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박길자 기자】
【도움말 |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하규섭 교수】
회사원 이선주 씨(23 서울 강남구)는 요즘 가족과 친구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약속을 취소하기 때문이다. 백화점에 아이쇼핑을 갔다 50만 원대 봄옷을 사지 않으면 손해일 것 같다며 사더니 다음날 “쓸데없이 돈을 썼다”며 환불한 적도 여러 번이다. 이 씨는 “어떤 날은 기분이 들뜨다가 괜히 우울해져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말했다.
PART 1. 당신의 오늘 기분은 어떻습니까?
매년 2∼4월은 자살률이 가장 높은 시기다.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하규섭 교수(국제조울병학회 부회장)는 “갑자기 해가 길어지는 우수와 경칩 때 들뜨거나 짜증스러워지거나 기분 변화를 심하게 겪는 이들이 많다.”며 “한편으론 우울하면서 기운이 나고, 한편으론 우울하면서 충동적으로 바뀌기 때문에 자살률이 높다.”고 설명했다.
어느 누구도 기분은 일정하지 않다. 뇌의 변연계에서 조절하는 기분은 사람마다 색깔과 강도, 주기와 특색이 다르다. ‘즐거움’ ‘우울’ ‘슬픔’ 같은 기분의 색채, ‘많이 짜증난다’ ‘조금 짜증난다’ 같은 기분의 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기분 변화가 없는 사람도 있는 반면 자주 바뀌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기분이 오락가락하고, 누구는 침울한 상태가 반복된다. 공통점은 있다. 기쁜 일 있을 때 기쁘고, 슬픈 일 있을 때 슬프다는 것이다. 하 교수는 “컴퓨터 색깔을 조절하는 CPU처럼 사람에게도 기분을 조절하는 기능을 하는 곳이 있다.”며 “인체 기관 중 뇌가 그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사람의 감정은 뇌의 가장자리계(변연계)에서 생겨 이마엽(전두엽)의 조정을 통해 표출된다.미운 사람이 죽었다고 그의 장례식장에서 웃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엄청 즐겁다고 수업 중 웃어제끼진 않는다. 하 교수는 “우울할 일이 만성적으로 지속되지 않는 한 하루 종일 2주일 내로 지나가야 하고, 자기 할 일은 기본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람이 우울해지면 비관적으로 바뀐다. 기분만 우울한 게 아니라 생각도 우울하고, 머리도 안 돌아간다. 옛날 일은 다 잘못된 것 같고, 자신이 지금 형편없는 사람 같다. 머리가 평소 펜티엄5인데 점점 둔해지고 집중력, 기억력이 나빠진다. 기운이 없고 피곤하며 소화도 안 된다. 몸이 꼭 배터리 방전된 사람 같다. 이런 증상이 하루 종일 보름쯤 가면 우울증이다. 뇌에서 기분을 담당하는 신경회로 조절이 약해진 상태다. 체질적으로 강한데 스트레스가 많아서 우울증이 생길 수 있고, 스트레스는 별로 없는데 우울한 체질이면 더 그럴 수 있다.
기분이 들뜨는 상태가 3∼4일 이상 되면 경조증(hypomania)이다. 아이디어가 넘쳐나고, 자신감이 생긴다. 하지만 사고를 치진 않는다. 그런데 기분이 들뜬 상태가 하루 종일 1주일 이상 계속되면 조증(mania)이다. 직장에선 기고만장해져 고집만 부리고, 학원을 8개 등록하고, 시속 160km로 달리는 위험한 행동을 한다.
기분 변동이 25세 이전에 있고 뚜렷한 우울증이 반복되면 단순한 우울증이 아닐 수 있다. 조울병은 마음이 가라앉는 울의 상태로 있다가 들뜨는 조의 상태가 나타나는 정신질환이다. 하 교수는 “경조증만 있고 죽을 때까지 조증이 나타나지 않는 조울병 2형 환자도 많다.”며 “조울병 2형은 인구의 2∼3%이며, 한국에선 발병 비율이 정확히 조사된 바 없다.”고 말했다. 조증까지 나타나면 조울병 1형이다. 세계 인구의 1%, 우리나라 인구의 0.5%가 여기에 해당된다. 우울증이 있든 없든 기분 기복이 잦은 사람은 전체 인구의 5%다. 이들 중 상당수는 우울증을 갖고 있다.
기분장애의 합병증은 심각하다. 흡연과 폭주, 폭식, 게임·도박·홈쇼핑 중독에 빠진다. 성적으로 문란해질 수도 있다. 모차르트, 슈만, 반 고흐는 조울증을 앓았다. 극한의 장애와 창조적 영감은 관련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 교수는 “다른 사람들의 인기에 의존하는 연예인 같은 직종이나 독신, 이혼녀는 기분장애에 걸릴 위험이 높다.”고 말했다.
PART 2. 기분을 쾌적하게 유지하는 비결
기분조절회로는 우리 몸의 호르몬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여성이 감정 기복이 심한 이유다. 남성도 사춘기를 겪지만 여성은 매달 생리하면서 호르몬이 현저히 변화된다. 하 교수는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거치면서 호르몬이 확 바뀐다. 기분조절회로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조울병 1형은 남녀가 비슷하나 조울병 2형은 여성에게서 2배가 많다.”고 말했다. 또 중년기 남녀가 겪는 갱년기 우울증은 기분 조절에 영향을 끼친다.
▶?규칙적인 생체리듬을 유지하라=감정 기복을 예방하려면 규칙적인 생체리듬을 유지해야 한다. 일정한 시간에 자고, 일어나고, 식사하고 운동하는 게 좋다. 리듬을 일정하게 유지해줘야 한다.
▶?운동하라=운동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엔도르핀을 비롯해 여러 호르몬이 몸에서 나온다. 야외에서 하루 1∼2시간 운동하면 기분이 회복된다. 햇볕을 쬐면서 운동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햇볕을 쐬라=호르몬은 날씨와 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햇볕이 많아지면 멜라토닌이 줄어들고 세로토닌이 많아진다. 햇볕이 줄면 멜라토닌이 많아지고 세로토닌이 줄면서 우울?불안?짜증이 늘고 충동적으로 바뀐다. 자살 욕구가 높아지는 것과 관련 있다.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은 햇볕을 많이 쬐면 효과적이다.
계절성 우울증은 특히 가을과 겨울에 잘 생긴다. 밝은 형광등을 햇볕 대신 쬐는 광선치료를 하면 약물만큼 효과 있다. 하 교수는 “해가 길거나 짧을 때보다 갑자기 짧아지고 있을 때가 문제”라며 “이때 회로가 고장 나 적응이 늦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앓는다.”고 설명했다.
▶?금주하라=술을 마시면 신경세포의 흥분을 조절하는 기능이 약해진다. 어느 선 이상 마시면 기분장애가 생기거나 더 심해진다. 기분장애가 있는 사람은 절대 술을 마시면 안 된다. 일주일에 한 번 소주 반 병 이상 마시면 기분에 영향을 끼친다.
▶?아침형 인간이 되라=기분장애는 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저녁에 폭식하고 인터넷 클릭질을 하다 밤늦게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이들이 있다. 기분장애에 걸리는 지름길이다. 하 교수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면 기분이 우울해진다.”며 “잠을 많이 자면 기분이 가라앉고, 잠을 적게 자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아침형인간이 기분장애를 겪지 않는다는 얘기다.
▶?타임아웃 시간을 가져라=감정 기복이 있지만 직장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잘 적응하고 있고, 자신만 괴로운 상태라면 가끔씩 ‘타임아웃’ 시간을 갖는 것도 방법이다. 직장이나 주변 상황에서 벗어나서 스스로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라=우울증은 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자기 가치를 상실한 상태다. 사람은 공부, 직장, 건강, 외모, 돈 등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이를 상실하면 자신을 잃어버려 우울증이 생긴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땐 보통이거나 잘하는 데도 자신은 모자라게 느껴진다. 열등감은 우울증의 또다른 얼굴이다. 만점에 도달하려고 노력을 거듭하지만 늘 실패한다. 이루지 못할 목표를 만점으로 정하기 때문이다. 노력과 실패가 무한대로 반복되는 이유다.
하 교수는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낮춰야 한다.”며 “자신의 현재 모습을 인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라.”고 권했다.“나도 이만하면 쓸 만한 사람이야.” 늘 자신을 칭찬해주고, 때론 휴식도 취하라는 조언이다.
▶?요가나 명상으로 마음을 안정시켜라=한숨을 크게 쉬면서 마음을 환기시키는 것도 방법이다. 평소 요가나 명상을 통해 마음을 안정시키는 연습을 하면 좋다.
▶?당분을 많이 먹지 말라
▶?증상이 심하면 전문의 도움을 받아라=자신이 괴롭거나 일에 지장을 주거나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정도면 병원을 찾아야 한다. 조울병이나 우울증은 일정기간이 저절로 좋아진다. 치료가 필요한 이유는 조울병에 시달리는 기간을 줄이고, 재발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하규섭 교수는 조울병 분야 권위자로 서울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담당교수로 있다. 한국자살예방협회 회장, 동아시아조울병포럼 회장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