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다이제스트 | 이은혜 기자】
“암은 우리 몸에서 나가고 싶어합니다. 암세포가 떠나고 싶은 생활을 하세요”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생명을 담보로 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6년이 흐른 지금, 그때의 그 선택으로 전혀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이소명 씨(55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유방암과 친구처럼 16년을 살아오고 있는 그녀의 조금 특별한 지난 이야기를 들어본다.
별명이 종합병원
어릴 적부터 그랬다. 늘 골골거렸고, 그런 딸 때문에 부모님도 걱정을 달고 사셨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도 종합병원이었다. 그런 생활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활동하는 시간보다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감기는 늘 달고 살았다. 식탁 위에는 장기腸器별로 약 보따리가 그득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고역이었다. 이곳저곳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보니 남편한테도, 아이들에게도 늘 미안한 아내였고 또 엄마였다.
‘그렇게 힘든데 왜 병원에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 같은 반문에 이소명 씨는 “무서워서 검사해볼 생각을 차마 못했다.”고 말한다. 혹시 큰 병에 걸린 것으로 진단이 나오면 사형선고로 여기고 삶을 체념할까봐, 희망으로 버텨 지탱해온 생각마저 병들까봐, 절망에 빠지면 육신이 더 쇠약해질까봐 검사를 해볼 수가 없었다는 것.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던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된 건강강좌는 그녀의 인생 지침을 돌려놓았다.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비로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제 삶의 이정표를 마련했다고 할까요? 채식으로 건강을 지키라는 메시지였고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주제였는데 이 강의를 들으면서 무엇을 먹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해답을 찾았으니까요.”
이때부터 이소명 씨의 생활은 많이 달라졌다.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늘 육류를 달고 살던 식생활을 바꾸고 캔 음료 대신 과일을 먹었고, 늘 외식과 인스턴트를 즐겼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대신 채식을 하기 시작했어요. 성경구절을 한 번 믿어보기로 한 거죠. 창세기에 보면 므두셀라라는 사람이 969세까지 살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노아 홍수 이후 육식이 허락된 시기부터 급속히 인간의 수명이 짧아졌고, 식품보관을 위한 화학물질 첨가제로 성인병이 급증되는 현상을 보니 저 또한 인공적인 것을 절제하며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곧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일주일 단위로 몸이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몸이 가벼워지면서 의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늘 누워지내던 엄마가 활기차 보이자 남편도, 아이들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이번 기회에 꼭 건강을 되찾아보리라 결심도 서더군요. 그래서 정말 더 열심히 실천했어요.”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6개월이 지났다. 몸은 하루하루 좋아져 갔고, 더 이상 골골하는 엄마가 아니었다. 이소명 씨는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채식을 하고 일체의 화학적인 것을 거부한 결과라는 걸.
그렇게 1년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 그녀처럼 늘 피곤해 하고 약을 달고 살았던 시누이가 난소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하고 항암제 주사를 맞으면서 온 집안에는 초비상이 걸렸다. 이 일은 다른 가족들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모두들 병은 초기에 발견해야 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단체로 병원 검진을 받아보기로 했다. 이소명 씨도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하여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도 가기 싫던 병원. 하지만 이소명 씨는 더 이상 예전의 골골하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래서 애써 자위했다. 겁낼 것 없다고.
“가장 먼저 유방암센터로 가서 검사를 했는데 그것은 예전부터 늘 왼쪽 유방에 묵직한 통증이 있었서였습니다. 그동안 채식을 하면서 건강이 몰라보게 좋아졌기 때문에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검사 결과는 결코 낙관적이지 않았습니다.” 유방에 좁쌀 같은 점들이 자잘하게 많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의사는 말했다.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꼭 받아보세요.” 의사는 수차례 연락을 해서 체크를 했다. 그러나 염려해준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고마웠지만 이소명 씨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과감히 다른 선택을 했다. 그것은 누가 봐도 위험한 선택이었다.
조금 위험한 선택을 하다!
“병원 검사 결과 유방에 좁쌀 같은 점들이 자잘하게 퍼져 있었는데 의사는 그것이 암세포 같다며 정밀검사를 꼭 해야 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병원 치료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어요. 당시 난소암을 앓고 있는 시누이가 항암치료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반 초죽음이 되어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사는 과정은 옆에서 자주 지켜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잘 모를 겁니다.”
설령 그녀의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 하더라도 그런 항암치료 고통을 겪고 싶지 않다는 게 이소명 씨의 솔직한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그 대안으로 선택한 것은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것이었다. ‘1년 6개월 정도의 채식 식생활을 통해 건강이 몰라보게 좋아진 걸 보면 10년, 20년 동안 잘못된 식생활로 내 몸 속에서 서서히 자라온 암세포도 조금씩 없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자연과 가까운 생활로 돌입했고 채식주의자로 살았다. 육류는 입에 대지 않았다. 현미잡곡밥을 기본 주식으로 제철에 나는 채소와 과일 위주로 철저한 채식식사를 실천했다. 단백질은 콩 종류로 대체했고 땅콩, 밤, 호두 등 견과류 위주로 섭취했다. 당근, 상추, 민들레, 냉이, 쑥 등 각종 채소는 즙을 짜 먹거나 생 채소로 먹었다. 특히 야생초를 즐겨 먹었고 외출 시에는 직접 만든 잡곡떡을 가지고 다닐 만큼 그녀의 채식 사랑은 남달랐다.
“내 몸에 병이 생긴 것은 피 전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맑은 피로 교체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정말 열심히 실천했어요.” 그렇게 16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누구보다 건강하다. 유방암은 어찌 됐을까?
“몰라요. 16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유방암 검사를 해보지 않아서 어떤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전혀 없고 활기찬 하루하루를 사느라 잊고 살았다는 게 그녀의 귀띔이다.
이 모든 것이 다 채식을 실천한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이소명 씨. 육식은 결코 인류의 먹거리가 아니라는 게 그녀의 신념이다. 장이 긴 인간은 채식을 해야 건강을 지킬 수 있고 장수를 누릴 수도 있다는 것.
그런 탓에 그녀의 채식 사랑은 남다르다. 채식의 대중화를 위해 아낌없는 열정을 쏟아 붓고 있다. 실제로 그녀는 ‘채식과 건강’ 신문의 주필을 맡아 채식 열풍을 주도하고 있는 주역이기도 하다.
오늘도 들깨, 콩, 아마씨 가루 한 스푼씩과 통밀빵 한 조각, 야채 몇 종류와 과일로 아침을 먹고 나왔다는 이소명 씨.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암세포 앞에서 당당히 맞서 온 그녀가 또 한 번 정신 번쩍 들게 할 한마디를 던진다. “설사 이미 암 진단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암이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건가요? 암세포가 좋아하는 생활을 한 것이 원인이었다면 암세포가 도망가버리는 베스트 라이프 생활을 하면 되지 않겠어요.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적당한 일광욕을 하고
▷절제 있는 생활을 하며
▷사랑하는 마음과 믿음생활
▷깨끗한 물 마시기
▷맑은 공기 심호흡
▷천연의 맛 채식식사를 하면 분명 암세포는 우리 몸에서 떠나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 말의 긴 여운이 오래도록 귓가를 맴도는 것은 당당한 그 용기가 너무나 부럽기 때문일 것이다.