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윤말희 기자】
“암환우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의자가 되고 싶어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 암이라니 이 무슨 날벼락인가/ 내가 왜 암 3기/ 오진이야, 오진 부정하고/ 마침내 절대로 아니라고 분노하고, 원망하며/ 벼랑 끝에 매달려 몸부림치며, 살고 싶다고, 살려달라고, 살려내라고/ 부르짖고, 부르짖고 또 울부짖었다…
방바닥은 온통 머리카락으로 어수선하고 머리통은 까까중이 되었다/ 내 인생은 머리카락과 함께 쓰레기통으로 내동댕이쳐 가고 있었다/ 날마다 오심과 구토로 해골이 상접하고 끝내 아골골짜기로 내몰렸다…
암 선고를 받고 깊은 절망의 끝자락을 보았다는 이화숙 씨의 체험시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이 세상의 한 줄기 빛처럼 사는 이야기를 들어본다.
서울 끝자락, 동네 어귀에서는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젊은 시절부터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고 즐거웠다는 이화숙 씨.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그녀는 결혼 대신 늘 공부하고 틈틈이 여행도 다니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에 심상치 않은 몽우리가 만져지면서부터 그녀의 행복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유방암이라는 병마가 갑작스레 찾아온 것이다. 그때 그녀는 30대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유방암 진단, 그리고 절망
병원을 처음 찾았던 이화숙 씨는 자신이 암 진단을 받을 줄은 상상조차 못했었다. 그저 위가 안 좋아서 병원을 찾아간 그녀는 그때 당시 간호사였던 동생의 권유로 X-ray을 찍게 되었다.
하지만 미심쩍은 부분이 발견돼 정밀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그 결과는 실로 참혹한 것이었다. ’유방암’이라는 진단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종종 가슴에 몽우리가 잡힐 때도 있었지만 전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유아원 일이 너무 바빠서 몸을 돌볼 여유조차 없었거든요.”
그런데 유방암이라니…. 더군다나 결혼도 안한 그녀에게 있어 그 선고는 사형선고보다도 더 큰 절망이었다.
그러나 그 선고를 받고도 그녀는 자신이 운영하는 유아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자신의 몸보다 일이 더 중요했다. 유아원 아이들의 졸업식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그 무엇보다도 소중했던 유아원 아이들의 졸업식을 마치고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수술대 위에 올랐다.
꽃피는 춘삼월, 그녀의 몸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유방암은 임파선에 반 이상 정도 전위된 극한 상황이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암덩어리를 제거하는 수술부터 받았다.
그러나 암덩어리를 제거한다고 해서 암이 낫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수술 후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통스런 항암치료와 약물치료였기 때문이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 고통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항암치료라고 말하는 이화숙 씨. 치료를 받는 내내 울컥울컥 솟는 구토와 무기력증은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고 한다.
”당시 제 모습은 꼭 제초제에 까맣게 타버린 잡초 같았어요. 지독한 항암제가 제 온몸을 익사상태로 만들어버린 기분이랄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온몸이 저려온다고 이화숙 씨는 말한다.
다시 찾은 희망 그리고 식이요법
수술과 여러 차례의 항암치료가 이어졌지만 이화숙 씨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잠시 겪는 시련이자 고통이며 아픔이라고만 믿었다. 하지만 점점 빠지는 머리카락과 약해진 체력을 보면서 나날이 지쳐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녀의 몸은 항암치료를 계속 받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결국 항암치료를 시작한 지 6개월만에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제가 처해 있는 현실이 너무 절망스럽고 또 고통스러웠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이렇게 괴로워하고 나약해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번쩍 들더라구요. 그래서 암에 관한 모든 서적을 보고 ’적을 이기려면 적을 알아야한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암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어요.”
점점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그녀는 암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고, 그리고 암세포는 깨끗한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즉, 마음과 몸이 깨끗해지면 더 이상 암이 자신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됐던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신념은 곧 하루하루의 생활 자체를 바꾸어놓았다.
가장 먼저 온 변화는 그녀의 밥상이었다. 그녀는 좋은 음식만 골라 먹기 위해서 엄선된 깨끗한 식품들을 섭취했다. 또한 항암효과가 뛰어난 표고버섯과 된장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먹었다. 물 역시 한 달 주기로 뽕나무 가지, 두릅, 영지버섯과 인삼을 넣어 달인 물을 번갈아 마셨다. 그리고 아침마다 강장효과가 뛰어난 장어를 푹 고아서 마셨는데, 비린내가 나기 때문에 참기름을 한두 방울 넣어서 빠짐없이 고단백질을 보충했다.
이 외에도 유기농 과일과 채소를 즐겨 먹었고 매주 꼭 한 번은 시골로 내려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요양을 했다.
이렇게 꾸준한 식이요법과 규칙적인 생활을 시작한 지 한 3개월 정도 되었을까? 그녀의 몸은 몰라보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위로와 격려가 무엇보다 필요해
그녀가 항암치료를 받을 때의 일이다. 결혼도 안한 여자가 유방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과 치료를 받을 때마다 가슴을 노출해야 하는 것이 너무도 참담해서 치료 중에 울었던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비수를 꽂는 말뿐. ”여태까지 잘해왔으면서 왜 울어요?”라는 무심한 의료진의 말이었다.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자신과 같은 암환자에게 꼭 필요한 것은 치료만이 아니라 환자의 마음을 달래주고 지지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오늘날 그녀는 늘 바쁘다. 그 힘들었던 몇 년간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지금은 예전의 건강을 되찾아 암으로부터 벗어난 이화숙 씨는 지금 병원이나 단체를 통해 알게 된 암환우들에게 좋은 친구가 돼주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이기 때문이다.
환우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전화번호도 건네주고…. 이러면서 그녀는 혼자서 <암환자 사랑의 전화 데이트>라는 것도 만들었다. 힘들고 어려운 환우들에게 그녀가 친구가 돼주자는 취지에서 만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무려 7년이 넘게 혼자서 여전히 전화 데이트는 이어가고 있으며, 오늘도 그녀는 통화중이다.
이렇듯 죽음의 골짜기에서 새롭게 주위를 돌아보게 되었다는 그녀에게 단 한가지 소망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암환자를 위한 치유센터 ’만인의 집’ 이라는 곳을 설립하는 것이다. ’만인의 집’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인 셈이다.
“암투병 기간 동안 많은 환우들을 만나면서 가장 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수술 후 사후관리였어요. 그것은 약물이나 치료가 아닌 희망, 용기, 사랑을 통해서 소외되지 않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에요.”
도심이 아닌 자연 속에서 함께 하는 시간과 공간을 꾸미고 싶다는 그녀.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편히 쉴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작은 안식처에서 편안한 의자가 되고 싶다는 그녀의 작은 바람이 꼭 이루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