요한 상태인 것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이렇게 시간이 좀 지나자 먼저 상담을 받아본 환자가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생생 상담 후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환자의 귀한 시간, 노력, 비용이 달린 문제이기에 미리 다녀온 환자의 추천을 받으면 지역의 개원의나 전문가에게 검증받는 과정을 거쳐 좋은 상담소를 추천해주는 단계까지 왔다.
건강 위협하는 ‘관계’
상담이 필요할 정도로 스트레스 받는 환자를 만나면 만날수록 안타까운 점이 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는 피하는 게 가장 좋다지만 배우자, 자녀 같은 가족이나 먹고 사는 일이 달린 직장상사같이 매일 보는 가까운 관계라면 무조건 피할 수 없다.
“관계의 건강이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치고 정신 건강이 습관에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그 습관이 몸의 건강에 해롭게 작용해 병이 되는 일이 흔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관계의 건강에 더욱 신경 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몸이 건강해지려면 운동을 해야 하는 것처럼 관계의 건강도 노력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까운 사람이 바뀌기를 강요하고 기다리는 것보다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건강한 관계가 시작된다.
송홍지 교수는 자신도 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이완요법으로 풀고 환자에게 해보기를 권한다. 복식호흡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이완요법이다. 먼저 턱은 당기고 올라간 어깨를 내린다. 그다음 코로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배를 내밀고, 숨을 내쉴 때는 천천히 입으로 내쉬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알아차리면 즉, 지금 불쾌하거나 공격받는다고 생각이 되면 생각을 더 진행하지 말고 복식호흡을 해보자. 복식호흡을 하고 나면 전보다 객관적으로 문제를 보게 되어 해결 방법이 잘 떠오르게 된다.
또 이완요법을 하면 잠도 잘 온다. 스트레스로 잠을 못 이룰 때 자리에 누워 복식호흡을 해보자. 실제로 송홍지 교수의 환자 중에는 5년 넘게 먹던 수면제를 복식호흡 덕분에 끊은 사례가 있다.
한국인 놀라운 음주량 “실화냐!?”
반면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술을 마시는 것은 그만두자. 스트레스 받고 술을 마시면 과음으로 이어지는 일이 많다. 한국 사람이 얼마나 술을 많이 마시고 자주 마시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해외 학회지에 고혈압과 식습관에 관한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학회 논문 감수자가 제가 적은 한국인의 음주량을 지적한 적이 있어요. 잘못 적은 게 아니냐는 거였어요. 그 정도로 평균 음주량이 많은 거죠.”
술은 중성지방, 혈당, 혈압을 올리고 살도 찌운다. 술을 마셔서 스트레스 풀려다가 사실은 점점 더 큰 스트레스를 얻는 꼴이다. 과음을 자주 해도 간수치가 나쁘지 않다고 안심하면 큰 오산이다. 간수치는 괜찮을지 몰라도 중성지방, 혈당, 혈압 등은 높아졌을 것이다. 우리 몸에 술이 미치는 영향은 간뿐이 아니라 광범위하다.
“내 몸에 진짜 해로운 한 가지만 바뀌어도 약을 줄이거나 끊고 정상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이의 고민거리 당뇨병과 고혈압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최근 영국에서는 초저칼로리 섭취 요법으로 당뇨병 환자의 절반가량이 약을 안 먹어도 정상으로 회복됐다는 임상시험 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2018년 한 해에는 금연, 체중조절, 금주 등 가장 시급한 한두 가지만 실천해보세요. 내년 건강검진 결과가 그 노력을 헛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동안 술로 때운 시간을 운동으로 채우는 것은 어떨까? 송홍지 교수 역시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며 출퇴근을 하고 허벅지 근육을 지키기 위해 스쿼트를 한다. 제2의 심장이라고도 불리는 허벅지 근육은 꼭 단련해야 하는 근육이다. 허벅지 근육 둘레와 당뇨병 위험은 반비례한다. 허벅지 근육은 무릎 관절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하므로 잘 단련하면 나이 들어도 무릎을 쌩쌩하게 유지할 수 있다.
나이 드는 것도 서러운데 나이가 들수록 먹어야 하는 약의 개수도 늘어나기 마련이다. 7~8가지 약을 먹는 노인도 심심찮게 있다. 이 약의 개수는 식사 조절, 운동, 금연, 금주 등 확 바뀐 생활습관이 결정한다. 생활습관 개선을 하는 데 늦는 때란 없다.
‘구로고’가 되고 싶은 의사
일본 전통 연극에는 ‘구로고’라는 역할이 있다. 관객 눈에 잘 보이지 않도록 검은 옷을 입고 소품을 옮기고 배우의 연기를 돕는 사람을 칭한다. 송홍지 교수는 구로고를 꿈꾼다. 생활습관을 개선할 수 있도록, 약을 줄이거나 끊을 수 있도록, 건강을 포기하지 않도록 뒤에서 묵묵히 돕는 것이 의사의 몫이라고 여긴다. 진료실에서 건강이라는 ‘공’을 환자가 떨어뜨리지 않고 잘 받을 수 있게 던져주고 싶다.
인턴 시절, 신경외과 뇌출혈 환자의 수술을 돕던 송홍지 교수는 진로를 결정하는 계기가 되는 한 선배의 말을 들었다.
“뇌출혈 수술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뇌출혈까지 진행되기 전에 혈관질환을 예방하거나 조기 진단하고 합병증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지만 송홍지 교수는 그 말과 꼭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앞으로도 예전보다 좋아진 수치를 보고 환히 웃는 환자가 있는 한 조금 수고롭지만 뚝심 있는 행보는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