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이수희 기자】
“욕심의 끈 놓아버리니 암이 물러가네요”
단순 섬유성낭종이 경화되면서 유방암으로 진행, 절제술을 받아야 했던 박경희 씨. 계획된 인생을 접고 단지 ”살아남는 것’만을 목표로 투병생활을 시작했던 그녀가 담당의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 우리 아들 장가 갈 때까지 살아요?”
“그럼.”
“그러면 장가가서 손주 볼 때까지 살아요?”
“살지.”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고 있는 박경희 씨를 만났다.
2001년 여름 박경희 씨는 오른쪽 가슴에 마치 멍울같은 것이 만져져 깜짝 놀랐다.?
병원을 찾았지만 ”섬유성낭종’이라며 집에서 자가검진하면서 카페인 음료만 조심하라는 당부를 했다.
하지만, 평소에도 한 달에 두 번 정도 친구와 등산을 즐겼던 그녀는 왠지 예전과는 달리 산행이 점점 힘에 부쳤고 쉽게 지쳤다. 오가는 차안에서도 내내 잠에 곯아 떨어져 있기 바빴다.
“너 아무래도 늙느라고 그러나보다”며 친구가 보약을 먹어보라고 했다.
“글쎄~봄이 되면 한 제 먹어볼까…” 그러면서 7~8개월이 흘렀다. 어느날 문득 섬유성낭종이라던 부위가 딱딱해져 있음이 느껴졌다.
“어 이상하다 왜 딱딱해졌을까?”
그러고보니 요즘들어 얼굴색도 부쩍 나빠졌고 몸 여기저기도 좋지 않았던 터였다. 왠지 찜찜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가장에 대한 심리적 중압감, 끼니 거르거나 폭식 일쑤
섬유성낭종 자체가 가슴에 전체적으로 자리잡았으며 그 가운데가 종양으로 딱딱해져 있었다. 크기도 5㎝ 정도로 커져있었다. 유방암 2기. 부위 또한 넓어서 가슴을 절제해야 된다고 했다.
어떻게 이렇게 황당한 일이…. 지난 해 동네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을 때 섬유성낭종이 딱딱해지면서 경화될 경우 암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미리 알려만 줬더라도 좀더 빨리 병원을 찾았을텐데…. 귀가 먹먹해지고 눈앞이 아찔해져서 눈을 감아 버렸다.
“암이라는 선고를 받는 순간 다른 병원에 가서 한 번 더 진찰을 받아볼까도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내 증상을 돌아보니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더라구요.”
갑작스러운 남편의 사업부도로 가장의 역할을 도맡아 해야 했던 그녀. 아이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선택한 일이 바로 미용실이었고 그래서 뒤늦은 나이에 미용기술을 택했다. 하지만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가계를 운영하다보니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었고 심리적으로 중압감이 매우 컸었다고 고백한다.
더욱이 제 시간에 식사를 하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끼니를 거르거나 늦은 시간에 폭식하는 일이 수년간 지속됐다.
”평소 현기증이 심했고 많이 피곤해 했었어요. 몇 년 전부터 찬바람만 쐬면 콧물 감기를 달고 살거나, 위궤양과 오줌소태로 오래 고생한 것을 돌이켜보면 내게 병이 올 수밖에 없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었다고.
브로콜리, 율무효소 등 항암식품 고집?
가장이면서 아이의 보호자였던 박경희 씨. 때문에 자신의 병에 대해서 스스로 잘 알고 있어야 했고 잘 판단해야 했다.
“수술만 하면 낫겠죠?”라고 물은 그녀에게 의사는 그냥 대답없이 웃기만 했다. 약간 의아하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만 하면 금방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는 암이라고 하더라도 종양을 제거하고 항암치료만 하면 감기처럼 쉽게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그렇게 암을 만만하게(?) 알았던 그녀가 정작 그 무서움을 알게 된 것은 암에 대한 각종 강의를 듣고 공부하면서부터였다.
퇴원을 하면서 ”항암식품 50선’ 이라는 책을 구입했다. 책에서 읽은 대로 마늘, 브로콜리, 양배추, 토마토, 등푸른 생선, 우엉조림 등 모든 음식을 철저하게 항암식품으로 구성했다.
아침은 인삼가루와 삼마가루 그리고 율무효소로 대신했고 점심과 저녁은 일반식을 했다. 하지만 밥은 반드시 현미, 기장, 수수, 율무 등의 혼합식을 했고 반찬도 미역무침, 버섯, 호박, 가지 등 제철식품으로 구성했다.
틈틈이 마늘도 하루에 1~2통씩 쪄서 매운 맛을 없앤 후 먹었고 녹즙과 비타민, 효모, 영지버섯 달인 물도 열심히 챙겨서 마시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인생의 우선순위는 바로 ”살아남는 것”
퇴원 후에도 한 달에 2회씩 총 12번의 항암제를 맞았다. 6번 맞을 때까지는 힘들어도 견딜만 했었는데 그 이후부터는 정말 참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다. 조금씩 지쳐 갔지만 그때마다 자신이 돌보아야 할 아들을 떠올렸다.
“이젠 엄마가 쉴 차례인가봐요. 여태까지 아무런 어려움없이 키워주셨는데 이젠 내 차례예요.”
자기를 믿고 치료에 전념하라는 아들의 간곡한 당부가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인생의 우선 순위가 바뀌어야 할 것 같았다.
“아들한테 조금이라도 물질적인 것을 남겨주는 것이 좋을까? 아무것도 가진 것은 없지만 살아 남아서 엄마로서 그 아이의 기둥이 되어주는 것이 좋을까?”
여러 날을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던 그녀가 내린 해답은 바로 ”살아남는 것’이었다. 이외에 다른 것을 욕심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지금 내 인생은 안식년, 영혼이 평화로워
암에는 완치란 말을 쓰지 않는다. 그저 수술 잘 됐으니까 집에 가서 조리 잘하라는 당부가 전부다. 담당의사에게 물었죠.
“선생님 저 우리 아들 장가 갈 때까지 살아요?”
“그럼”
“장가가서 손주 볼 때까지 살아요?”
“살지”
다른 사람보다 투병기간을 대폭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피눈물나는 노력 때문”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박경희 씨.
그 첫 번째가 바로 ”마음 비우기’라고 강조했다.
”저도 사람인데, 마음 비우기가 어디 쉬웠겠어요. 더욱이 가장의 책임을 다해야 했기에 어깨가 더욱 무거웠지요.”
하지만 평소 긍정적인 성격과 사고는 이런 역경을 헤쳐 나가는데 큰 도움이 됐다.
”하늘을 원망하거나 누구를 탓한 적은 없어요.” 지난 세월동안 자신의 생활습관이 불규칙했고 병이 올 수밖에 없었던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자신의 탓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저는 지금 안식년 같은 휴식기를 보내고 있어요. 지금 내 영혼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거든요. 인생을 재정비하는 시간이라고 해도 좋구요.”
자연과 호흡하고 명상즐겨
지난해에는 뒷산을 오르려고 해도 5~10분을 넘기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부족했던 것이 지금은 2시간 정도의 등산도 너끈하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5분씩 시간을 늘리면서 운동한 결과다.
산에 올라서는 주로 책을 읽거나 자연을 느끼면서 명상의 시간을 많이 갖는다. 또한, 친구와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고.
최근에는 투병하면서 알게 된 암사모 모임과 캠프에도 적극적으로 참석해 정보를 공유하기도 하고 허심탄회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 속에서 서로 위안을 삼기도 하면서 투병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는 것.
”살아남는 것’으로 인생의 우선 순위를 바꿔야 했던 박경희 씨. 새로운 인생을 구상하고 있는 그녀의 계획을 살짝 들어봤다.
”도심지 근처에 공기 좋고 산책하기 좋은 곳에 두부집을 운영해보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새로운 인생플랜.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먹거리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한 그녀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의 뜻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